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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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초기의 문관이자 권신. 고려 왕실 쿠데타 수난사[6] 의 시초 격인 강조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목종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으나, 되려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직접 출정했고, 초반에는 선전하다가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패배했다. 요성종의 회유를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해 전장 한복판에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편집]
2.1. 출신[편집]
'반역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의 가문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을 비롯해서 어느 곳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출신지도 알 수 없으나 일단 신천 강씨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실제 신천 강씨는 자신들의 조상으로 강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황해도 신천이 출신지일 가능성이 높고 이른바 고구려계 패서 호족 계열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강태주(康泰周)의 아들이고 이부상서를 역임했다고 한다. 신천 강씨 족보에는 시조 강충(康忠)부터 그 14세손인 중시조 강지연(康之淵)까지 독자[7] 로만 이어지는데 강충의 7세손(강지연의 6세조)으로 형부상서를 지낸 강태주라는 인물이 있고 이부상서를 역임한 강억(康億)이라는 인물이 강태주의 아들(강지연의 5세조)로 기록되어 있다.
강조는 정변 이후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조(兆)는 억(億)의 만 배이다. 따라서 강조의 후손들이 강조가 반역자로 분류돼서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고는 싶은데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라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남들이 모르게 이름만 비슷하게 바꾼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2.2. 강조의 정변[편집]
자세한 내용은 강조의 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북방 군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품자 목종은 강조를 내려오게 해 자신을 호위하게 한다. 하지만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합천에서 갓 도착한 17세의 대량원군을 즉위시킨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讓國公)[8] 으로 끌어내린 뒤 고향 충주로 가고자하던 그를 부하인 김광보와 안패를 보내 현 경기도 파주시인 적성에서 시해한다. 이후 천추태후를 황주로 유배시키고 친족을 섬으로 유배, 김치양과 그의 6살 아들, 목종에게 빌붙어 전횡을 일삼던 유행간 등을 처형하여 천추태후-김치양 세력과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강조는 이어서 2월에 중대사(中臺使),[9] 3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10] 및 참지정사(參知政事)[11] 로 승진해 요직을 차지한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강조가 목종이 시해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개경 근교까지 휘하 군을 이끌고 진군하였는데 목종이 멀쩡히 살아있다고 하자 이미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와버렸는데 반역으로 몰릴까 두려워 폐위시켰다는 설과 강조가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추문이 많은 목종에게 불만을 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폐위했다는 설이 있다.
2.3. 여요전쟁[편집]
물론 요성종이 진짜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다. 주요 이유는 당시 거란이 맞수였던 송나라와 일종의 휴전 협정인 전연의 맹을 맺고 한숨 돌린 틈을 타 자신들의 후방을 든든히 하려는 목적이 컸다. 중원을 차지하려면 일단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던 후방의 가시같은 고려를 먼저 잠재워야 했고 마침 고려가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곧바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13] 직위를 받아 군권을 위임받고 직접 출진한다. 사료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본문에 언급했듯이 강조가 이미 실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도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권의 위임 과정도 조정의 결재는 요식 행위이고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란의 침공에 대해 고려는 3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14][15]
강조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사령관으로써 직접 출전했다.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의 행적을 보면 고려의 장수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전했다는 해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강조가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해도 출전이 불가피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이 때 강조는 전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음에도 권력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당장 중신 중 한 명이자 목종으로부터 현종의 호송 임무를 명 받았던 최항이 정변을 일으켜 군왕을 끌어내린 강조를 보고 "고금에 이러한 일이 있었느냐!"며 대놓고 일갈할 정도였다. 당시 명백한 권력자였음에도 면전에서 대놓고 비판을 들을 정도로 초기부터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거란이 자신의 집권을 명분으로 침공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반대 세력에게는 '강조 저놈 때문에 거란이 쳐들어 왔는데도 자신은 겁나서 출전도 하지 않고 있다'라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게다가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병력 지휘를 맡겨서 출전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인사가 전혀 없었다. 신뢰 이전에 그런 능력과 위치를 가진 인사부터가 없었다.[16] 결국 본인이 출전해야 했던 것이다.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진에서 양규가 지휘하던 고려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하천을 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 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據, 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棋.
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갔다. 군사를 셋으로 나눠 물과 거리를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쳤는데 세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조는 이 곳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진영을 만들었다.
조는 검차로 진을 세워 거란병이 들어오면 검차로 합공하니 (거란병이) 꺾거나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자 점차 적을 가볍게 여겨 사람과 탄기나 했다.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자 강조는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방심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대군이 한번에 들어가지 못하니 전략을 바꿔 소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나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봉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파견해 삼수 쪽 진영을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으로 나온다. 허나 강조는 처음 삼수 쪽 진영, 즉 자신이 있는 진영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믿지 않았다. 아니면 소수만 잠시 들어온 것으로 여겼다.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들어오게 해라."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17] 인데 거란군의 최고 정예인 이들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였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김계부(金繼夫)·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적이 이미 안까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보고를 또 받자 그제서야 일어나 사태를 깨닫는다. 다른 두 진영이 협공하기 전에 자기 진영이 무너지자 졌음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는 이때 강조가 목종의 귀신을 본듯 계속 죽을 죄라며 허공에다 사과했다고 한다.
한편 강조의 방심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일부 평가에서는 전술적 부분보다는 병사들의 숙련도가 강조의 지시에 대해 그만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혹은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한군데 뭉쳐 기동력이 제한되어버리면 그냥 앞줄의 병사 때문에 안쪽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해버려 뭉치가 되어버리기 십상인데 이런 점을 이용해 강조는 거란군은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군이라 이를 제한시켜버리면 승리할 수 있을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란이 그것을 무시할 정도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줬다는 것. 실제 거란이 기동력을 살려 소수 정예군만으로 휘젓는다면 정예 기피실군이 많은 손상을 입기는 하겠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회복하니 전 같은 몰아죽이기 전략은 안 통했을 것이다. 결국 거란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썼고 강조는 이 점을 놓친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지휘하던 30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파되면서 순수 전사자만 무려 3만명이나 발생했으며 그 외 이현운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고,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이상 전투의 자세한 흐름은 통주 전투 문서를 참조.
2.4. 장렬한 최후[편집]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후 포로로 잡힌 강조는 결국 거란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거란에게 죽임을 당한다."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고려사》에서는 이때 강조가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한다.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 볼 때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들이야 고려가 거짓말처럼 승리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강조 입장에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라는 나라의 사활을 자기 손으로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만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과 죄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오랫동안 자신의 부하로 활약한 이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성종은 강조한테 전향을 요구했으나 강조는 너라고 모욕하며 강력하게 거부하였고 화가 난 성종이 능지형을 집행했음에도 굴복하지 않자 할수없이 처형하라고 명령하며 참수된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하니: "난 고려 사람이다, 왜 너(汝)의 신하가 되겠는가?"[18]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하길: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高麗史』 卷127 「列傳」40 ‘叛逆’1
3. 평가[편집]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심은 없었다.
이후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선위받기에는 시기상조이거나 명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단 '나는 절대로 새 군주가 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새로운 분을 군주로 모시려 할 뿐이다.'라고 허울 뿐인 충성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이후 강조의 행적을 보았을 때 권력욕 자체는 있었어도 역심은 없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무리해서 임금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얼굴마담 하나 세워놓고 본인이 권신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강조가 실권을 잡고 뭘 해보기도 전에 거란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된 탓에 지금에 와서는 모든게 가설의 영역이 되어 버렸긴 하다.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조가 건덕전(乾德殿)[19]
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20]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외치 부분에서는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닌 최고 권세가가 직접 최전선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점만큼은 분명 호평받을 만하다. 물론 상기되어 있듯 일단 명분론적으로는 거란의 침공 자체가 자신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강조가 출전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이상하기는 하다.[21] 또한 자신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강조 자신이 직접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포로로 잡힌 뒤 요 성종의 회유를 받아들여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고 특히 살을 찢는 극형을 받으면서까지도 스스로를 "나는 고려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것을 보면 강조는 고려 왕가에 대한 충신은 아니었을지언정 고려인이란 정체성은 확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2]
내치 부분에서 강조는 집권 이후 자기가 선전한 대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제거했다. 문제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목종마저 폐위 후 시해해버리고 현종을 옹립해 권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가 거란의 침입으로 본인과 휘하 세력이 전부 자취를 감추면서 순식간에 정적들이 사라져버린 현종은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건 어찌 보면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기도 한 것이 당장 강조의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현종은 왕권 강화고 나발이고 나라 멸망 직전의 사태를 맞이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야 했고 피난 와중에도 사실상 반란군이나 다름없던 지방 호족들에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현종이 고려사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과 맞먹을 만큼 한국사에 남을만한 성군이라 이후 전란을 수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건 불행 중 다행. 덕분에 강조도 의도한 건 아닐 텐데 얼굴마담 현종이 알고 보니 능력자라
다만 아무리 그래도 임금을 시해하고 권신이 된 점이 못마땅했는지 고려사에는 반역열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23]
한편으로 현종과 강조의 관계에 있어 짐작해볼 기사가 있는데 현종 2년 8월에 강조의 일당들을 유배 보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때 강조의 일당으로 지목된 5명 중 3명이 정변 당시 강조의 부하였거나 강조의 편에 섰던 이들로 탁사정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붙었고[24] 최창, 위종정은 강조의 부하로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이다. 물론 대부분은 잘 나갔지만 저 5명을 '강조 일당'이라고 엮어 부른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강조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4. 기타[편집]
- 고려사 최초의 쿠데타 성공자이던 강조의 죽음은 이후 후대 쿠데타 세력에게 교훈을 줬는지 후대의 최씨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본인들이 직접 싸우지 않고 도망쳐 수비만 하면서 몸보신에만 신경썼다. 당연히 그 와중에 국토는 짓밟히고 죽어나간 건 백성들이었다.
-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도 묘하게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일대 회전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고 패배로 왕이 피난까지 갈 정도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 비슷하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고 신립은 선조의 사돈이라 당시 왕과 밀접한 관계인 인물이라는 점도 겹친다.[25] 신립과 비교했을 때 강조는 기록상으로는 통주 전투를 뺀 특별한 전적이 보이지 않지만[26] 신립은 임진왜란 이전 니탕개의 난에서 활약한 조선 수위급 용장이었다. 그렇지만 본인들의 마지막 전투인 통주 전투와 충주 탄금대 전투를 비교하면 강조는 초반에는 선전했는데 신립은 일본과 명나라 모두 비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졸전했다.[27] 그래도 최후는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참히 생을 마감했으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 600년 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북방의 방비를 담당한 장수였으며 반란을 일으켜 왕을 세웠다는 점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 다른 공신들에 밀려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고 이괄의 난 때는 초기 승승장구에 자만했는지 전략을 잘못 짜서 실패하고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이에 비해 강조는 자신이 거사를 안하면 왕위가 김치양의 아들에게 넘어가 왕씨의 사직이 끊길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정변의 명분이 충분했으며 애초에 목종의 명으로 개경 진격을 준비한 것이었다.
- 본래 임금의 충신이었고 최전방 방위 총책임을 맡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으나 임금이 죽었다는 헛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제국 시대 인물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비슷한 모습이다.
5. 대중매체[편집]
- 웅진출판사에서 펴낸 역사 만화인 <한국의 역사>에서는 거란 왕의 항복 제의를 거부하고, 항복해서 부하가 되겠다는 이현운의 얼굴을 "이런, 쓸개빠진 놈!"이라고 욕하면서 걷어차 버린 뒤 "내가 임금을 죽인게 네놈들에게 나라를 바치려고 그런 줄 알았느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했다. 어느 강감찬 위인전에서는 요 성종에게 고개를 쳐들고 "난 비록 왕을 배신했어도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네놈에게 머리숙여 굴하지 않을테니 정 굴하게 할려면 내 목을 벤 다음에 목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거라."라고 일갈하는 대사를 넣기도 했다. 1990년대 어느 출판사 버전에서는 요 성종을 비웃으며 고문을 받음에도 크게 일갈하고 웃으며 숨을 거뒀다는 창작을 넣기도 했는데 마냥 조작이라고 보기에는 실제 역사와도 큰 맥락이 일치하기는 한다.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최재성[28] 이 연기했다. 전형적인 우직한 맹장으로 등장하는데 작중 등장 인물들 중에서 무력이 혼자 궤를 달리한다.[29] 어느 정도냐면 혼자서 어지간한 무장 2~3명은 상큼한 표정으로 거뜬히 제압하며[30] 거란 최고 맹장이라는 야율분노까지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무력으로 치면 양규와 함께 투톱이다.[31] 뜬금없이 천추태후(채시라 분)를 짝사랑하는 설정도 붙었는데 은근히 순정남으로 천추태후와 가까워지는 김치양(김석훈 분)을 싫어했다. 나중에 그를 짝사랑하던 천향비(홍인영 분)와 결혼하는데 천향비가 김치양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살해당하자 안 그래도 미워했던 김치양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북방으로 떠난 후에 김치양의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황궁으로 돌아와 김치양 일당을 쳐부수는데 강조의 정변 부분은 역사 왜곡이 많이 곁들여져 있다.[32] 역사 기록에서는 거란 성종에게 잡혀갈 때 모포말이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에 성종을 암살하려다가 진삼국무쌍을 한 판 찍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33] 특이한 점이라면 사극에 등장하는 주연인데 검이 아니라 창을 썼다는 것.[34] 그런데 천추태후의 고증 상태를 보면 고증 때문은 아닐 듯. 마지막 강조의 회상 장면에 천향비와의 결혼 생활이 없어서 '강조는 결국 천향비는 안중에도 없었던거냐'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35]
- 2019년 방영한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1부에서 배우 문종영이 연기했다. 출정 전 현종을 썩소지으며 쳐다보는 등 권신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죽음도 통주 전투에서 첫 승리에 방심했다가 결국 패해 죽었다는 것만 수급이 걸린 모습과 함께 보여주고 나름 장렬했던 최후는 생략당했다. 1부는 양규가 사실상 주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