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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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지역 팜이자 한국프로야구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교 야구부다. 2020년 기준으로 졸업생 총 169명이 프로야구팀 유니폼을 입었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많은 4명의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한국 최상위권의 야구 명문고 중 한 곳이다.
한국 한정이 아니라 아시아, 미국, 세계로 확장해도 메이저리거를 4명이나 배출한 고등학교는 흔하지 않다. 참고로 4명 이상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고등학교는 600개 정도로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의 3명[7] 이 진출했던 상태였을 때에도 이게 특이하게 받아들였는지 미국 신문에 특집 기사로 올라온 적이 있었으며 강정호 메이저 진출 이후에는 뉴욕 타임즈에서 광주일고로 취재를 왔을 정도다.
연고 구단은 KIA 타이거즈이지만 의외로 키움 히어로즈 소속 선수들도 꽤 있다. 이 때문에 2013년도 이후로 두 팀이 붙으면 말 그대로 동문회 수준이었던 적이 있다.[8] 애시당초 키움 뿐만 아니라 10팀 전체에 여러가지 포지션으로 선수로나 코치로나 고르게 분포해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광주서중학교였던 시절부터 야구부가 있었고, 이 야구부는 1949년 대형 사고를 쳤다. 당시 모든 대회를 평정하던 경남중학교의 장태영과 맞서서 극적인 승리를 따낸 것. 그 선봉장은 철완이라 불린 김양중이었고, 194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9회 2아웃까지 0:1로 뒤지다가 상대 실수로 만든 2사 2루의 찬스에서 김양중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고, 다시 연장 11회말 볼넷으로 얻은 무사 1루의 기회에서 보내기 번트가 전진 수비를 한 내야수의 키를 넘어 외야로 넘어가고, 당황한 경남중의 좌익수가 공을 잡고 3루로 던진 것이 3루 베이스를 맞고 튀면서 끝내기 점수를 내며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이 때의 결승전을 보통 고교야구 최초의 명승부로 꼽는 편이다.
그리고 이 우승 이후 호남야구는 1960년대 후반까지 긴 시간을 침묵하게 된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호남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동하는 대규모 인구 이동 현상이 있었고 호남지역 야구 저변마저도 얇았던 탓이다. 서울, 인천, 부산·경남, 대구·경북 등 4개 지역 학교들이 돌아가며 우승컵을 돌려 받던 침묵의 시간동안 호남권 학교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70년대 초중반 '역전의 명수' 신드롬을 일으켰던 군산상고가 호남야구의 부활을 도모했으나[9] 그 시절 광주일고의 이름은 없었다.
1975년 대통령배 결승은 광주일고도 오랜 침묵을 깬 결승이었다. 군산상고로부터 시작이 된 호남야구 부활의 바람은 광주일고에게도 그대로 옮겨와 대회 사상 최초로 결승전 3연타석 홈런을 날린 김윤환의 활약과 투수 강만식의 호투 속에 당시 막강했던 경북고를 제압하고 첫 우승에 성공하면서 광주일고의 이름을 다시 알렸다. 그리고 꾸준히 1970년대 4강권 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괴물투수 선동열의 등장으로 고교야구의 최절정기에 광주일고는 다시금 우승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통령배에서 선동열을 앞세워 동향의 광주상고를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뭔가 꼬이게 되었고, 결국 1980년 봉황대기에서는 중앙고에게 일격을 당하고 2회전 탈락하더니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선동렬이 박노준에게 홈런을 맞고 물러나면서 선린상고에게 3:5 패배를 당하며 단 한 차례의 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1983년 광주일고는 고교야구를 평정했다. 에이스 문희수와 투타만능의 박준태라는 대들보 두 명에 카리스마 넘치는 주장 김성규와 유격수 김선진이 이끄는 탄탄한 내야수비까지. 정말 전력이 막강했던 광주일고는 1983년 시즌 개막과 함께 세광고를 한 점차로 제압하고 대통령배 우승에 성공했다. 청룡기에서는 북일고에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지만, 봉황대기에서 포철공고를 두 점차로 따돌리고 우승에 성공[10] 하더니 마침내 황금사자기에서 대구고마저 누르고 우승에 성공하며 한 시즌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때의 멤버들이 졸업한 후에도 언더핸드 에이스 이강철이 등장하며 1984년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면서 그들의 전성시대가 화려했음을 다시금 보여줬다.[11]
공백기라고 하지만 우승이 없었다는 점은 아니고, 1988년 청룡기에서 이종범을 앞세워 우승을 차지했고, 1995년 청룡기에서 김병현을 내세워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공백기로 볼 수 있는 것이 이 시기에 배출한 선수들의 화려한 면면을 볼 때, 우승 횟수가 다소 아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고교야구의 어벤저스, 전설의 92학번이 고3이었던 1991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결승에 올랐지만 각각 경남상고와 신일고에게 무릎을 꿇으며 정상을 놓친 것은 가장 아까운 순간이었다. 당시 박재홍과 김종국이 이끌던 광주일고[12] 의 전력은 충분히 강했지만 돌풍을 일으킨 김건덕의 경남상고와 팀 역사에 손꼽히는 전력을 구축한 조성민-설종진의 신일고에게는 한 끗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1997년도 마찬가지였는데 최희섭-송원국-이현곤-정성훈이라는 최강의 내야 라인업을 구축했지만, 투수력이 미치지 못해[13] 신일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 1회에 그친 것도 아쉬운 대목.
이 시기에 나온 선수들 중 이름있는 선수들만 조금만 추려봐도 이종범, 박재홍, 김종국, 이호준, 최희섭, 김병현, 서재응, 게다가 이제는 감독이 된 염경엽, 김기태 등등. 그걸 여기다 쓰기에는 위키의 여백이 너무 좁다.
광주일고는 2002년 다시 고교무대 정상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교 무대 쌍벽을 이루던 투수[14] 김대우와 고우석, 오준형, 이대형, 이들의 1년 후배 모창민이 모두 한 팀[15] 이었던 점만으로도 그 강력함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비록 천안북일고와 고교 무대를 나누는 통에 우승은 두 번으로 만족[16] 해야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광주일고의 전성기는 충분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 전성기는 에이스 나승현과 주장이자 4번타자인 강정호를 축으로 2005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하면서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뛴 선수들이 나승현, 강정호, 서건창,허경민[17] , 김성현, 김강 ,조성원같은 선수들이 뛰었던 시절로 봉황대기 결승에서 배장호가 이끌던 유신고에게 일격을 당해 우승을 놓친 것이 아쉬울 정도의 멤버였다.
이들이 대부분 졸업한 후에는 3학년 정찬헌과 2학년 장민재를 에이스로 삼아 2007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서울고등학교의 에이스 이형종의 눈물을 이끌어 내면서 서울고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에 성공했으며,[18] 2008년에는 정성철과 장민재(당시 장민제)를 앞세운 투수진으로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2009년 심동섭과 유창식으로 봉황대기 준우승의 아쉬움(천안북일고의 김용주에 패배)은 2010년 고교최대투수 유창식 고교최대야수 허일과 함께 장충고를 꺾고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깨끗하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광주일고는 유창식의 졸업 후에도 분명 호남지역 주말리그에서는 강세를 보이지만, 전국 무대에서는 그 위세가 약간 우승권 아래 정도로 내려간 상황이다.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50724_0005708002_web.jpg](//obj-sg.the1.wiki/d/c5/d0/a71be494730e70cf211fb1790f7a41ad323542515bd20e7f2edf2dfef226a5db.jpg)
2010년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다가 2013년과 2014년 2년 연속으로 대통령배 4강 진출에 이어 2015년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성남고와 연장 11회까지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위상을 높였다.[19] 2016년에는 주춤했으며 같은해 10월 김선섭 감독에서 성영재 감독으로 감독 교체가 있었다.
성영재 감독이 팀 전력을 재정비하고 시작한 2017년 봉황대기에서 준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신입생 안인산이 투-타 양면에서 맹활약한 야탑고에게 5-7로 무릎을 꿇었다.[20]
2018년 황금사자기에서는 북일고, 덕수고, 경남고 등 강팀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라 대구고에 10:2로 승리하며 이 대회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후보는 아니고 8강권 정도로 평가받았으나 매게임 선전하며[21] 성영재 감독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주말리그 전후반기와 황금사자기, 청룡기 1회전까지 2018년도 전적 20연승을 달렸으나 2회전에서 강릉고에 4-5로 패하며[22] 연승을 마감했다. 대통령배에서는 대구상원고, 마산용마고, 부산고를 차례로 격파하고 4강에 올랐으나 준결승에서 경기고에게 6:7로 역전패[23] 했다. 봉황대기 에서는 광주동성고 에게 9회 5점을 쫓아가며 동점을 만들었지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여 9:8 아쉬운 패배를 하며 봉황대기를 마쳤다. 2018년 전국체육대회에서 마산용마고를 결승전에서 격파하고 12년만에 전국체육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며 시작과 끝을 우승으로 마무리했다.[24]
2019년 첫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회전에서 화순고, 16강전에서 휘문고를 차례로 꺾었고 8강전에서는 지역 라이벌 광주동성고에 9-1로 승리하며 4강에 올랐으나 유신고에 0-1로 패하며 2년 연속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청룡기에서는 예상 외로 강릉고에 0-7 콜드게임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광주제일고가 전국대회에서 콜드게임패를 기록한 것은 2001년 봉황대기 1회전에서 휘문고에 6-18로 패한 이후 거의 18년 만의 일이다. 대통령배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으나 충암고에게 4-6으로 패배했다. 봉황대기에서는 16강전에서 인천고에게 패배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9회말 한지운의 천금같은 역전 끝내기 안타로 8강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는 작년 대회부터 광주일고의 천적으로 급부상한 강릉고와 대결했으나 3-8로 패배하면서 강릉고를 고비때마다 넘지 못하고 있다.강릉고 4강행 문턱…광주제일고 또 넘는다
2020년 첫 대회인 황금사자기 첫 판에 강릉고를 만나 0-5로 패했다. 그리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마저 첫판에서 서울고를 만나 1-8로 대패하며 탈락했다. 이후 2020년 마지막 대회인 봉황대기에서도 1회전에서 야탑고에게 7-8로 패하며 탈락했다.
2021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64강전에서 장충고에 7-1로 리드하다가 8-10으로 역전패 당했다. 같은 해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 2회전(32강전)에서 마산고에 패해 광주행 버스를 탔다. 광주진흥고 투수 문동주, 광주동성고 내야수 김도영 등 동향 라이벌 고교들은 저마다 에이스급 선수를 보유하고 있으나 광주일고에는 특색있는 선수가 보이지 않고 있다.
2021년 10월 성영재 감독이 물러나고 조윤채 감독이 부임했다. 부임 후 첫 대회인 봉황대기에서 4강에 진출했지만 덕수고에 4-6으로 패했다.
2023년 황금사자기 8강에 진출했으나 대구상원고에게 패하며 4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대통령배 2회전에서 군산상일고에 2-5로 패했다.
경남고등학교 야구부와 더불어 유니폼 디자인이 바뀌지 않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사진을 봐서도 알겠지만 선동열이 고등학생일 때나 현재나 유니폼의 모습은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광주일고' 글자의 폰트 차이 정도 뿐이다.
2010년대 들어서 야구 유망주들의 경우 동문회나 사립학교 재단의 지원이 좋아서 야구 회비가 적게 들어가는 수도권 명문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서(그러나 매년 선수 정보를 검색하면 생각보다는 적다.) 과거와 달리 선수 구성이 힘들다고 한다.[25][26] 하지만 2018년부터 광주광역시야구협회장과 인맥이 닿게 된 료유빵[27] 키타무라 슌사쿠 회장의 지원으로 수도권 지역 야구부처럼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훈련장에서 해외 전지훈련을 갈 수 있게 되었다.관련 기사[28]
2019년 당시 코칭스태프는 성영재 감독 그리고 송원국, 한희, 채선관, 조성원[29] 이렇게 4명의 코치로 구성되어 있다. 한희 코치만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나머지는 모두 광주일고 동문이다. 한희는 아직 정식 등록 코치는 아니다. 송원국 코치는 안산공고 감독직을 수락하며 팀을 떠났다.
그동안 정식 감독으로 재직한 KBO 리그 1군 감독 중 이 학교 출신이 무려 5명으로 가장 많다. 선동열, 이강철, 김기태, 염경엽, 김종국이 그 주인공.[30] 게다가 이들 중 KBO 리그 우승감독이 무려 3명이나 된다.[31][32] 다만 선동열과 김기태는 나란히 고향팀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았다가 불명예를 떠안았고 염경엽 역시 넥센 감독 시절부터 여러 논란을 안고 있다. 이강철은 부임 첫 해 소속팀 kt wiz를 창단 후 최고 성적인 6위까지 이끌었고, 두번째 시즌은 3위[33] , 3년차 시즌에는 통합 우승을 달성하며 순조로운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
2011년 11월 학교 운동장 겸 야구장에 인조잔디를 깔았으나 2018년 4월 인조잔디를 걷어내고 마사토 구장으로 다시 보수했다.
1회 대회부터 모든 대회를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1회, 2회 대회때는 조별예선 탈락, 3회 대회때는 선동열[34] 과 방수원을 투입해 서울고를 상대로 2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첫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으나 윤학길이 버티던 부산상고에게 4:3 패배를 기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후 2013년 야구대제전에서는 20강 조별예선에서 탈락했고, 2014년 야구대제전에서는 천안북일고, 상원고(6:5), 배명고(3:2), 군산상고(9:2)를 차례로 격파하고 결승까지 진출, 홈그라운드인 마산 용마고를 꺾고 첫 우승을 기록했다. 서건창, 이호준, 김대우등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가한 것이 주요했으며 김대우는 야구대제전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우승상금 1,000만원은 야구발전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2015 야구대제전에서는 인천고등학교에 6:4 패배를 당하며 16강 탈락했다.
2017년 베어스포티비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당시 두산 베어스 선수단이 광주일고 운동장에서 연습을 종료한 이후 허경민 선수가 후배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기도 했다.[57]
훈련 시작 전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을 향해 묵념을 한다. 또한 전국대회 출전을 위해 상경 前 탑에 들러 참배를 하는 전통이 있다.
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의 외국인 투수였던 아킬리노 로페즈가 한 때 네이버 인물검색에 광주일고 출신으로 잘못 기재된 바 있었다. 자세한 것은 로페즈 문서 참고.
유니폼은 아무런 장식없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광주일고라고 쓴, 약 100년전 당시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교야구 스타일 유니폼. 광주일고 외에도 경남고, 대구상원고, 인천고 등 오래된 학교들은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 스타일이다.
2023년 기준 한번이라도 프로야구 1군 경기를 출전한 적이 있는 선수를 115명 배출하며 1군 선수 최다 배출, 프로 최다 지명, 한국인 메이저리거 최다 배출 고교의 위상을 여전히 유지 중이다. #
||1. 개요[편집]
KIA 타이거즈 지역 팜이자 한국프로야구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교 야구부다. 2020년 기준으로 졸업생 총 169명이 프로야구팀 유니폼을 입었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많은 4명의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한국 최상위권의 야구 명문고 중 한 곳이다.
한국 한정이 아니라 아시아, 미국, 세계로 확장해도 메이저리거를 4명이나 배출한 고등학교는 흔하지 않다. 참고로 4명 이상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고등학교는 600개 정도로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의 3명[7] 이 진출했던 상태였을 때에도 이게 특이하게 받아들였는지 미국 신문에 특집 기사로 올라온 적이 있었으며 강정호 메이저 진출 이후에는 뉴욕 타임즈에서 광주일고로 취재를 왔을 정도다.
연고 구단은 KIA 타이거즈이지만 의외로 키움 히어로즈 소속 선수들도 꽤 있다. 이 때문에 2013년도 이후로 두 팀이 붙으면 말 그대로 동문회 수준이었던 적이 있다.[8] 애시당초 키움 뿐만 아니라 10팀 전체에 여러가지 포지션으로 선수로나 코치로나 고르게 분포해있다.
2. 연혁[편집]
2.1. 태동[편집]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광주서중학교였던 시절부터 야구부가 있었고, 이 야구부는 1949년 대형 사고를 쳤다. 당시 모든 대회를 평정하던 경남중학교의 장태영과 맞서서 극적인 승리를 따낸 것. 그 선봉장은 철완이라 불린 김양중이었고, 194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9회 2아웃까지 0:1로 뒤지다가 상대 실수로 만든 2사 2루의 찬스에서 김양중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고, 다시 연장 11회말 볼넷으로 얻은 무사 1루의 기회에서 보내기 번트가 전진 수비를 한 내야수의 키를 넘어 외야로 넘어가고, 당황한 경남중의 좌익수가 공을 잡고 3루로 던진 것이 3루 베이스를 맞고 튀면서 끝내기 점수를 내며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이 때의 결승전을 보통 고교야구 최초의 명승부로 꼽는 편이다.
그리고 이 우승 이후 호남야구는 1960년대 후반까지 긴 시간을 침묵하게 된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호남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동하는 대규모 인구 이동 현상이 있었고 호남지역 야구 저변마저도 얇았던 탓이다. 서울, 인천, 부산·경남, 대구·경북 등 4개 지역 학교들이 돌아가며 우승컵을 돌려 받던 침묵의 시간동안 호남권 학교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70년대 초중반 '역전의 명수' 신드롬을 일으켰던 군산상고가 호남야구의 부활을 도모했으나[9] 그 시절 광주일고의 이름은 없었다.
2.2. 침묵의 종결[편집]
1975년 대통령배 결승은 광주일고도 오랜 침묵을 깬 결승이었다. 군산상고로부터 시작이 된 호남야구 부활의 바람은 광주일고에게도 그대로 옮겨와 대회 사상 최초로 결승전 3연타석 홈런을 날린 김윤환의 활약과 투수 강만식의 호투 속에 당시 막강했던 경북고를 제압하고 첫 우승에 성공하면서 광주일고의 이름을 다시 알렸다. 그리고 꾸준히 1970년대 4강권 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괴물투수 선동열의 등장으로 고교야구의 최절정기에 광주일고는 다시금 우승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통령배에서 선동열을 앞세워 동향의 광주상고를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뭔가 꼬이게 되었고, 결국 1980년 봉황대기에서는 중앙고에게 일격을 당하고 2회전 탈락하더니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선동렬이 박노준에게 홈런을 맞고 물러나면서 선린상고에게 3:5 패배를 당하며 단 한 차례의 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2.3. 1차 전성기(1983년)[편집]
1983년 광주일고는 고교야구를 평정했다. 에이스 문희수와 투타만능의 박준태라는 대들보 두 명에 카리스마 넘치는 주장 김성규와 유격수 김선진이 이끄는 탄탄한 내야수비까지. 정말 전력이 막강했던 광주일고는 1983년 시즌 개막과 함께 세광고를 한 점차로 제압하고 대통령배 우승에 성공했다. 청룡기에서는 북일고에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지만, 봉황대기에서 포철공고를 두 점차로 따돌리고 우승에 성공[10] 하더니 마침내 황금사자기에서 대구고마저 누르고 우승에 성공하며 한 시즌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때의 멤버들이 졸업한 후에도 언더핸드 에이스 이강철이 등장하며 1984년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면서 그들의 전성시대가 화려했음을 다시금 보여줬다.[11]
2.4. 공백기[편집]
공백기라고 하지만 우승이 없었다는 점은 아니고, 1988년 청룡기에서 이종범을 앞세워 우승을 차지했고, 1995년 청룡기에서 김병현을 내세워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공백기로 볼 수 있는 것이 이 시기에 배출한 선수들의 화려한 면면을 볼 때, 우승 횟수가 다소 아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고교야구의 어벤저스, 전설의 92학번이 고3이었던 1991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결승에 올랐지만 각각 경남상고와 신일고에게 무릎을 꿇으며 정상을 놓친 것은 가장 아까운 순간이었다. 당시 박재홍과 김종국이 이끌던 광주일고[12] 의 전력은 충분히 강했지만 돌풍을 일으킨 김건덕의 경남상고와 팀 역사에 손꼽히는 전력을 구축한 조성민-설종진의 신일고에게는 한 끗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1997년도 마찬가지였는데 최희섭-송원국-이현곤-정성훈이라는 최강의 내야 라인업을 구축했지만, 투수력이 미치지 못해[13] 신일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 1회에 그친 것도 아쉬운 대목.
이 시기에 나온 선수들 중 이름있는 선수들만 조금만 추려봐도 이종범, 박재홍, 김종국, 이호준, 최희섭, 김병현, 서재응, 게다가 이제는 감독이 된 염경엽, 김기태 등등. 그걸 여기다 쓰기에는 위키의 여백이 너무 좁다.
2.5. 제 2의 전성기(2002~2010)[편집]
광주일고는 2002년 다시 고교무대 정상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교 무대 쌍벽을 이루던 투수[14] 김대우와 고우석, 오준형, 이대형, 이들의 1년 후배 모창민이 모두 한 팀[15] 이었던 점만으로도 그 강력함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비록 천안북일고와 고교 무대를 나누는 통에 우승은 두 번으로 만족[16] 해야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광주일고의 전성기는 충분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 전성기는 에이스 나승현과 주장이자 4번타자인 강정호를 축으로 2005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하면서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뛴 선수들이 나승현, 강정호, 서건창,
이들이 대부분 졸업한 후에는 3학년 정찬헌과 2학년 장민재를 에이스로 삼아 2007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서울고등학교의 에이스 이형종의 눈물을 이끌어 내면서 서울고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에 성공했으며,[18] 2008년에는 정성철과 장민재(당시 장민제)를 앞세운 투수진으로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2009년 심동섭과 유창식으로 봉황대기 준우승의 아쉬움(천안북일고의 김용주에 패배)은 2010년 고교최대투수 유창식 고교최대야수 허일과 함께 장충고를 꺾고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깨끗하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2.6. 침체기(2011~2016)[편집]
광주일고는 유창식의 졸업 후에도 분명 호남지역 주말리그에서는 강세를 보이지만, 전국 무대에서는 그 위세가 약간 우승권 아래 정도로 내려간 상황이다.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50724_0005708002_web.jpg](http://obj-sg.the1.wiki/d/c5/d0/a71be494730e70cf211fb1790f7a41ad323542515bd20e7f2edf2dfef226a5db.jpg)
2010년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다가 2013년과 2014년 2년 연속으로 대통령배 4강 진출에 이어 2015년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성남고와 연장 11회까지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위상을 높였다.[19] 2016년에는 주춤했으며 같은해 10월 김선섭 감독에서 성영재 감독으로 감독 교체가 있었다.
2.7. 예전의 명성을 찾다(2017~2019)[편집]
성영재 감독이 팀 전력을 재정비하고 시작한 2017년 봉황대기에서 준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신입생 안인산이 투-타 양면에서 맹활약한 야탑고에게 5-7로 무릎을 꿇었다.[20]
2018년 황금사자기에서는 북일고, 덕수고, 경남고 등 강팀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라 대구고에 10:2로 승리하며 이 대회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후보는 아니고 8강권 정도로 평가받았으나 매게임 선전하며[21] 성영재 감독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주말리그 전후반기와 황금사자기, 청룡기 1회전까지 2018년도 전적 20연승을 달렸으나 2회전에서 강릉고에 4-5로 패하며[22] 연승을 마감했다. 대통령배에서는 대구상원고, 마산용마고, 부산고를 차례로 격파하고 4강에 올랐으나 준결승에서 경기고에게 6:7로 역전패[23] 했다. 봉황대기 에서는 광주동성고 에게 9회 5점을 쫓아가며 동점을 만들었지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여 9:8 아쉬운 패배를 하며 봉황대기를 마쳤다. 2018년 전국체육대회에서 마산용마고를 결승전에서 격파하고 12년만에 전국체육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며 시작과 끝을 우승으로 마무리했다.[24]
2019년 첫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회전에서 화순고, 16강전에서 휘문고를 차례로 꺾었고 8강전에서는 지역 라이벌 광주동성고에 9-1로 승리하며 4강에 올랐으나 유신고에 0-1로 패하며 2년 연속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청룡기에서는 예상 외로 강릉고에 0-7 콜드게임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광주제일고가 전국대회에서 콜드게임패를 기록한 것은 2001년 봉황대기 1회전에서 휘문고에 6-18로 패한 이후 거의 18년 만의 일이다. 대통령배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으나 충암고에게 4-6으로 패배했다. 봉황대기에서는 16강전에서 인천고에게 패배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9회말 한지운의 천금같은 역전 끝내기 안타로 8강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는 작년 대회부터 광주일고의 천적으로 급부상한 강릉고와 대결했으나 3-8로 패배하면서 강릉고를 고비때마다 넘지 못하고 있다.강릉고 4강행 문턱…광주제일고 또 넘는다
2.8. 다시 침체기(2020~현재)[편집]
2020년 첫 대회인 황금사자기 첫 판에 강릉고를 만나 0-5로 패했다. 그리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마저 첫판에서 서울고를 만나 1-8로 대패하며 탈락했다. 이후 2020년 마지막 대회인 봉황대기에서도 1회전에서 야탑고에게 7-8로 패하며 탈락했다.
2021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64강전에서 장충고에 7-1로 리드하다가 8-10으로 역전패 당했다. 같은 해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 2회전(32강전)에서 마산고에 패해 광주행 버스를 탔다. 광주진흥고 투수 문동주, 광주동성고 내야수 김도영 등 동향 라이벌 고교들은 저마다 에이스급 선수를 보유하고 있으나 광주일고에는 특색있는 선수가 보이지 않고 있다.
2021년 10월 성영재 감독이 물러나고 조윤채 감독이 부임했다. 부임 후 첫 대회인 봉황대기에서 4강에 진출했지만 덕수고에 4-6으로 패했다.
2023년 황금사자기 8강에 진출했으나 대구상원고에게 패하며 4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대통령배 2회전에서 군산상일고에 2-5로 패했다.
2.9. 여담[편집]
경남고등학교 야구부와 더불어 유니폼 디자인이 바뀌지 않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사진을 봐서도 알겠지만 선동열이 고등학생일 때나 현재나 유니폼의 모습은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광주일고' 글자의 폰트 차이 정도 뿐이다.
2010년대 들어서 야구 유망주들의 경우 동문회나 사립학교 재단의 지원이 좋아서 야구 회비가 적게 들어가는 수도권 명문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서(그러나 매년 선수 정보를 검색하면 생각보다는 적다.) 과거와 달리 선수 구성이 힘들다고 한다.[25][26] 하지만 2018년부터 광주광역시야구협회장과 인맥이 닿게 된 료유빵[27] 키타무라 슌사쿠 회장의 지원으로 수도권 지역 야구부처럼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훈련장에서 해외 전지훈련을 갈 수 있게 되었다.관련 기사[28]
2019년 당시 코칭스태프는 성영재 감독 그리고 송원국, 한희, 채선관, 조성원[29] 이렇게 4명의 코치로 구성되어 있다. 한희 코치만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나머지는 모두 광주일고 동문이다. 한희는 아직 정식 등록 코치는 아니다. 송원국 코치는 안산공고 감독직을 수락하며 팀을 떠났다.
그동안 정식 감독으로 재직한 KBO 리그 1군 감독 중 이 학교 출신이 무려 5명으로 가장 많다. 선동열, 이강철, 김기태, 염경엽, 김종국이 그 주인공.[30] 게다가 이들 중 KBO 리그 우승감독이 무려 3명이나 된다.[31][32] 다만 선동열과 김기태는 나란히 고향팀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았다가 불명예를 떠안았고 염경엽 역시 넥센 감독 시절부터 여러 논란을 안고 있다. 이강철은 부임 첫 해 소속팀 kt wiz를 창단 후 최고 성적인 6위까지 이끌었고, 두번째 시즌은 3위[33] , 3년차 시즌에는 통합 우승을 달성하며 순조로운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
2011년 11월 학교 운동장 겸 야구장에 인조잔디를 깔았으나 2018년 4월 인조잔디를 걷어내고 마사토 구장으로 다시 보수했다.
3. 야구대제전[편집]
- 역대 전적 : 6승 4패(부전승 1승 포함)
- 최고 기록 : 우승(2014 야구대제전)
1회 대회부터 모든 대회를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1회, 2회 대회때는 조별예선 탈락, 3회 대회때는 선동열[34] 과 방수원을 투입해 서울고를 상대로 2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첫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으나 윤학길이 버티던 부산상고에게 4:3 패배를 기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후 2013년 야구대제전에서는 20강 조별예선에서 탈락했고, 2014년 야구대제전에서는 천안북일고, 상원고(6:5), 배명고(3:2), 군산상고(9:2)를 차례로 격파하고 결승까지 진출, 홈그라운드인 마산 용마고를 꺾고 첫 우승을 기록했다. 서건창, 이호준, 김대우등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가한 것이 주요했으며 김대우는 야구대제전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우승상금 1,000만원은 야구발전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2015 야구대제전에서는 인천고등학교에 6:4 패배를 당하며 16강 탈락했다.
4. 출신 선수[35][편집]
5. 대중매체에서[편집]
-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에서 두 명의 성동일이 졸업한 모교 야구부로 나왔다. 이 둘은 고교시절 선후배관계라고 하며, 성씨의 본관이 하나여서[55] 먼 친척 사이라고 한다.
-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도 김제혁과 이준호가 광주일고 야구부 출신으로 나온다.
- 서울촌놈에서 게스트로 나온 김병현의 모교 야구부로 소개되었다.[56]
- 영화 스카우트에서 선동열이 나왔다.
6. 이야깃거리[편집]
2017년 베어스포티비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당시 두산 베어스 선수단이 광주일고 운동장에서 연습을 종료한 이후 허경민 선수가 후배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기도 했다.[57]
훈련 시작 전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을 향해 묵념을 한다. 또한 전국대회 출전을 위해 상경 前 탑에 들러 참배를 하는 전통이 있다.
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의 외국인 투수였던 아킬리노 로페즈가 한 때 네이버 인물검색에 광주일고 출신으로 잘못 기재된 바 있었다. 자세한 것은 로페즈 문서 참고.
유니폼은 아무런 장식없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광주일고라고 쓴, 약 100년전 당시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교야구 스타일 유니폼. 광주일고 외에도 경남고, 대구상원고, 인천고 등 오래된 학교들은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 스타일이다.
2023년 기준 한번이라도 프로야구 1군 경기를 출전한 적이 있는 선수를 115명 배출하며 1군 선수 최다 배출, 프로 최다 지명, 한국인 메이저리거 최다 배출 고교의 위상을 여전히 유지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