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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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집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부분에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헌종 때는 창덕궁이었고, 고종 시기에는 창경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다시 창덕궁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위치도 창덕궁 주요부와 꽤 떨어져있고 오히려 현재 창경궁과 훨씬 가깝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 이름과 현판[편집]
'낙선(樂善)' 뜻은 '선을 즐긴다'이다. 《맹자》에 나온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樂善) 게으르지 않는 것(不倦)을 천작(天爵)[2] 이라고 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현판 글씨는 청나라 문인 섭지선(葉志詵, 1779 ~ 1863)의 글씨이다. 단, 집자[4] 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면 쪽 툇마루 안쪽 오른쪽 칸에는 '보소당(寶蘇堂)' 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헌종의 당호이기도 하며 '소식(蘇軾, 소동파)을 보배(寶)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헌종이 소식을 많이 흠모했던 듯 하다.
3. 역사[편집]
1847년(헌종 13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지었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았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6]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은 승하했고 경빈 김씨는 궁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이 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했다.# #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7] 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유학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이 이 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했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의 대화재 이후 내전을 재건할 때까지 여기서 거주했다.
순종 사망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 순종 사후 한 달 뒤에는 대조전에 머물던 순정효황후가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했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이 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이후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엔 의민태자(영친왕)와 이방자가 귀국하면서 낙선재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 때 낙선재 본채는 의민태자 - 이방자 부부가[9] , 석복헌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했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10] 낙선재는 마지막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 되었다.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2005년 7월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사망하자 빈소를 이 곳에 설치하여 조선 왕실 - 대한제국 황실 최후의 빈소로 기록에 남았다.
2012년 3월에 문화재청에서 보물 제1764호로 지정했다.
이후 (명목상) 이구의 양자인 황사손[12] 이원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문화재청에 제안한 적이 있으나 문화재청 측에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4. 구조[편집]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겹처마 양식에 공포는 이익공,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과 계단 3개를 조성했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만든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했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했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기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서쪽 끝에 누마루가 정면 1칸, 측면 2칸의 2칸이 나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방 사이엔 둥근 모양으로 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차례로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창고가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있다. 동쪽의 온돌방과 마루방 북쪽엔 위에 적었듯이 온돌방이 2칸 더 나있는데 《동궐도형》에 따르면 이 덧댄 온돌방을 통하여 석복헌과 실내로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특이하게 창호가 각 방마다 다른데 만(卍)자 살, 아(亞)자 살, 정(丁)자 살을 비롯하여 당초무늬, 박쥐무니, 마름모고리무늬 등으로 상당히 개성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 정면 동쪽 끝에는 작은 나무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서편에 또 다른 문이 있는데 양쪽 기둥을 전벽돌로 쌓고 거기에 판장문을 달았다. 이런 양식은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낙선재 뒤뜰의 화계를 볼 수 있다.
- 낙선재 동남쪽에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행랑이 보이며 이 행랑에 난 문을 지나 좌측으로 들어가면 석복헌이 나온다.
5. 부속 건물[편집]
5.1. 석복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http://obj-sg.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5.2. 수강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http://obj-sg.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5.3. 평원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http://obj-sg.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5.4. 취운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http://obj-sg.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5.5. 한정당[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http://obj-sg.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6. 여담[편집]
- 2015년 문화재청에서 낙선재 권역을 객실로 개방하는 이른바 '궁 스테이(宮 Stay)'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보물로 지정된 낙선재 본채는 놔두고, 부속 건물인 석복헌과 수강재를 수리하여 개방하려 했던 것. 그러나 하루에 300만 원 씩 받는 금액 논란에다 화재 위험 때문에 계획을 무산시켰다.#
- 영친왕이 일본에 있을 때 고국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고 한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한다.
〈창덕궁 달빛기행〉 코스 중 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달빛감상을 주로 이곳에서 한다.
7. 매체에서[편집]
-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영친왕(서인석 분)의 추억이 서린 곳으로 나왔다. 임종 직전의 영친왕이 들 것에 실려 낙선재로 옮겨진 뒤, 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1년 방송된 KBS2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수렴청정을 거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가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견제로 나머지 대비들과 함께 머무는 곳으로 등장했다. 이 때 신정왕후는 '할 일 없는 과부 셋(신정왕후 조씨, 효정왕후, 철인왕후)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라며 비꼬았다. 다만, 실제 낙선재는 지나가는 배경 화면으로만 나왔고 실제 촬영은 경복궁의 함화당에서 했다. 아니 실제 낙선재에서 찍지 굳이 왜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2] 남에게서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덕행.[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낙선재 권역 1》.[4] 集字. 글자를 모아 작품 하나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5] 사진 출처 - 카카오맵.[6] 연구자들은 낙선당과 낙선재의 자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7] 移御. 쉽게 말해 임금이 이사하는 것.[8] 맨 앞줄이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9] 영친왕은 혼수상태라 귀국 직후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낙선재와 한남동 일반주택을 오가며 생활했다.[10] 둘 다 같은 해 4월에 사망. 덕혜옹주가 4월 21일에 사망하고, 이방자가 9일 뒤인 4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11] 사진 출처 - MBC Archive.[12] 皇嗣孫. '황실의 적통을 잇는 자손'이란 뜻이다.[1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6] 첫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1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