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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최질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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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강조의 정변
金訓·崔質─亂
1. 개요[편집]
고려 8대 국왕인 현종 재위기에 김훈, 최질 등의 무신들이 일으킨 반란. 1014년 음력 11월부터 1015년 음력 3월까지 약 4개월 간 지속되었다.
2. 전개[편집]
고려의 명군이었던 현종은 본인의 성품이 자애로웠던 것과는 달리 치세 때 또 하나의 중차대한 반란을 겪게 된다. 바로 거란의 제3차 침공을 대비하던중에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반란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벌어졌다.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서 그만 문제가 생기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우선 반란의 핵심 주모자인 김훈과 최질은 2차 여요전쟁(1010년) 때 공을 세워 상장군에 오른 고위 무관들로, 김훈은 강조의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진격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같은 좌우기군 장군인 김계부, 이원, 신녕한과 더불어 기습공격을 하여 거란군을 잠시 퇴각시킨 바 있는 인물이었고, 최질은 통주에서 중랑장으로 있던 중 포로가 되었다가 통주에 항복을 권유하러 온 행영도통판관 노전[1] 과 그와 함께 온 합문사 마수를 홍숙과 함께 억류한 뒤 항전을 주장하여 같이 있던 방어사 이원구, 부사 최탁, 대장군 채온겸, 판관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건히 지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질은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2] , 이 와중에 중추원의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3] 가 경군의 영업전을 뺏어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던 것에 반발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즉,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당시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큰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손가락을 빨게 만들어버렸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침임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1년차(1010년)의 일로 그러니까 반란 4년 전의 일이었다.
갑자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거란(契丹)에 보내 여름철 안부를 묻고, 또 왕이 병이 나서 친조(親朝)하지 못함을 알렸다. 거란주(契丹主)가 분노하여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등 6개 성을 빼앗으라고 하였다.
-- 왕의 거란 입조를 거절하자 거란주가 노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3년(1012년) 6월 28일(음) 갑자(甲子))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거란(契丹)에 보내어 여름철 문후를 올리고 또한 왕이 병에 걸려 친히 조회하러 올 수가 없었다고 아뢰게 하였다. 거란의 군주가 분노하여 흥화성(興化城)·통주성(通州城)·용주성(龍州城)·철주성(鐵州城)·곽주성(郭州城)·구주성(龜州城) 등 6개의 성을 차지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 왕이 친조하지 않으므로 거란 임금이 고려를 침공하겠다는 조서를 내리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3년(1012년) 6월 미상(음))
참고로 이로부터 불과 2년 뒤에 요나라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미 거란의 2차 침공이 끝난 직후부터 거란과의 산발적인 충돌과 전투들을 계속 벌이던 중이었다.[4] 또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현종 본인의 실책도 크게 발생하는데 황보유의와 장연우가 무신들의 영업전을 뺏어서 문관들의 녹봉을 충당하는 최악의 삽질을 거하게 하고 있을때 안타깝게도 현종 또한 이들의 삽질을 제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어서(...) 반란이 일어날때까지 무려 4년 동안이나 사태를 방치하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11월 계미 초하루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군(衛軍)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유배보냈다.
-- 김훈과 최질이 반란을 일으키다 (고려사 현종(顯宗) 5년(1014년) 11월 1일(음) 계미(癸未))
○11월 계미 초하루.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유배 보냈다. 경술(1010년)의 병란이 일어난 이후 군사들의 정원을 늘리자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졌는데, 황보유의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거두어 녹봉에 충당하게 하니 무관들이 자못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최질은 더욱이 변경에서의 공적으로 누차 무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문관직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상 불만스러운 상태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훈과 최질, 그리고 박성(朴成)·이협(李恊)·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은 땅을 빼앗은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격화시켰으며, 여러 위의 군사들을 꾀어내어 북을 치면서 소란스럽게 궁궐[禁中]로 난입하고서는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포박하고 매질하여 거의 다 죽게 만들었고,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 면전에서 호소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토지를 점탈한 한 것은 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지 조정[公家]의 이익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발을 깎아서 신발에 끼워 맞춘다면 사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 군사들이 흉흉하여 분노와 원망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니, 청하건대 나라의 좀벌레들을 제거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여러 사람들의 뜻을 거스르기가 조심스러웠으므로 일단 그들의 청을 따라 마침내 〈두 사람을〉 제명(除名)하고 유배 보냈다.
-- 김훈과 최질 등이 궁궐에 난입하여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유배보내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顯宗) 5년(1014년) 11월 1일(음) 계미(癸未))
현종이 즉위하자 〈황보유의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임명되었고,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승진하였으며,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고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중추원(中樞院)의 일직원(日直員)이 되었다. 경술년(1010년)에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니, 이로 말미암아 관리들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었다. 황보유의가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함께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취해서 녹봉으로 충당하게 하니 무관들이 자못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최질(崔質)은 변방을 지킨 전공으로 여러 차례 무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문관이 될 수는 없었기에 평소 원망하다가 마침내 상장군 김훈(金訓)·박성(朴成)·이협(李協)·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과 함께 영업전을 빼앗겼다고 무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궁궐에 난입하였다. 〈그들은〉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려 거의 죽게 하였으며, 궐 안에 이르러 왕을 대면하고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들의 영업전을 점탈하였으니, 사실상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일이지 특별히 조정[公家]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가락을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분노와 원한을 이기지 못하니, 요청하옵건대 나라를 좀먹는 자를 제거하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많은 사람들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황보유의·장연우를 제명하고 귀양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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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조치는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사실상 전시중임에도 월급이 전혀 안나와서(...) 뿔이 크게 난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자신들의 월급을 모두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일종의 무신정권을 세웠다.[5]
을유 김훈(金訓) 등이 요청하기를, “상참(常叅) 이상의 무관(武官)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 김훈 등이 무관의 문관 겸직을 요구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5년(1014년) 11월 3일(음) 을유(乙酉))
○을유. 김훈(金訓) 등이 상참(常參) 이상의 무관(武官)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어사대(御史臺)를 혁파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할 것과 삼사(三司)를 혁파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따랐다.
-- 상참 이상의 무관은 문관을 겸하게 하고, 금오대와 도정서를 설치하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顯宗) 5년(1014년) 11월 3일(음) 을유(乙酉))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현종에게 요구했으며 현종은 살기등등한 이들의 협박에 무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다. 이 덕분에 김훈과 최질은 무관이 문관을 겸하게 만드는 한편 어사대(御史臺)와 삼사(三司)를 각각 금오대(金吾臺)와 도정서(都正署)로 바꿔버리면서 권력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3. 정변의 진압[편집]
갑오 왕이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 19인을 처형하였다.
-- 김훈 등을 처형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6년(1015년) 3월 14일(음) 갑오(甲午))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김훈(金訓)·최질(崔質)·이협(李恊)·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이섬(李暹)·김정열(金貞悅)·효암(孝嵓)·임맹(林猛)·최구(崔龜) 등 19인을 주살하였다. 이 당시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문관직을 겸하여 정사가 많은 문외한들에게서 나오게 되니[政出多門],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전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이자림(李子琳)은 은밀히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말하기를, “왕께서는 어찌 한(漢) 고조(高祖)가 운몽(雲夢)에서 노닐었던 일을 본받지 않으시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맹이 그 뜻을 깨닫고 은밀히 아뢰자, 왕이 이를 받아들이고는 이자림이 일찍이 서경(西京)의 장서기(掌書記)가 되어 자못 인심을 얻었다고 하여 곧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을 임시로 제수한 뒤 곧바로 명령을 내려 먼저 가서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자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서 병사들로 기습하여 그들을 죽였다. 최구는 유생[儒士]으로서 병부낭중(兵部郞中)이 되어 호종을 맡았는데, 성품이 거칠고 비루하여 최질 등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 연회를 틈타 김훈 등 무신 19인을 주살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6년(1015년) 3월 미상(음))
그러나 몇 달 안가 현종이 전 화주방어사였던 이자림[6] 이 올린 계책에 따라 1015년 음력 3월, 무신들을 모두 서경의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면서 고려사 최초의 무신정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나게 된다.[7] 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비중이 적은 사건이다.
왕가도(王可道)의 초명(初名)은 자림(子琳)이고, 청주(淸州) 사람으로 본래 성(姓)은 이씨(李氏)이다. 성종(成宗)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로 임명되었다. 현종(顯宗) 5년(1014)에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난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사납고 흉악한 무리들이 문관직을 겸직하였다.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자들이[羊頭狗尾] 대각(臺閣)에 포열(布列)하고 있어 정치가 중구난방으로 되니,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였다. 왕가도는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와 자택에 있었다. 격분한 마음을 품고, 비밀리에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어찌 한(漢) 고조(高租)의 운몽지유(雲夢之遊) 〈고사〉를 본받지 않으시는가?”라고 하였다. 김맹이 그 뜻을 깨닫고 왕에게 은밀히 아뢰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왕가도가 일찍이 서기(書記)로 있을 때 크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그를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으로 임명하고 재촉하여 먼저 가서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게 하였다. 이듬해 현종은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여러 신하들을 위해 장락궁(長樂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서 군사를 동원해 급습하였고, 마침내 김훈·최질 및 이협(李協)·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이섬(李暹)·김정열(金貞悅)·효암(孝嵒)·임맹(林猛)·최구(崔龜) 등 19명을 제거하였다. 최구는 유사(儒士)로서 병부낭중(兵部郞中) 직임에 있으면서 왕을 호종하였으나, 성품이 거칠고 천박하여 최질 같은 자와 교류하였으므로 〈화를〉 당하였다. 곧이어 김훈 등의 아들 및 친형제들을 본향에 돌려보낸 후에 통상적인 사면에서 제외시켰으며, 그 부모·처·누이·조부·손자·삼촌으로서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방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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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 큰 실책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종은 나름 뒷수습은 잘 했다. 주살한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이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는 군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무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하는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더라도, 그들이 무력으로 왕(현종)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기에 그들을 처벌하여 앞으로의 폐단을 막는 일도 왕조 시절 임금으로서 겸했던 것이다. 이는 직전에 바로 전대 국왕이었던 목종이 결국 시해당한 강조의 정변까지 현종이 직접 겪어봤던 것을 생각해보면 필요한 선에서 반란의 주모자들과 그 주변 관련자들에게 정말로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현종은 무관에 대한 예우도 개선하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과의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0,000여명 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 것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당시 고려의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하면 리스크도 꽤 클 수 밖에 없는 대대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종은 요나라와 큰 전쟁을 벌여야 했고, 전쟁중인 상황에서 군인들의 월급을 죄다 횡령하고 나쁜 대우를 해주면 당장 칼과 창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해당 조치의 리스크가 큰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런 조치를 안취했을 경우엔 오히려 2차 무신반란의 가능성마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니 현종이 이런 조치를 취했고, 기존 문신들도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훗날 이런 교훈을 완전히 잊어서 터졌던 것이 진짜 무신정변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현종의 재위 기간중 일어난 최악의 흑역사이자 최대의 과오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문제있는 정책을 택하였고 문신들이 무신들의 월급이라 할 수 있는 영업전을 죄다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미친짓을 4년 동안이나 방치한 현종 본인의 실책은 분명 비판 받을 수 있겠지만 해당 정책을 고안하고 집행했던 문신들의 역량 부족 또한 비판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마 무신들이 문신들의 정책에 불만이 있던거지 현종까지 폐위하지는 않은 덕분에 정변의 도중에도 문신들을 죄다 죽이지는 않고 귀양만보내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고 무신들이 현종을 강제로 폐위하고 강조의 정변 당시 목종의 사례 처럼 왕을 죽인 다음 새로운 허수아비 국왕을 옹립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정변의 진압 이후 문신들은 현종에게 더욱 더 충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