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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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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함평(咸平)[4] , 호는 중원(中圓)이다.
2. 생애[편집]
1939년 11월 17일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에서 아버지 수봉(壽峰) 이재동(李載東, 1915. 4. 13 ~ 1969. 3. 1)[5] 과 어머니 행주 은씨(幸州 殷氏) 은문화(殷文華, 1919. 10. 14 ~ )[6]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7] . 초등학교 2학년 때 전라남도 광주부로 전학해 광주서석초등학교,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1961년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을 결성 선전위원장을 지냈다. 1965년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을 결성해 선전위원장으로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사건과 관련, 혁명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듬해 4.19 혁명유공자로 형을 면제받아 출감하였다. 또한 1966년 김두한 등과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으로 구형공판에서 7년형을 구형받았지만, 같은 해 5월 10일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2년간 사상계에 정치 평론도 썼다. 당시 전과자는 신원조회에서 걸려 모든 공직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동양통신의 사주인 김성곤의 도움으로 간신히 취업하였다. 당시 외신부에서 일하다 보니 해외 소식을 많이 알게 됐고 당시 김대중 의원이 이영일에게 해외 상황을 자주 물어봤는데 곧 도청을 당해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한국독립당 때까지의 삶은 학생운동가였으나, 이후 정권에 적극 협력하여 1977년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통일연수원장, 교육홍보국장, 홍보실장(1급) 등 관료로 근무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광주의 직할시 승격 공약을 걸며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김녹영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86년까지 민주정의당 총재비서실장을,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민주정의당 윤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국회 문교공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광주직할시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정상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 쓰쿠바대학 역사인류학과에서 국제정치, 특히 공산권의 체제변동을 연구하였으며 1989년에는 당시 국교도 맺어져 있지 않던 중국을 홀로 방문하여 천안문 6.4 항쟁 이후의 중국사회상을 둘러보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당 정상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선출되자 이에 반발하여 이종찬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1995년 새한국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자 민주당에 속하였다.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서 광주광역시장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송언종에게 패하였다. 선거 이후 다시 이종찬과 같이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1997년 신기하 국회의원이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별세하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박태영 전 의원과의 경선에서 승리한 뒤 광주광역시 동구 선거구에 국민회의 후보로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이후 1999년 6월 새정치국민회의의 대변인이 되었다. 대변인 재직 중 중앙일보 간부가 정부의 언론대책 문건을 정형근 전 의원에게 전달했다고 발표한걸로 중앙일보와 정형근 한나라당 국회의원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김경천에게 밀려 탈락하였다. 이에 대해 본인은 공천권을 쥐고 있던 동교동계 구파들이 광주시민단체들과 연계하여 이영일을 5공 세력으로 몰아 광주지역 낙선대상자로 낙인찍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무소속으로 광주광역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김경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2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빈소에 방문했다.#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8]
3. 여담[편집]
- 2004년 2월 13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함평 이재혁 가옥(咸平李載爀家屋,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379-2번지 소재)의 유래가 된 죽하(竹下) 이재혁(李載爀, 1893. 9. 15 ~ 1992)이 바로 이영일의 7촌 재당숙(再堂叔)이다.
- 본 가옥은 1898년경 백범 김구가 은거했다는 '이참봉'댁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1897년(고종 34) 조경묘 참봉(肇慶廟參奉, 종9품)을 지낸 석암(石菴) 이동범(李東範, 1869 ~ 1940. 3. 2)[9] 이 건립한 뒤 이동범의 차남 이재혁이 대를 이어 거주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동범은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이성우의 조부 이태형(李泰亨, 1841 ~ 1894. 12. 25)[10] 의 9촌 삼종질(三從姪)이기도 한데, 이태형이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된 뒤 그 후손들의 집을 지어주는 등 생계를 보태주기도 했다.
4. 선거 이력[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임기 중 사망.[2] 효우공파(孝友公派) 30세 행(行) 항렬. 족보명은 이철행(李哲行).[3] 鄭晶愛. 1942년 2월 20일생. 해주 정씨 정태응(鄭泰應)의 딸이다.[4] 30세 항렬자가 다닐 행(行)자다. 족보명(族譜名)은 이철행(李哲行)이며, 본명인 이영일(李榮一)은 함평이씨대동보 권11 1095쪽에 자(字)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이영일 족보.png[5]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이재관(李載官). 해보면장을 지냈다.[6] 은우정(殷宇楨)의 딸이다.[7]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파일:이재동 족보.png파일:이영일 설명문.png[8] 공교롭게도 그의 4선을 좌절시켰던 김경천 전 의원도 윤석열 지지 전직 국회의원 316인 중 한 명이다.[9] 자는 경연(敬然).[10] 족보명 이계균(李啓均), 자는 상삼(相三).[11] 제2선거구[12] 전임자 신기하 1997.8.6. 사망(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13] 2000.3. 공천 불복으로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