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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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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정비.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유일하게 왕세제빈에서 중전으로 진봉한 왕비이다.
성씨는 서씨이며 본관은 대구 달성군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며 1692년(숙종 18년)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년), 12살의 나이에 11살 연잉군 이금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책봉되고, 1721년(경종 1년), 조선 20대 국왕 경종이 이복동생 연잉군 이금을 왕세제로 책봉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된다. 1724년(경종 4년), 경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였고, 이에 따라 임금의 상징인 어보(御寶)를 이어받은 남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식 왕비가 되었다. 남편과의 불화로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으며 창덕궁 대조전 관리각(관리합)에서 1757년(영조 33년) 2월 15일, 6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승하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능호는 홍릉(弘陵)이다.
2. 생애[편집]
2.1. 세제빈 시절[편집]
야사에는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에게 시집온 첫날 있었던 일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혼인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정성왕후가 무심코 "반가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이게 소박맞을 만큼 잘못한 말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누라의 대답을 출신이 미천한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숙빈 최씨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출신이 불분명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손마디와 뼈마디도 굵고 손이 되게 거칠었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서 영조가 정성왕후를 미워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연잉군을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조는 이복형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무릎 꿇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저하를 위해 모의한다는 서덕수의 발언을 세상에 알린 게 다름아닌 영조인 만큼 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삼수의 옥을 수사하던 도중에 목호룡의 고변에서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죽음도 서덕수가 경종 암살을 위해 구한 독약의 시험 대상 겸 정성왕후의 경쟁자 제거를 위해 정빈 이씨에게 독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2. 왕비 시절[편집]
1737년(영조 13년) 3월 10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는 신하들이 "중궁전에 들어가는 진상품보다 현빈궁[3] 에 들어가는 진상품이 많아 중궁전의 체면이 맞지 않으니 진상품을 늘리자"고 하자 "현빈궁에 기거하는 나인이 많아 그런거"라며 거부하고 "중궁전에 들어가는 약에 대한 표지를 내리는게 매번 늦어 중궁전으로 들어가는 약이 들어가는 것이 매번 늦어진다"고 하자 "도제조가 서씨 일가의 서명균인데 설마 늦겠냐"며 "이미 이전에 서명균에게 중궁전의 약은 그들 집안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고 변명했다. 신료들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뭐 확인해보겠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
두 부부 사이가 최악인 건 궁궐 내에서도 공공연한 일이었는지 정성왕후는 승하하기 14년 전인 1743년(영조 19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증 가지고 엄살 부린다"고 말을 씹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용태(병의 증상)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라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할 정도였다.[4]
1752년(영조 28년) 11월 23일에는 "중전의 회갑인데 하례를 드리게 하자"는 우의정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사도세자에게 "네 엄마[5] 의 회갑이랍시고 잔치까지 크게 벌일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문학 박사눌(朴思訥)이 가서 고한 뒤에 또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물었다. 박사눌이 말하기를,
"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구나."
하였다.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그로부터 15일 후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여 홍역을 앓다 나은 지 1달밖에 안 됐던 병약한 사도세자를 눈 밭에서 양위를 한다는 전교를 거두어 달라게끔 석고대죄 제대로 시켰다.
2.3. 사망 후[편집]
1757년(영조 33년), 승하 직전이나 당시, 《영조실록》과 《한중록》에 따르면 심하게 각혈을 하고 팔다리가 심히 부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현대로 치면 위궤양에 부정맥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걸로 보이는데 당시 남편 영조의 태도가 그야말로 막장이다.
중궁이 피를 토하여 약방에서 주원에 옮겨 직숙하다
중궁전(中宮殿)이 편찮은 까닭에 약방에서 주원(廚院, 사옹원)에 옮겨 직숙하였다.
당시 곤전(坤殿)이 피를 토한 것으로 인하여 원기(元氣, 심신의 활동력)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연달아 삼다(蔘茶, 인삼차)를 올렸지만 조금의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영조는 죽은 마누라의 빈소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우연히 같은 날 사망한 사위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문상을 갔다. 이는 궁중 예법에도 어긋나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지나친 처사라 대신들과 대간이 경악하여 심하게 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遞差)[6] 해버리면서까지 인정머리 없이 강행했다.
일성위 정치달이 졸하자 곡반을 하고, 이를 만류한 삼사 신하를 체차시키다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화완옹주의 남편)이 졸(卒)하였다. 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중략)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李最中)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유배 죄인의 평소 공로 등으로 정상 참작하여 중간 지점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유배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중략)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이후 불과 한 달 후인 3월 26일, 대왕대비 인원왕후마저 승하하면서 일종의 완충장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 후 조선사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극적 스캔들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를 배려한 탓이었다.[7] 영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3. 가계[편집]
- 친정(달성 서씨)
- 배우자 / 자녀
4. 여담[편집]
-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라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로는 장수했다. 1757년(영조 33년), 승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다. 임오화변이 발생했을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가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가 바로 정성왕후의 위패가 있는 창경궁 휘령전이었다. 두 사람이 위패에 절을 한 직후 갑자기 영조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지간 사이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고 주장하며 궁을 봉쇄하고 사도세자를 처단하게 된다.
- 남편 영조와는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최악이자 막장 그 자체이다.[8][9] 영조는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 변두리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문안이나 안부 등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도 숙의 문씨에 의한 건방진 말꼬라지 때문에 인원왕후가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고 사도세자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보는 앞에서 회초리로 종아리 때리다가 영조한테 발각돼서 역성을 들다가 결국 파토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그 와중에 슬퍼하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10]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 사도세자와는 친아들이 아님에도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자녀를 낳지 못해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돌봤다고 한다. 실제로 정성왕후는 살아 생전에 사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생모였던 후궁 영빈 이씨의 자식에서 중전 정성왕후의 자식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시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법적인 할머니 되는 인원왕후와 더불어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인물이었으며, 사도세자 역시 편집증적인 스타일과 냉혹한 성격의 영조한테 학대당하는 핍박 속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어머니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극진히 대우했다고 한다.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사도세자가 밖에서 "소자가 왔다"며 엎드려 통곡했을 정도다. 어찌보면, 정성왕후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중압감을 주는 처지를 보고 동병상련을 느꼈을 수도 있다. 다만 말이 아들이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마흔둥이(늦둥이 아들)었기 때문에, 정성왕후와도 나이가 40년 이상 차이가 나서 당시 기준으로는 할머니와 손자뻘이 된다.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와도 그럭저럭 관계가 괜찮았다고 한다.
- 종합적으로 보면 폐비가 되지 않았을 뿐, 내쫓기지 않은 조선의 왕비 중 제일 비극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남편인 영조에게 계속 홀대받은 걸로도 모자라, 영조는 정성왕후의 죽음을 그녀가 친자식처럼 아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말실수를 한 것이든 조카 때문에 곤란에 처한 것이든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이든, 정성왕후가 크게 잘못한 것은 사실상 없는데도 영조 혼자 착각하고 의심하여 홀대를 수 십 년 동안이나 받았다. 어찌보면 못난 남편 탓에 폐비가 되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은 남편과 사이가 괜찮았던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11] 보다 여자로서는 더 비참했다고 볼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무수한 영조의 출연작들에 비해 출연 빈도가 적다. 거꾸로 말하면 이하의 작품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고증과 구색엔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5.1. 드라마[편집]
- 동이 - 신규리(아역), 정모레(성인)
5.2. 영화[편집]
실제 역사대로 초반부에 시어머니인 인원왕후와 함께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를 어린 시절부터 매우 귀여워하며 예뻐한다. 또한, 남편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점도 묘사된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세자빈 홍씨에게 알려주는 부분에서도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14] 하지만 영빈 이씨가 환갑 잔치까지 건의해줄 만큼 대접을 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15] 실제 역사에서는 대왕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먼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16]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발한 이유에는 자신을 아껴주던 정성왕후의 죽음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등장한 이 영화에서도 실제 역사보다 비중이 낮게 책정된 편.[17][18]
- 궁합 - 김분례
6. 참고 문서[편집]
- 경빈 박씨
- 경종
- 경종실록
- 경희궁
- 사도세자
- 선의왕후
- 숙빈 최씨
- 숙의 문씨
- 숙종
- 숙종실록
- 영빈 이씨
- 영조
- 영조실록
- 인원왕후
- 임오화변
- 정빈 이씨
- 정순왕후
- 정조
- 정조실록
- 조선/왕사
- 창경궁
- 창경궁 휘령전
- 창덕궁
- 한중록
- 홍릉
- 화완옹주
- 효순왕후
- 효장세자
- 혜경궁 홍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