조광래호/2011년 한일 친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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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한일전/축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참사 중 하나.
2011년 8월 10일, 삿포로 돔에서 벌어진 한일전 축구경기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대패. 이때 일본에게 무려 37년만에 3점 차이 패배를 당하면서 당시 팬들에게 욕이란 욕은 모조리 먹었던 경기이다.
유니폼
일본: 파란색 하얀색 파란색
대한민국: 빨간색 하얀색 빨간색
사실 경기가 치러지긴 전 이미 징조가 보이긴 했다. 먼저 조광래의 대표팀 감독 3번째 경기가 한국에서 열린 한일전이었는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직전에 박지성의 산책과 더불어 일본을 탈탈 털어대던 경기력은 어디가고 조광래만의 포지션 놀이와 그가 원하는 패스축구를 하다 도리어 일본한테 패스 교육을 받으면서 이렇다 할 찬스 없이 0대0으로 비겼다. 그리고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4강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올스타를 출전시켰음에도 그가 원하는 점유율은 오히려 일본에게 밀리며 연장 후반에 어찌어찌 극장골을 넣어 간신히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더니 3연속 실축으로 일본한테 결승 티켓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삿포로 원정 당시엔 박지성과 이영표가 대표팀 은퇴를 한지 얼마 안 되었고, 부상으로 인해 이청용과 지동원, 손흥민이 빠진 상태였다. 반대로 일본은 불과 1년 3개월전 박지성과 박주영의 득점으로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에서 일본의 콧대를 꺾은 그 경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듯이 베스트 11중 7명을 유럽파를 채워 넣은 초호화 멤버를 꾸렸다.
0:5로 밀렸어도 할 말이 없던 상황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한국 선수들도 일본이 너무 강했다며 인정했고, 가가와 신지는 "우리가 패스할 때마다 공간이 생겼다. 한국 선수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일본 선수들이 피지컬적인 면은 몰라도 패싱 능력은 인정할만 하기 때문에 역대 한국 감독들이 일본이 패스를 시도하기도 전에 강력한 압박과 피지컬로 찍어 눌렀던 것이다. 간혹 유럽팀들이 일본을 무시하고 압박을 풀다가 일본에 의외의 일격을 맞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 압박을 풀으니 그 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
3골 차이로 완벽하게 발린 것은 37년 만이고, 37년 전에는 그나마 한 골을 넣기라도 했지 이번엔 완벽히 클린시트를 안겨주었다. 경기 내용면으로도 왼쪽 수비는 자동문이었으며, 미드필드진은 공만 잡았다 하면 당황했다. 그나마 축구 제대로 한 선수라고는 차두리를 위시한 노장들. 답이 없다. 이렇게 참패를 당한 광경을 본 국내의 축빠들은 단체로 뒷목을 잡았다. 중앙 미드필더에다가 오랜 기간 경기를 못 뛴 구자철을 윙으로 박아 넣는 등 헛웃음만 나오는 선수 기용과 전방 압박의 실종, 혼다와 가가와의 개인기에 한국 미드필더진, 수비진이 초토화가 되었고[3][4] 전방에 공을 보내기는커녕 별의 별 희한한 이유로 일본 측에 공이 넘어갔다.
일본이 미칠듯이 두들겨 팬 이후 압박이 느슨해지면서 막판에 공격 찬스를 여럿 잡긴 했으나, 김신욱과 구자철이 주어진 결정적인 기회를 약속이나 한 듯 어처구니 없이 날렸다. 많은 사람들이 ‘3골차는 안된다.’, ‘한골이라도 넣어라 축막 ㅅㅂ들아.’를 염원했지만, 결국 반전은 없었다. 특히 구자철은 적어도 2골은 확실히 넣을 수 있는 찬스를 잡았지만, 경기 감각이 없었는지 성공시키지 못하며 아쉬움만 남겼다.
가뜩이나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이후로 일본이 깽판을 치는 것 때문에 국민 감정상 매우 중요한 경기였는데, 패했으니 박탈감이 보통이 아니다. 확실히 2011 아시안컵도 그렇고 한/일 양국의 선수들의 이적 소식이나 경기 결과를 볼 때 더 이상 아시아 최강 운운하기 민망하게 되었다.
감독은 패전에 대해 부상, 원정, 심판 등 여러 핑계를 대며 먹을 욕을 곱절로 늘렸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쉬울 만한 상황이긴 했는데, 당시 이청용이나 손흥민, 지동원이 각각 부상 등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소집되지 못한데다 박주영과 기성용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대표팀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명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동네축구장에서 연습했다.[5]
더군다나 경기가 열린 삿포로 돔은 돔경기장이라서 일본은 관중들의 응원 소리가 버프되었고, 통풍이 잘 되질 않아 경기장은 습도가 80%가 넘는 찜통이 되어버렸다. 한국 선수들은 돔 구장에 적응이 덜 된 탓에 당황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참사 중 하나.
2011년 8월 10일, 삿포로 돔에서 벌어진 한일전 축구경기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대패. 이때 일본에게 무려 37년만에 3점 차이 패배를 당하면서 당시 팬들에게 욕이란 욕은 모조리 먹었던 경기이다.
유니폼
일본: 파란색 하얀색 파란색
대한민국: 빨간색 하얀색 빨간색
2. 서막[편집]
사실 경기가 치러지긴 전 이미 징조가 보이긴 했다. 먼저 조광래의 대표팀 감독 3번째 경기가 한국에서 열린 한일전이었는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직전에 박지성의 산책과 더불어 일본을 탈탈 털어대던 경기력은 어디가고 조광래만의 포지션 놀이와 그가 원하는 패스축구를 하다 도리어 일본한테 패스 교육을 받으면서 이렇다 할 찬스 없이 0대0으로 비겼다. 그리고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4강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올스타를 출전시켰음에도 그가 원하는 점유율은 오히려 일본에게 밀리며 연장 후반에 어찌어찌 극장골을 넣어 간신히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더니 3연속 실축으로 일본한테 결승 티켓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삿포로 원정 당시엔 박지성과 이영표가 대표팀 은퇴를 한지 얼마 안 되었고, 부상으로 인해 이청용과 지동원, 손흥민이 빠진 상태였다. 반대로 일본은 불과 1년 3개월전 박지성과 박주영의 득점으로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에서 일본의 콧대를 꺾은 그 경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듯이 베스트 11중 7명을 유럽파를 채워 넣은 초호화 멤버를 꾸렸다.
처음엔 이전 두 번의 한일전처럼 그럭저럭 괜찮게 붙었다. 그러나 전반 25분 왼쪽 수비수였던 김영권이 발목 부상으로 조기 교체되는 이상 징후가 발생했으며, 김영권의 교체로 들어간 박원재마저 얼마 되지도 않아 엔도 야스히토의 강슛을 머리로 막다가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일으켜 다시 박주호로 교체되는 바람에 수비진이 급격히 무너졌다. 교체카드를 왕창 쓴 직후부터 그나마 생긴 유기적인 움직임은 그대로 실종되고 수비하기에만 급급하다 전반 35분, 이근호가 수비하면서 공을 따내 역습하려다 실수로 인해 일본한테 다시 공이 넘어갔고, 그대로 득점으로 연결 시키면서 선제골이 나왔다.[1]
3. 충격과 공포의 0:3 패배[편집]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은 일방적으로 뚜드려맞게 된다. 전반전은 그래도 악재 속에서도 잘 싸웠다고 해줄 수 있었지만, 후반전은 한국 축구 역대급 졸전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반코트 게임을 당한 끝에 후반 8분과 후반 10분에 혼다 케이스케와 가가와 신지가 득점에 성공하며 0:3으로 점수차가 왕창 벌어졌다. 3점 밖에 안 먹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었는데, 정성룡이 간신히 쳐낸 슈팅이 여럿에 일본의 우치다 아쓰토의 1대1 찬스에서 날린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기도 했다.
0:5로 밀렸어도 할 말이 없던 상황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한국 선수들도 일본이 너무 강했다며 인정했고, 가가와 신지는 "우리가 패스할 때마다 공간이 생겼다. 한국 선수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일본 선수들이 피지컬적인 면은 몰라도 패싱 능력은 인정할만 하기 때문에 역대 한국 감독들이 일본이 패스를 시도하기도 전에 강력한 압박과 피지컬로 찍어 눌렀던 것이다. 간혹 유럽팀들이 일본을 무시하고 압박을 풀다가 일본에 의외의 일격을 맞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 압박을 풀으니 그 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
3골 차이로 완벽하게 발린 것은 37년 만이고, 37년 전에는 그나마 한 골을 넣기라도 했지 이번엔 완벽히 클린시트를 안겨주었다. 경기 내용면으로도 왼쪽 수비는 자동문이었으며, 미드필드진은 공만 잡았다 하면 당황했다. 그나마 축구 제대로 한 선수라고는 차두리를 위시한 노장들. 답이 없다. 이렇게 참패를 당한 광경을 본 국내의 축빠들은 단체로 뒷목을 잡았다. 중앙 미드필더에다가 오랜 기간 경기를 못 뛴 구자철을 윙으로 박아 넣는 등 헛웃음만 나오는 선수 기용과 전방 압박의 실종, 혼다와 가가와의 개인기에 한국 미드필더진, 수비진이 초토화가 되었고[3][4] 전방에 공을 보내기는커녕 별의 별 희한한 이유로 일본 측에 공이 넘어갔다.
일본이 미칠듯이 두들겨 팬 이후 압박이 느슨해지면서 막판에 공격 찬스를 여럿 잡긴 했으나, 김신욱과 구자철이 주어진 결정적인 기회를 약속이나 한 듯 어처구니 없이 날렸다. 많은 사람들이 ‘3골차는 안된다.’, ‘한골이라도 넣어라 축막 ㅅㅂ들아.’를 염원했지만, 결국 반전은 없었다. 특히 구자철은 적어도 2골은 확실히 넣을 수 있는 찬스를 잡았지만, 경기 감각이 없었는지 성공시키지 못하며 아쉬움만 남겼다.
가뜩이나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이후로 일본이 깽판을 치는 것 때문에 국민 감정상 매우 중요한 경기였는데, 패했으니 박탈감이 보통이 아니다. 확실히 2011 아시안컵도 그렇고 한/일 양국의 선수들의 이적 소식이나 경기 결과를 볼 때 더 이상 아시아 최강 운운하기 민망하게 되었다.
감독은 패전에 대해 부상, 원정, 심판 등 여러 핑계를 대며 먹을 욕을 곱절로 늘렸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쉬울 만한 상황이긴 했는데, 당시 이청용이나 손흥민, 지동원이 각각 부상 등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소집되지 못한데다 박주영과 기성용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대표팀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명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동네축구장에서 연습했다.[5]
더군다나 경기가 열린 삿포로 돔은 돔경기장이라서 일본은 관중들의 응원 소리가 버프되었고, 통풍이 잘 되질 않아 경기장은 습도가 80%가 넘는 찜통이 되어버렸다. 한국 선수들은 돔 구장에 적응이 덜 된 탓에 당황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4. 여담[편집]
- 이때 국내 기사중 골을 넣었던 혼다가 조롱적인 세레모니를 했다는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당연히 댓글반응은 기자에 대한 비난이 압도적으로 폭발...
- 일본 대표팀은 이번 한일전이 열리기 약 일주일 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이기도 했던 마츠다 나오키를 애도하기 위해 모두 검은완장을 차고 출장했다. 적절하게도 마츠다 나오키의 생전 등번호는 3번이었다.
- 이 경기가 지나고 하루 뒤에 2011 FIFA U-20 월드컵 콜롬비아 16강전에서 한국이 스페인에 승부차기로 패배했다.
- 이 경기에서 부상당했던 박원재는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세를 보였다. 어쩌면 이딴 경기 기억하고 싶지 않아!!라는 뇌의 자기방어일지도...
- 언론으로 작게 씹힌 기사이긴 하지만,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여러 도내 축구협회장들을 데려와 직접 경기를 관람했다가 선거를 앞두고 재선을 노리고자 선거운동 한 거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경기를 대패하면서 현장에서 본 조회장과 다른 도내회장들 기분은 어땠을지는 알수 없다.
- 이 경기 앞서 아시안컵 4강전에서 원숭이 세레모니를 시전했던 기성용이 선발 출전했는데, 전반전에 경고를 받자 일본 관중들의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기성용이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가 일 정도로 제대로 찍혔는데, 하필 카드를 받아 이목이 쏠리는 바람에...
- 조광래는 당시 내전으로 힘든 레바논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상심에 빠진 일본에게도 승리를 안겨줘서 네티즌들에게 평화왕 이라는 별명을 부여받기도 했다.
- 1년 후 2012 런던 올림픽에서의 남자축구 부문에서 영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 때의 일본을 본받아 한국과의 경기가 예정된 카디프의 밀레니엄 스타디움이 돔 구장이란 점을 악용해 잔디 보호라는 핑계를 대고 지붕을 닫고 경기를 했지만 한국 선수들은 두 번 당하지 않았고 1 : 1 무승부를 거둔 후 승부차기에서 5 : 4로 꺾어 영국의 꼼수를 처절하게 응징했다.
- 연령은 달랐지만 이 참사가 벌어진 뒤 딱 1년 되던 날에 일본과의 리턴 매치가 성사되었으며, 자세한 건 이 문서 참고.
- 이로부터 6년 후 대한민국의 신태용호가 일본 홈에서 개최한 2017 일본 동아시안컵 도쿄에서 알제리 쇼크 감독이 이끄는 일본대표팀을 4:1로 대승을 하며, 63년만에 일본 홈에서 4골 3점차 승리 설욕하였다.
- 이로부터 약 10년 뒤인 2021년 3월 25일, 요코하마의 닛산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한일전 A매치에서 이 삿포로 참사에 비견되는 일이 벌어진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6]
- 이걸로 끝난게 아니다. 2022년 6월 8일, 변성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17세 이하(U-17) 대표팀도 일본 유어텍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2022년 U-16 인터내셔널 드림컵에서 0대3으로 완패했다. 그리고, 겨우 나흘 뒤인 2022년 6월 12일, 2022 AFC U-23 아시안컵 우즈베키스탄 대회 8강전에서 황선홍호도 일본에게 0대3 완패를 당했고, 6월 23일, 대학선발팀이 일본 18세 이하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0-1로 졌고, 25일에 가진 덴소컵 대회에서도 일본 선발팀에게 0-5로 대패했으며 2022년 7월 27일 2022 동아시안컵에서도 벤투호가 또 0대3으로 완패하는 참사까지 벌어져 축구팬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1년 4개월 사이 성인대표팀, 23세 이하 대표팀, 대학선발팀 17세 이하 대표팀이 일본을 만나 연달아 무득점으로 패하면서 6전전패 0득점 18실점으로 당하는 참사가 벌어지게 됐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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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근호의 실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기성용의 아무 생각 없는 전진 수비로 공간이 텅 비어버리는 바람에 카가와 신지가 손쉽게 공간 침투 후 선제골을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거기다 공미를 보는 혼다 케이스케는 공미라는 높은 지점에서도 한국의 힘에 밀리지 않는 피지컬+한국 수비를 갖고 노는 테크닉을 겸비한, 일본 초유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일반적인 일본 선수였다면 조광래 생각대로였을지 모르겠지만...[3] 사실 좀 불운했던 게 김영권이 부상으로 아웃되고 교체로 들어갔던 박원재가 5분만에 뇌진탕으로 아웃되어 박주호가 투입되는 등 수비진 왼쪽이 붕괴되긴 했다. 하지만 전방 압박이 실종된 상황에서 불운이 없었다고 해도 과연 잘 해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영권도 교체전까지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박주호는 아예 문자 그대로 탈탈 털렸다(...).[4] 더불어 당시 센터백 중 1명이었던 이재성은 이 경기가 무려 국가대표 데뷔전이었다. 김영권이며 박원재 같은 풀백들도 당시 A매치 경험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의 새내기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일전 일본 원정에서 뭔 깡을 부렸는지는 알수 없다.[5] 이에 일본은 자기들 입장에서도 삿포로는 거의 원정경기급이라며 응수했다.[6] 이후 올림픽 축구와 야구 역시 요코하마에서 참패를 당하며 요코하마는 삿포로 못지 않은 재앙의 땅으로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