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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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창덕궁 대조전의 정문이다. '선평(宣平)' 뜻은 '화평(平)을 세상에 펼친다(宣)'이다.
2. 역사[편집]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에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 나와있지 않다. 다만, 대조전의 정문임으로 대조전과 같이 1405년(태종 5년)에 창건한 듯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복구했으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했다. 이후 순조 때 다시 불탄 것을 헌종 때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창덕궁 내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20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로 저 때 경복궁 양의문[2] 건물을 헐어 옮겨다 지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시대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3. 구조[편집]
3.1. 조선시대 선평문의 모습[편집]
- 〈동궐도형〉을 보면, 희정당과 연결되는 복도각 안에도 문이 있었다. 선평문에서 복도로 접어드는 문 승복문(承福門)과 희정당 행각 쪽으로 붙어있는 승명문(承明門)이었다. 복도각 가장자리에는 창호가 달려있었다.
3.2. 1920년 재건 이후 선평문의 모습[편집]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문짝과 측면의 벽은 초록색 나무판이다. 문의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단청은 모로단청[4] 으로 칠했다.
- 왕이 다니는 가운데 칸을 양 옆 칸과 다르게 만들었다. 넓이도 더 넓고 문의 높이도 더 높다. 문짝도 가운데 칸은 6판이나 양 옆은 4판이다.
- 각 칸의 인방 위에 풍혈을 뚫은 궁판을 올렸다. 좌, 우 칸의 경우, 위, 아래 7개 씩 총 14개의 풍혈을 뚫은 궁판이 놓여있으나[5] 가운데 칸의 경우, 풍혈 10개 뚫린 궁판 하나를 올렸다. 궁판들 위에 홍살을 놓았으며 가운데 칸 궁판에 현판을 걸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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