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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고등학교 야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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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경동고등학교의 고교 야구부.
2. 연혁[편집]
1945년 해방과 함께 야구부가 태동했다. 과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유복룡[3] 이 학교측에 건의해 경동중학 야구부를 만들고 초대 감독에 오른 것이 그 시초. 당시 경동중학 2학년이었던 이용일도 선수로 2년간 활약했다.
이후 195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당대 야구 레벨을 뛰어넘은 강타자 백인천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59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예고했다. 비록 청룡기에서는 당시 강세였던 동산고에 패하면서 분루를 삼켰지만, 1960년 3학년이 된 포수 백인천과 원자탄 투수로 불린 이재환, 여기에 당대를 풍미한 내야수 오춘삼 등이 이끄는 경동고 야구부는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그 해 경동고 야구부는 서울에서 열린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부산에서 열린 쌍룡기(화랑대기)에 출전했는데, 그 대회에서 모조리 우승에 성공한 것이었다. 1960년 한해 승률은 무려 32승 2무. 패배가 없던 팀이었다. 고교 무대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는 그들은 실업야구에 출전하겠다고 신청서를 냈고, 이른바 全경동팀 출전 구상은 실업야구의 저지로 무산되었지만, 그들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저지된 이유도 실제로 경기를 하면 자신들이 질 수도 있겠다는 실업야구 팀들의 판단 때문이었다고 하니.
그리고 그 1960년이 경동고에게는 2022년까지 최후의 영광이었다. 그 뒤로 서울 지역 내 다른 학교들과의 스카우트 전에서 밀리는 등 전력 보강에 실패하며 팀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해체와 재창단을 반복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이 그나마 반짝했던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특급의 선수는 없지만, 준척의 선수들이 뭉쳐 준우승 1회와 4강 3회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1996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휘문고에 패해 준우승,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4강,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광주일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7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천안북일고에 패해 준우승,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4강에 올랐다. 당시 전용종, 정찬민이 활약했으며 전용종은 롯데, 정찬민은 삼성의 지명을 받았다.[4]
1999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4강에 진출했다.
21세기 들어서는 한 차례도 전국대회 4강에 오르지 못하며 기나긴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2023년 마지막 전국대회인 봉황대기에서 초반에 대진운이 따르면서 밀양BC, 거제BC, 천안CS에 대승을 거둔 데 이어 16강전에서 청주고에 12:4로 승리하며 15년만에 전국대회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포항제철고에 4:2로 승리하며 24년 만에 전국대회 4강 무대를 밟았다. 봉황대기에서 4강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마지막 전국대회 4강 무대는 1999년 제53회 황금사자기였다.[5] 인터뷰에서 김철 감독은 '중학교에서조차 버림받았던 우리 아이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똘똘 뭉쳐 여기까지 올라와 감개무량하다'라고 했고 내야수 최성민은 '코치님들이 평소에 좋은 펑고를 잘 쳐줘서 (수비 시) 타구예측 능력이 향상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곧바로 이어진 대구고와의 준결승에서는 초반에 대량 실점을 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다가 차근차근 따라갔으나 끝내 5-13으로 패했다.
3. 여담[편집]
최훈 작가가 네이버에서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단 71회 연재에 그치며 극악의 연재 속도로 전설로 남아있는 GM(웹툰)에서 작중 프로 최고의 타자로 나오는 장건호의 출신고교의 모티브가 된 팀으로 추정된다.[6]
2016년도에 야구부 코치에게 돈을 주면 선발로 뛴다는 의혹이 제기 되었는데 의혹만 제기될 뿐 별탈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야구부 학생들 말에 따르면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외부에 알려지면 까다로워서 다들 쉬쉬한다는 말이 있었다.
기본 유니폼은 중앙고등학교 야구부(흑색모 + 흑색 언더셔츠 + 백색 상/하의 + 적색 폰트)와 동일했으나 최근에는 남색모에 적색 언더셔츠를 착용하고 있다.
4. 출신 선수[7][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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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나무위키에 기재된 인물만. 졸업 연도 순.[3] 선린상업-경성고상출신으로 발이빨라 야구대표팀에서 중견수겸 1,2번타자를 도맡았다.[4] 전용종은 한양대로 진학했으나 대학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으며 롯데 입단 1년 만에 방출되었다. 정찬민은 원래 공주고를 다녔으나 2학년을 마치고 경동고로 전학했으며(서종호 당시 경동고 감독이 공주고 감독을 지냈던 영향으로 전학했다. 서종호 감독은 박찬호의 고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성균관대 진학 후에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해 삼성이 지명권을 포기했다.[5] 준결승전에서 경동고는 채태인의 부산상고에 5-8로 패했으며 이승호와 김상현이 활약한 군산상고는 천안북일고를 3-2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는 군산상고가 11-3으로 승리했다.[6] 유니폼 디자인과 한자표기가 매우 흡사하다. 정작 작중에서 당시 초고교급 투수 하민우(GM)의 말에 따르면 별 볼일 없는 고등학교로 언급되지만... (사실 별볼일 없는 고등학교가 맞긴 맞다. 2000년도 이후 결승전을 가본적이 없다.)[7] 나무위키에 기재된 인물만. 졸업 연도 순.[8] 1965시즌 후반에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9] 지명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했지만 지명권을 삼성 라이온즈에게 넘겼다.[10] 김정후로 개명했다.[11] 고교생 때는 포수였으나 SK 입단 후에는 외야수로 전향하였고, 2018년 이후로는 투수로 전향하였다.[12] 여주대학교 야구부의 첫 프로 진출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