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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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정치인이자 독재자.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을 지내면서 30년 동안 소비에트 연방 최고지도자에 자리했으며,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재임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러시아 제국을 전복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하는 데 일조한 볼셰비키 출신이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잡아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1930년대 이후 자신의 일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숙청 등으로 자국민을 학살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시절 낙후된 농업 사회 기반의 소련을 5개년 계획으로 중공업과 화학공업 위주의 공업 국가로 전환시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의 독소전쟁을 소련의 승리로 이끌어 초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동시에 종전 후엔 미국과의 냉전을 시작했다.
현재도 극단적인 명암이 존재하는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강철의 대원수 혹은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가 정립한 레닌주의 계열 사상인 스탈린주의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당대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가족사[편집]
5.1. 아내들[편집]
- 첫번째 아내 에카테리나 스비모니스 아술리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სვიმონის ასული სვანიძე)[3]
일명 카토 스바니제(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스탈린이 조지아인으로 생활하던 시기에 혼인한 인물이며 혁명동료의 남매이다. 원래 몸이 허약했고 잦은 도피생활로 인한 영양실조로 결혼 2년 만에 티푸스에 걸려 병사했다. 이때 스탈린이 죽은 아내와 같이 묻히겠다며 소동을 벌였는데 친구들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만류에 그만뒀다. 혹은 본인도 묻으라며 소란을 피우던 와중에 지켜보고 있던 오흐라나 요원들이 스탈린을 체포하러 들이닥쳐서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는 말도 있다. 후일 이때를 회상하며 "나는 첫 아내를 묻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묻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여담으로 첫번째 아내를 통해 장남인 야코프 주가슈빌리를 낳았는데, 스탈린은 첫째 아들을 볼 때마다 죽은 아내가 생각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고 이로인해 아들의 성격이 과묵하고 부모에게 아무것도 안 바라는 차가운 성격이 되었다.[4]
- 두번째 아내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레닌의 비서로 레닌의 유언장을 대필했다. 스탈린의 숙청에 의한 충격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고(대숙청은 1935년부터 시작됐다), 심지어 직접 스탈린이 자신을 비난하는 아내를 총살했다는 루머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이 여자에 대해서 농담하는 것에 분노한(몰로토프의 주장) 나데즈다가 남편과 싸웠고, 스탈린이 물건을 그녀에게 집어던지며 모욕하자 우발적으로 자살했다. 이 사건 때문에 스베틀라나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때도 스바니제가 사망했을 때처럼 서기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를 통해 낳은 둘째인 바실리 스탈린은 위의 성실한 첫째와는 다르게 자식교육을 망쳤다. 스탈린이 오냐오냐 하며 뒤를 봐주다보니 전형적인 폐급 장교가 되어, 전쟁 중에도 후방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뒤를 봐주던 스탈린이 죽자 후계자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스탈린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소련 관영매체는 나데즈다의 사망을 알리면서 처음으로 스탈린에게 아내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사망 원인은 공표되지 않았으나 NKVD는 나데즈다가 맹장염으로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렸다.
5.2.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편집]
자세한 내용은 야코프 주가슈빌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차남 바실리 스탈린[편집]
자세한 내용은 바실리 스탈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4. 장녀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편집]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5] 는 스탈린의 후처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스탈린 생전에는 바실리 스탈린과 같이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라고 불렸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어머니의 성씨인 알릴루예바(Аллилуева)로 바꿨다.
어린 시절에는 고명딸이라는 이유로 스탈린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고, 성장한 후에는 소련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했다. 언어에 재능을 보여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매우 유창했고[6] , 이를 통해 번역가 겸 교수로 일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좋았지만 첫사랑이었던 알렉세이 카플레르와 관련된 사건으로 틀어졌다. 알렉세이 카플레르는 작가로 스베틀라나보다 나이가 두 배 많고, 유대인인 데다[7] 서방 문물을 밀수해서 즐겨 보는 불온분자였다. 스탈린은 경호대장 블라시크를 통해 딸에게서 꺼지라 경고했지만 카플레르는 강경하게 거절했다.
이후 카플레르는 스탈린에 의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종군기자로 파견됐지만 살아돌아와서 다시 스베틀라나와 연애를 했다. 결국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굴라그로 보내버리고, 스베틀라나를 불러 카플레르가 영국 스파이라고 말하며 그동안의 도청기록을 보여주었다. 스베틀라나는 자신은 카플레르를 사랑한다며 울었고, 스탈린은 스베틀라나의 뺨을 후려갈기고 '지금은 전시인데 넌 너무 약해빠졌다'고 비난했다. 스베틀라나는 자서전에서 이때부터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후 스베틀라나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와 연애를 해서 스탈린의 눈밖에 났고 스탈린의 불만을 알아챈 베리야가 세르고에게 "스베틀라나는 너에게 감정이 없으니 접어라."라고 말해 관계가 끝났다. 그 뒤로도 스탈린이 탐탁찮아하던 야코프의 친구 그리고리 모로조프와 만나 결혼했다. 스탈린은 결혼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사위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얼마 안 가 스베틀라나는 모로조프와 이혼했고, 스탈린이 사후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인 스탈리나를 어머니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성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이후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 즈다노프와 두 번째로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고 얼마 안 가 이혼했다.
이후 인도의 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그가 병사하자 각지를 거친 끝에[8]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9]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써 큰 돈을 벌고, 세 번째 남편 윌리엄 피터스를 만나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기와 사업 실패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고, 본인 주장에 의하면 CIA에 의해 감시를 당하는 등 악재가 겹쳐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1984년 두 명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해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 라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나 2년도 못 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 고립된 생활을 하다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딜 가든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을 남겼다.
또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말을 남겼다는 소문이 도는데, 실제로 스베틀라나가 그런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스베틀라나가 스탈린의 딸임에도 소련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점에서 착안해 다른 반체제 인사들의 유사한 발언을 갖다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친오빠인 바실리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빴지만 나이 차가 큰 이복오빠인 야코프 주가슈빌리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야코프의 아들이자 강경파 스탈린주의자였던 조카 예브게니 주가슈빌리(1936년 ~ 2016년)와는 관계가 그야말로 원수 지간이라 고모 스베틀라나가 죽을 때까지 예브게니는 자신의 고모를 배신자이자 패륜아라고 욕했으며 장례식 참석은 물론이고 추모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5.5. 사생아 설[편집]
스탈린이 권력을 얻기 전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사생아 여럿을 두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 유리 다비도프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현재 노보쿠즈네츠 지역의 건설기술업자로 살고 있으며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 정사로 자신의 아버지 알렉산드르가 태어났다. 이후 스탈린은 금방 떠났고, 증조모는 마을에 살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알렉산드르 다비도프란 이름으로 자랐다. 시간이 흘러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증조모가 반대했다."
그리고 1941년 자신의 아버지가 모스크바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해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면서 "한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가했고, 1948년 4월 22일에 조선에서 아들인 자신을 보았다는 것, 이후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또한 러시아 대중역사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Эдвард Радзинский)[10] 의 주장에 따르면, 두번째 아내 알릴루예바가 사망한 한 뒤로는 가정부였던 발렌티나 이스토미나와 사실혼 관계였고, 슬하에 두명의 사생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진스키는 학계에서 스탈린을 무근거 비판해 역풍을 맞은 볼코고노프조차 스탈린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회색분자라고 욕하는 극단적 반 스탈린주의자로 평가되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위해 자신의 뇌피셜을 가미하는 행동으로 유명하니 일부 걸러 들어야 한다.
6. 인명 표기[편집]
조지아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이다.[11] 조지아어로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부칭(父稱)인 베사리온(ბესარიონი)에 관형격 조사가 붙은 형태이다.
조지아어 표기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의 두 아들인 야코프 주가슈빌리와 바실리 스탈린의 본명 바실리 주가슈빌리의 성이 주가슈빌리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미권에서는 '이오시프'의 영어 표기인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주로 영미권 제작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조지아 스테판츠민다 출신의 작가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 1848년 1월 23일 ~ 1893년 12월 22일)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종의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다. 스탈린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숙청으로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고 한다.[12][13] 이를 보아 주변인들은 그에게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 레닌은 그를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Рябой, 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또 여러 번 쓰인 가명인 베소와 베소시빌리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동네 친구나 가족들은 그를 소소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여러 가명과 작가로서의 필명을 사용했다. 문필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땐 소셀로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페트로프, 이바노비치, 갈리아시빌리, 세묜 즈벨라야, K. 카토, 곰보 오스카, 오시프 코바, 괴짜 오시프, 캅카스인, 우유장수, 곰보, 게자(절름발이), 쿤쿨라(비틀거리는 사람), 코바 신부 등 이것저것 많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엔 그의 캅카스적 정체성을 대표해주는 코바의 사용 빈도가 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별명은 스탈린으로 스탈(сталь)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며 스탈린은 러시아어 소유접미사가 붙은 성씨 형태이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강철의 대원수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다. 몇몇 미국매체에서 이 인물을 패러디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을 번안하여 존 스틸(John Steel)로 쓰는 경우도 있다.
성씨 스탈린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탈린 본인은 "동지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고 말했지만 바쿠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류드밀라 스탈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스탈린의 평생 심복이었던 몰로토프는 "그건 그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수없이 많은 가명 중에서 본격적으로 '스탈린'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스탈린을 당내에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저작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Марксизм и национальный вопрос)》에 필명으로 이 이름을 쓴 이후부터다.
비밀문서의 서명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썼다.
7. 여담[편집]
- 스탈린은 매우 모순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냉철한 지성과 강인한 신념을 소유한 혁명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 스탈린은 매우 괴팍하고 격정적인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그는 품행이 단정한 인간이었다. 정적들이 스탈린의 잔혹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과소평가했기에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겉으로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제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겉으로 단정한 척 했을뿐이지 레닌이 트롯츠키를 지지하며 스탈린 자신의 입지에 위기가 오자 본성을 드러내며 레닌의 아내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로 ‘창녀’, ‘매독 걸린 암캐’같은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하여 레닌이 스탈린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절교를 경고한 편지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14] 또한 스탈린은 사색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공적인 장소에서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으며 불필요한 서론이나 장광설,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조리 있게 이야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참을성 있는 태도를 보였다.
- 그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논쟁할 때 상대방의 눈을 무자비하리만큼 뚫어져라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스탈린의 냉혹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사람은 속으로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앉아서 이야기할 때 스탈린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버릇이 있었다. 몸짓이나 손짓은 그다지 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강조할 만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는 손을 사용했다. 스탈린의 목소리는 억양이 거의 없었고[15] , 큰소리를 내는 일도 좀체로 없었다. 그러나 일단 그의 입이 열리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도 순식간에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스탈린의 말솜씨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었고, 비범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스탈린은 결코 급하게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며 그와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실제로 1941년 11월 7일, 혁명 기념일 연설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 코앞까지 쳐들어온 상황임에도 스탈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 그는 누군가로부터 보고를 받을 때는 방안을 꼿꼿한 걸음걸이로 왔다 갔다 하며 귀를 기울였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춰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다시 걸어다니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몇 분간 가만히 앉아 있곤 했는데 자기가 들은 보고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때로는 "어떻게 생각해?"라며 간결하게 묻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스탈린의 취향에 맞게 최대한 간결하고 쓸데없는 말을 빼고 대답하려 노력해야만 했다.
- 스탈린은 식사도 느긋하게 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가 있어도 결코 나이프와 포크를 바쁘게 움직이는 법은 없었다. 천천히 약간만 먹는 것이 스탈린의 식습관이었다. 술 중에서는 와인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언제나 본인 스스로 마개를 따고는 라벨을 주의깊게 바라보곤 했다.
- 스탈린은 절대로 서류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연필이나 펜을 가지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메모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이 메모를 하는 것도 안좋아했는데,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드미트리 셰필로프는 스탈린이 자신의 말을 메모하지 말라고 자주 짜증을 냈으나, 몇시간이나 이어지는 스탈린의 교시를 기억력으로만 담아갈 수 없었으므로 다들 식탁보 밑에서 몰래 기록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스탈린은 올빼미 체질이라 일은 주로 밤에 했다. 일반인들이 스탈린에게 가지는 선입견과 달리 그는 독소전쟁 중 전선으로부터 안좋은 보고를 받고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는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명이었다.
- 스탈린은 상당한 독서가였다. 그는 러시아의 고전에는 능통했으며, 셰익스피어, 하이네, 발자크, 모파상의 책들을 좋아했다. 이외에도 많은 문학을 섭렵했으며,[16]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독서를 했다.
- 스탈린은 정치국에서 발언시 항상 자신의 생각을 간결하게 말했다. 극히 난해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요점만을 간단히 말했다. 그러나 일부 정치국원들은 스탈린과는 달랐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매우 정열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고, 카가노비치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스탈린은 정치국원들이 사무실 밖에서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의 정치국원들은 함께 휴가를 간다거나, 심지어 2~3명이 함께 차를 타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이나 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스탈린이 죽고 나서 장례식이 치뤄지기 전날, 니키타 흐루쇼프의 방안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거기에는 정치국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다음날 슬픈 얼굴로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정치국원들이 독재자의 죽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이미지에 비해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군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붉은 군대, 소련군은 매우 정치화되어있던 군대였고 국가대사에 사사건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군을 정치의 수단으로써 생각했던 스탈린 입장에서는 미리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맞았다.
-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 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 했었던만큼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스탈린이 그러고 나서도 아침 일찍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 머리는 상당히 명석한 편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반대로 작은 은혜도 기억해뒀다 갚았는데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고, 또 어릴 적 신학교에 다니다 불온서적을 걸렸을 때 자기꺼라고 하면서 감싸줬던 급우나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했다고 한다.[17] 막심 리트비노프는 런던에서 스탈린이 항구 노동자들에게 두들겨맞던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말년까지 험한 꼴을 안 당했는데 리트비노프는 아무래도 자신이 스탈린을 구해줬던 것 때문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무명 시절의 스탈린과 친해졌다가 덕 본 케이스.
-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고통은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그곳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또한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나치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독소전쟁 시기에 소련 치하의 동유럽 국가들,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후방 관리를 맡겼고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다만 이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정책에 의한 것으로, 이전부터 소수민족에 대해서 강력한 탄압을 일삼고 러시아 중심주의로 동화정책을 강요했으며 중공업화로 지방, 특히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농촌지역이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본인이 소수민족들의 반발을 만들어놓고, 반발이 터지니깐 그걸 빌미로 해서 강제이주까지 시킨 셈이다.
- 스탈린의 편집증과 의심증은 나이를 먹을수록 심해졌는데 독소전쟁 개전 직전 시점에서는 히틀러가 크렘린을 매수하서 자신을 암살하려 할지 모른다는 강박에 자신을 지키는 근위병들을 가리키면서 “저놈이 쏘면 내 등 뒤에 쏠거고, 저놈이 쏘면 내 면전에다 쏠 수 있겠군”이라고 시니컬한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얘기해서 주위를 당혹케 한 적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드미트리 셰필로프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이 다차에서 회의를 하다가 잠시 자리를 뜰 일이 있으면 한참동안 회의장 바깥에서 회의장 안을 노려보다가 볼일을 보러 갔는데, 이는 스탈린이 자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다들 자신을 비난하고 음해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죽기 직전에는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숙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NKVD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숙청 실무진인 베리야였다.
- 특유의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 수염 탈모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독 턱수염이 나이 들며 빠졌다고 하며 젊은 시절만 해도 턱수염이 많았지만 중년에 접어들며 점차 안 나기 시작했다고.[18] 이후 중노년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콧수염만 있는 스타일이 되었다.
-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평생을 조지아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보냈다.[19] 러시아로 상경한 이후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숙청 당시에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하기도 했고, 조지아인들이 스탈린과 만났을때 조지아어를 쓰면 아는 체한다면서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조지아 음식이나 와인을 좋아하고 고향 노래를 자주 불렀으며,[20] 초대한 손님들에게 조지아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조지아에 여러가지 행정적인 혜택을 주기도 했는데 압하스를 조지아로 재편입시킨것이 스탈린의 공이다. [21]
- 본인을 아시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지금의 러시아에서야 농담 삼아 자신들을 아시아라고 자칭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에는 아시아는 유럽에서도 낙후되거나 이질적인 지역을 뜻하는 비하어로도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22][23] 조지아도 서남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나라인지라 러시아인들에게도 아시아라고 자주 비하되기도 했다. 스탈린 본인은 스스로를 아시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레닌의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자, 흡연을 혐오했던 레닌은 스탈린에게 "이 아시아놈 같은 작자를 봐! 할 줄 아는건 담배 피우는 것밖에 없잖아!" 라고 하자 분노한 스탈린은 그대로 자신이 피우던 파이프를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고 한다.[24]
- 소련 지도자의 직책으로 알려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은 스탈린 시기부터 당 지도자의 직책으로 자리하게 되었는데, 정작 스탈린은 1952년 19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로 남았다. 물론 스탈린 사후 서기장직은 '제1서기'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며, 이후 '서기장' 직책은 소련이 해체될때까지 소련과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 직책으로 자리했다.
- 방첩부 스메르쉬(СМЕРШ)는 스탈린이 직접 명명한 이름인데, 그 뜻은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의역하면 "살첩사령부" 내지는 "살간사령부"가 된다.
- 혁명가 시절에는 여자를 꼬시는 재주도 남달라서 여성편력으로 유명했고, 사생아도 둘 정도였지만, 막상 집권 후에는 바람피는 일 하나 없이 조용히 지냈고, 둘째 아내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로 두 번 다시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는 NKVD, KGB의 국장으로 재임한 측근들인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벌인 엽색 행각과 대비되는 것으로 스탈린 특유의 편집증적인 성격이 엄격한 자기 통제에까지 이른 것으로 평해진다.
- 사생활은 초강대국 소련의 독재자라는 악명과 다르게 검소하고 담백하게 살았다. 물론 필요한 물건이 말 안해도 알아서 진상되고, 따로 별장(다챠)이 배정되어 휴가철에는 별장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등, 방 하나를 빌려살던 것이 보통인 일반 도시민에 비하면 많이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25] 그래도 횡령과 사치로 악명 높은 다른 독재자들에 비하면 일반 중산층급으로 살았고, 주치의와 크렘린 요리사, 관리인들이 배정되어 괜찮은 식사와 의료혜택을 누렸지만[26] 그 정도는 타국 국가원수들도 다들 받는 혜택이라 특기할만한 건 없기는 했다. 어찌나 금전 욕심이 없었는지, 다달이 나오는 월급도 받는 그대로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했다.[27] 평소의 옷차림도 수수한 인민복이나 군복이 대부분이었다. 입는 코트는 10월 혁명 직후에 구한 것이었다. 그나마 사치라고 꼽을 만한게 술담배 정도였는데, 술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생산하는 와인 및 브랜디를 선호했으며, 담배의 경우 당대에 고급품으로 평가받는 헤르체고비나 플로르[28] 담배를 피웠다. 그 외에 미국제 담배인 '프린스 알버트' 등을 피우기도 했다.
- 사소한 일까지 다 기억해 복수하기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은혜도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해가며 갚아주었다. 유배 시절 편의를 봐준 경찰관이나 탈출할 때 마차에 태워준 마부, 신학교 시절 불온 서적을 들켰을 때 자신의 것이라며 보호해준 친구 등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좋은 직장을 알선해주거나 금일봉을 내려 보답했다. 민족인민위원회 위원 시절 알고 지내던 캅카스 민족주의자를 숙청 대상자 명단에서 빼내 준 적도 있다.
- 스탈린은 종종 어떤 지휘관의 무능이 귀에 들어오면 "그 자의 콧잔등을 갈겨주었나?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정통으로 갈겨주게."라고 소리치곤 했다. 당시 붉은 군대에서는 국방 인민 위원이 장군을, 장군이 다시 자신의 부하를 구타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 1941년 겨울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히틀러는 이듬해 공격의 목표를 소련 남부의 유전지대 카프카스로 변경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석유생산부장 니콜라이 바이바코프(Nikolai Baibakov)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
바이바코프 동지, 배신자 히틀러가 카프카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소!
그는 카프카스를 손에 넣지 못하면 전쟁에서 진다고 선언했지.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유가 독일군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오. 명심하시오!
석유가 한 방울이라도 독일군 손에 들어가면 당신은 총살이오. 하지만 너무 서둘러 유전을 파괴해서 독일군도 석유를 얻지 못하고 우리도 연료를 얻지 못한다면, 그때도 당신은 총살이오.
- 스탈린의 이콘
거 엄지손가락에 힘 푸십쇼.
- 1952년 전당대회 연설. 얄타 회담의 사진처럼 서방기자들이 찍은 일부를 제외하면, 스탈린의 사진이나 영상은 보정된 것이 대다수다. 위의 동영상은 가공 처리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영상. 위 영상에서 턱을 괴는 등의 행동이 보이는데 이는 지루해서라기보다 동시통역 등으로 인해서 그냥 머리를 앞으로 내민 행동으로 추측된다. 뛰어난 연설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레프 트로츠키나 아돌프 히틀러[30] 등과는 반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원래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억양이 없고, 그냥 기계처럼 원고를 읽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하는 것보다 내용을 중요시해서 실제 청중들의 관심을 많이 끈 편이었다고 한다.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보내준 코카콜라를 마시고는 그 맛에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미국에서 만든 음료수가 이렇게나 맛이 좋다는 것에 약이 올라서 수입 금지를 때려버리고, 이후 식품화학자 미트로판에게 배를 원료로 해서 콜라를 능가하는 음료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콜라에 푹 빠진 게오르기 주코프는 직접 콜라를 밀수입해 마셔야 했다.
- 말년에 러시아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해 인류의 모든 위대한 유산은 소련과 러시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 왜곡을 하려 들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점>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해 '러시아 민족 언어'의 기원이 쿠르스크와 오룔 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독소 불가침 조약, 독재 정치 등으로 인해 미국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이 미국과 함께 독일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자 미국은 스탈린에게 '조 아저씨(Uncle Joe)'라는 애칭을 붙여 대대적인 긍정적 선전을 했다 #.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스탈린에게 '미국에서는 당신을 이렇게 부른다'라고 알려주자 스탈린은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 스스로를 '강철의 사나이'라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고소공포증 환자여서 1943년 테헤란 회담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탄 것이 스탈린 인생 최초의 비행이었다고 한다. 테헤란 회담 당시 스탈린이 탄 비행기가 난기류에 휩쓸리는 바람에 심한 멀미를 겪었는데 한동안 모스크바에 '대원수 동지'가 심한 멀미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얄타 회담도 얄타에서 하게 된 이유가 비행기를 타기 싫어서 그랬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실제로는 스탈린의 주치의가 '이 상태로는 멀리 못 간다'고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 얄타 회담에 참석할 때 스탈린은 FD 3878라 불리는 특별 열차를 타고 갔는데 가는 동안에도 일할 수 있도록 꾸몄다. 83톤이나 나갈 정도로 중무장한 기차 내에는 서재와 거실, 화장실, 부엌, 경호실까지 있어 움직이는 크렘린 사무실 같았다고 한다.
- 워커홀릭으로 아주 세세한 일까지 본인이 다 처리해야 만족했다고 한다.[31]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그런데 주로 밤까지 일하고 새벽에 잠을 자고는 다음날 오전중에 늦게 일어나는 스탈린의 업무 스타일에 맞추느라고 장관부터 하급 공무원들까지 새벽에도 일을 해야했다. 문제는 다음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던 스탈린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평일 근무시간대에 일어나서 업무를 또 해야 됐기에 잠도 못자고 근무를 계속 해야했고, 그 와중에 스탈린이 술 권하면 술도 마셔가며 일을 해야해서 과로와 음주로 건강을 심하게 망쳤다. 게다가 스탈린은 아랫사람들의 일 처리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발견되면 바로 숙청해 버리고 새 인물을 들여서 말 그대로 부하들이 죽어나갔다.
-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물론 당시 소련 공산당 내에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처럼 '유대인은 다 죽어야 한다' 정도는 아니었고, 측근 중에서도 유대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유대인들이 국가나 당이 아닌 유대 민족과 종교 그리고 이스라엘에 충성한다고 믿었다. 치매증상을 보이던 말년에는 유대인들이 자길 해치려 한다고 믿어 '유대인 의사 음모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소련이 세계최초로 유대인차별금지법을 만든 나라니 만큼 공개적으로 드러내진 않는 편이었고, 나름대로 유대인을 신경써준답시고 유대인 자치주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해주기도 했다.[32] 이외에도 독소전쟁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대규모로 대피시켜서 목숨을 건지게 했고, 유대인의 적인 히틀러를 박살냈기에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기는 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양면적인 인물이었던것이다.
- 총기를 다루는데에 서툴렀는지 실수로 사람을 죽일 뻔 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참새를 쫓겠다며 총을 들고 설쳐대다 경호원 한 명이 맞았다는 말이 있고, 또 한 번은 오발로 미코얀을 죽일 뻔 했으나, 간발의 차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주변에 자신을 사격의 명수라고 자랑했다.
-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라코시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한 번은 스탈린이 캅카스로 쉬러갔는데 라코시가 찾아와 스탈린의 측근들과 술을 마셨다. 이때 스탈린의 측근들은 스탈린과 술을 마시듯 라코시와도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과음을 했는데 이걸 본 라코시가 '이게 무슨 꼴이냐'며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베리야는 그대로 스탈린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고, 그 대가로 라코시는 그날 저녁 열린 스탈린과의 만찬에서 만취할 때까지 강제로 술을 마시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도망쳤다고 한다.
- 스탈린은 별장에서 즈다노프의 피아노 반두에 맞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와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몰로토프는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라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연주할 수 있었고, 보로싈로프는 목소리가 근사했다고 한다.근데 부르는 노래가 어릴 적 부르던 찬송가(...)였다고 한다.
- 사담 후세인은 개인적으로 스탈린을 존경했다고 한다.
- 한 번은 페클라 코르슈노바라는 70세 노인이 스탈린에게 암소를 선물해 보내자 직접 답장을 써줬다.
"어머님,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님,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33]
- 선전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 취미가 나무 심는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다. 소치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는 24만㎡의 녹지가 있었고, 조경과 농사를 직접 감독했다. 감귤나무를 위한 온실을 설계하고 포도밭 설치를 감독했으며 직접 수박을 재배했고 연못에 물고기를 키웠다. 가끔 모스크바 상점에 직접 키운 수박을 출하했다. 그 외에도 말, 염소, 병아리, 오리, 작은 양봉장도 있었다. 물론 전부 다 직접한 건 아니고 별장 관리인들에게 시키기도 했는데 관리책임자 P. V. 로즈가초프 중령에게 내린 수백가지 지시사항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1950년 4월 7일: a) 5월 10일부터 모판에 수박과 멜론을 심을 것. b) 7월 중순에 수박과 멜론 덩굴을 잘라줄 것.
4월 20일 :...주방에서 연못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전나무를 심을 것...주 건물 옆, 그리고 연못 옆 정자 쪽의 사과나무들 사이에 0.5미터 간격으로 옥수수를 심을 것. 이 곳에 콩도 심을 것...텃밭 가장자리에 가지, 옥수수, 토마토를 심을 것.[34]
- 소련군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아버지는 러시아 정교 신부였는데 당시 종교인은 지위고하 불문하고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바실렙스키는 언젠가 스탈린과 같이 식사할 때 스탈린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자 "인민의 적과는 상종하지 않아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오히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러는 건 아니다."라면서 바실렙스키에게 아버지와의 화해를 종용했다.
-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엠버밍 처리되어 훗날의 김정일 마냥 붉은 광장의 레닌 영묘에 합장되었으나,[35]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후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도라 라주르키나라는 나이 많은 볼셰비키가 크렘린에서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라고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영묘 바로 뒤에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 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바람에 스탈린의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렘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36] 스탈린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급진적이라는 평을 받는 20차 전당대회 연설에서조차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이후 1970년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흉상이 제작되어 벽 묘지 앞에 세워졌다.
- 스탈린의 동상은 러시아와 구 소련 지역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 있다. 위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는 스탈린의 석상이 하나 남아있으며,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 시청 앞의 거대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스탈린 박물관[37] 내에도 또 다른 스탈린의 동상이 있고 볼고그라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에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꽃을 놓고 간다고 한다.
- 6.25 전쟁은 스탈린이 지시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흐루쇼프의 회고록이나 소련 붕괴 후에 열람할 수 있게 된 문서 등을 통하여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이 일어나는것을 원하지 않았고, 6.25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당시 소련이 산업복구는 얼추 완료된 상태였지만 인적자원적인 면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과 맞설려면 추가적인 경제성장 및 인적자원 복구가 완료되어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38] 하지만 김일성은 북한이 남한은 물론, 중국과 대만, 일본보다도 경제정상화에 일찍 성공한데다가 이승만의 지지율이 낮은것에 고무되어[39] 군사를 일으키면 쉽게 함락시켜서 통일을 해낼것이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빠져있었고 이 때문에 무려 49번이나 전쟁승낙을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에 대한 지원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게다가 당시 스탈린이 승낙한 건 옹진 반도에 대한 국지전이었지, 전면 남침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북한이 패망 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는데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공군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마지못해 소련 공군의 참전은 허락했다고 한다. 대신, 이 사실이 들통나지 않도록 '미그앨리'라고 부르는 북한의 북부 상공에서만 비행하도록 했고, 교신에 러시아어를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고 한다.[40]
- 말년에는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신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개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놓고서는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일원들을 춤추게 하였는데, 흐루쇼프, 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자들이 구두를 벗고 개 울음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춤을 아주 못 추어서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몰로토프는 상당한 춤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춤판에 딸 스베틀라나를 데려와 실신할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냉전시대의 선전이 아니라 드미트리 볼코고노프[41] 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높으신 어른들이 이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녀노소 술 퍼먹고 미친듯이 춤추는 건 러시아의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다.[42] 서비스의 서술에는, 죽기 전날의 파티에서 스베틀라나에게 춤을 추자고 했지만 스베틀라나가 싫다고 하자 스베틀라나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다음에 머릿채를 잡고 파티장에서 마구 끌고다녔다고 한다. 주변에선 스베틀라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면서도 감히 스탈린을 말리진 못했다고. 그런데 해당 일화의 원전인 흐루쇼프 회고록에는 이것도 나름대로 스탈린의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뭐요?
- 스탈린은 디너 파티에서 장난을 자주 쳤는데 술잔에 포도주 대신 보드카 붓기, 음식이 든 접시에 후추 뿌리고 휘젓기, 의자 위에 토마토 두기 등이였다. 그런 장난에도 초대된 간부들은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는데, 스탈린이 항상 감시하고 트집을 잡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볼코고노프의 책에 실린 또다른 회고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친지, 심복들과 같이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서는 웃으면서 같이 보면서 웃던 사람들의 유배문서에 서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 도중에 갑자기 한 명을 지목하여 '당신은 스탈린 동무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나?\' 등의 얼토당토 않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43]
-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덕분에 이긴 게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이겼다"라는 말이 유명해 히틀러처럼 군알못 정치인 취급을 받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흐루쇼프의 평은 지나친 저평가라는게 주류 의견이다.[44] 독소전쟁 초기에는 현장 지휘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등 실책을 많이 저질렀지만, 이후에는 개심해 군의 문제는 전문가인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독재권력을 이용해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시하는 등, 마지막까지 과도한 개입과 측근들의 전횡을 눈감아주어 독일군의 전쟁 수행 능력 저하에 큰 축을 담당한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
- 스탈린 사망 후 그의 블리즈냐야 별장의 서랍에서 나온 세 장의 편지가 유명하다. 편지는 신문지에 싸여 있었고, 각각 요시프 브로즈 티토, 니콜라이 부하린, 블라디미르 레닌이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Стаљину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 씨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더군요...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건데, 나는 두번 보낼 필요는 없을 겁니다.[45]
-
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
코바, 어째서 나의 죽음을 원하는 거지?
-
Уважаемый т. Сталин,
Вы имели грубость позвать мою жену к телефону и обругать ее. Хотя она Вам и выразила согласие забыть сказанное, но тем не менее этот факт стал известен через нее же Зиновьеву и Каменеву. Я не намерен забывать так легко то, что против меня сделано, а нечего и говорить, что сделанное против жены я считаю сделанным и против меня. Поэтому прошу Вас взвесить, согласны ли Вы взять сказанное назад и извиниться или предпочитаете порвать между нами отношения.
С уважением, Ленин.
5-го марта 1923 года.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욕설을 하는 무례를 범했소.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잊자는 당신의 말에 동의했을지라도, 이 사실은 그녀에 의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알려졌소. 나는 내게 적대적인 행위를 그렇게 쉽게 잊을 생각이 없는데, 아내에게 적대적인 행위는 내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므로 동지에게 청하건대, 동지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끝내는 것을 선택하든가를 저울질해보기 바라오.
경의를 표하며, 블라디미르 레닌.
1923년 3월 5일각각의 편지에 관해 로버트 서비스는 티토의 편지를 보관한 이유는 배짱이 마음에 들어서, 부하린의 편지는 애정 때문이 아니라[46] 부하린을 숙청할 때의 만족감을 되새기기 위해서, 레닌의 편지는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였을 거라고 평했다.이에 관해 티토와 레닌의 편지는 대부분이 서비스의 평에 동의하지만, 부하린의 경우에는 스탈린이 부하린의 유언만 보관한 것이 아니라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었던 회고록도 같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서비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로버트 서비스가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 때문이라는 평가를 거부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이 이 편지를 굳이 간직한 이유는 부하린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부하린은 스탈린과 매우 절친한 친구이자 혁명 동지였으며, 편지에 나오듯이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분노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보다는 왜 굳이 나를 죽이려 하냐는 당혹감을 보일 정도였다.애정 설의 논거는 부하린을 숙청했을 당시의 만족감을 되새기는 용도로는 유언장 하나로 충분하며,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자기에게 자기 손에 숙청 당한 정적의 회고록을 멀쩡하게 보관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47][48] . 아무튼 이제는 애정이건 만족감이건 이유를 알 수 없다.참고로 레닌의 편지에 대해서는 흐루쇼프의 회고록에도 언급되는데 스탈린이 죽은 후 서랍에서 그 편지가 나온 것을 보고 정말 놀랐으며 스탈린이 그걸 끝까지 보관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써놨다. 그리고 스탈린이 아마도 그 편지를 없애버리지 않은게 그 편지의 존재를 까먹어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남겼다.
- 유명한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가 스탈린상과 2만 루블의 상금을 받게 되자 스탈린을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야사가 유명한데, 문서고 조사 결과 유디나가 스탈린상을 받기는커녕 스탈린상 후보에도 오른 적도 없으며, 볼코프의 증언에서 베껴서 창작한 일화임이 밝혀졌다. 어쨌든 이 도시전설에 따르면 유디나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는데 창작임을 감안하고 읽자.
고맙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의 도움에 대해서. 난 당신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 당신이 사람들과 국가에 끼친 큰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겠습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므로 당신을 용서하실 겁니다. 난 돈을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기부하였습니다.”
- 스탈린의 성관계에 관한 여러 소문이 있다. 아내에게 비서랑 같이 3P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든가[49] , 두번째 아내인 나데즈다가 사실은 스탈린의 친딸이라든가[50] , 사실 나데즈다는 자살이 아닌 스탈린을 비판하다 분노한 스탈린에게 살해당했다든가 사실 스탈린은 페도필리아라든가 등 여러 소문이 있으나 신빙성은 낮다.[51]
- 정치인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시인으로 유명했고, 소련이 건국되기 전 교과서에 시가 실린 적도 있었다. 집권 후에도 여러 시나 저술을 남겼다. 스탈린의 시적인 능력은 냉철하다 못해 기계 같은 이미지와는 대비되게 매우 뛰어났다고 하며 시인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라는 평도 있을 정도. 다만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로는 주로 러시아어를 쓰다보니까 모어인 조지아어에 서툴러져서 어머니와 의사소통을 주고나눌때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 첫번째 아내 예카테리나의 장례식 때 몰래 잠입한 정보부 요원을 눈치채고 도주한 적이 있다.
- 별장에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는데, 서부극을 특히나 좋아했다고 한다.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영화를 고르게 하고 나서 영화를 봤다고 한다.
- 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권력자 치고는 소박한 식사를 했는데 아침 식사는 우유를 섞은 쇠고기 국물에 오트밀을 넣은 죽을, 점심과 저녁에는 스프와 생선을 좋아했다고 한다. 과일 중에서는 바나나가 취향이었다.
- 다만 전임인 레닌이나 후임인 흐루쇼프에 비하면 꽤 미식가였던 편이라고 한다.[53] 애초에 스탈린의 고향이 소련에서도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조지아였고, 스탈린이 젊었을때 주로 조지아에서 활동했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상할것이 없기는 했다.
- 2021년 취임한 인도 타밀나두 주총리는 M. K. 스탈린이다. 1953년 3월 1일생인데 며칠 뒤 사망한 스탈린의 이름을 따 지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콧수염도 있다.(...) 무신론자이지만 반종교주의자는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당적은
공산당이 아니고드라비다 진보당.
- 푸틴이나 메드베데프같은 최근의 러시아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스탈린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푸틴이나 메드베데프나 소련을 무너뜨리고 러시아를 수립한 옐친의 계보를 잇는 데다가, 공산당은 야당이며, 그 공산당이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탈린의 실책과 폭정을 부각하면 부각할수록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다. 푸틴은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정도의 평가를 했지만 확실하게 폭군이며 독재자라는 평가를 했으며 시종일관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다만 2000년대 후반 이후 헌법개정을 하면서 철권통치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스탈린 통치시절에 일어났던 압제에 대해서 당시 서방의 음모와 스파이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거나 다른 나라도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식으로 두둔했다. 메드메데프는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시도는 옳지 않다며 젊은이들을 매섭게 비난했고 스탈린을 넘어 소련 자체를 전체주의 정권임이 확실했다며 스탈린을 넘어 소련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 작가 아나똘리 김의 에세이인 <초원, 내 푸른 영혼>에 의하면 소련 연해주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지시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했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다시 연해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나똘리 김의 아버지가 연해주 현지에 살던 소련인 교사들한테 고려인 아이들을 위해 학교 수업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거절당하자, 스탈린한테 직접 고려인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는데 이틀 후에 스탈린 본인으로부터 직접 답장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고려인 아이들의) 학교 수업은 반드시 다시 시작될 것임. 이오시프 스탈린."이라고 아주 짧게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소련인 교사들이 아나똘리 김의 아버지를 직접 찾아와서 굽실거리며 고려인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한다[54] .
8. 스탈린을 다룬 저작[편집]
8.1. 국내 정발된 저작[편집]
- 스탈린 선집
- 현재 절판. 북한의 경우 1964년 조선로동당 출판사에서 3권에 걸쳐 완역했다. 조선로동당 출판사 것은 국립중앙도서관 북한자료 센터에서 열람이 가능한데, 1980년대 한국에서 발행된 책과는 달리 보다 내용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내놓은 <나의 아버지 스탈린>
- 1993년 들어와 2018년 기준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
- 트로츠키 평전을 저술한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평전.
- 1970년대 후반 세계 인물 평전/회고록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다. 오래된 도서관의 보존서고 외에는 찾기 힘든 도서.
- 러시아 반공 역사학자이자 소련 장성 출신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의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들>
- 그러나 스탈린 평전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2차 대전 이전 얘기가 죄다 잘려버렸고, 또 볼코고노프 장군 자체가 친 옐친, 반 소련 사관을 중심으로 매우 편향적인 내용으로 저술했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2017년 기준으로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 모두 절판 상태.[55]
-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
- 맨 처음에는 강철 권력이란 부제를 달았고, 이후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이란 새 부제를 달고 새로 나왔다. 볼코고노프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이 대부분이지만,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쓴 스탈린 평전에 비하면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 히틀러 vs 스탈린, 권력작동의 비밀>
- 절판되었다.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의 젊은 스탈린
- 말 그대로 스탈린이 젊은 혁명가 시절을 다룬 전기. 몬티피오리는 젊은 스탈린을 쓰기 전에 집권 후 스탈린의 전기,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2003)>도 썼다.
- 2017년 러시아 연방 국립문서보관소 선임연구원겸 러시아 국립고등경제대학 소속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 삼인 출판사에서 정발했다. 90년대 이후 해금된 기밀문서들을 중심으로 스탈린 시절을 다루는 권위자로 손꼽히는 러시아의 "올레그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저서. 한국의 소련사 권위자이자 "리처드 오버리"의 저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번역으로 유명한 류한수 교수가 감수했다. 하지만 저자인 올레크가 직접 밝힌 것처럼 러시아 사회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스탈린 옹호 목소리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스탈린 신화를 부수기 위해서 출판한 책이기 때문에 책 해설에 달린 노경덕 교수의 지적대로 현재까지 학계에 누적된 스탈린의 통치에 대한 다각도 분석을 무시하고, 과거의 전체주의 프레임만을 지나치게 사용했으며 자료의 누락이나 억측이 많이 섞였단 비판도 제법 있다. 맥락무시나 비약 및 악의적 억측도 있다는 얘기로 기존의 수정주의적 학계의 견해를 무시했다는 점을 지적받기도 한다.[56][57] 그러나 동시에 노경덕 교수는 로버트 서비스가 냉전 이후 쓴 스탈린 전기와 비교했을 때, 현재까지 국내에서 나온 스탈린 책 중 가장 읽어볼만한 스탈린 평전이라는 호평도 내렸다.
-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
- 원서 제목은 <Stalin's War>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의 이오시프 스탈린을 주로 다루고 있다. 소련 군사사와 외교정책 관련 연구분야 권위자로 유명한 역사학자인 제프리 로버츠가 집필했다. 이 문단에 언급된 가공된 2차 3차 자료들 중에 스탈린에 대해 가장 긍정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물론 스탈린에 대해 독재자라는 점과 적잖은 범죄자적 행위 및 인민들의 희생을 불렀던 인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발휘한 전시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을 재평가하고 있으며, 냉전에 대해서도 기존의 서구 시각과는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예를들어, 로버츠는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와의 평화를 추구했고, 타국에 대해 덜 공세적이었던 반면,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트루먼의 반공정책이 냉전을 불러일으킨 책임이 있다고 봤다. 심지어 과거 서구 학계에서 냉전의 책임을 스탈린에게 물었던 것은 무고하게 씌어진 비난이라고 로버츠는 주장한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지도자로서의 스탈린에 대한 로버츠의 평가는 처칠이나 루스벨트 드골과는 달리 탁월한 군사 지도자로서 대체될 수 없는 인물이라고까지 극찬하는 수준이다.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탈린에 대한 전시 지도자로서의 평가와 냉전 초기 탁월한 정치인으로서의 재평가가 스탈린이 과거 자행한 숙청과 인명피해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개한 논리는 절대 아니며,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선 이러한 측면도 같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로버츠의 취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기존에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던 스탈린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제법 놀랄 수 있을 것이며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로버트 서비스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책에서 보지 못했던 전시 지도자로써의 스탈린의 타고난 리더쉽과 이를 입증하는 여러 인물들의 증언들과 여러 근거들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또 다른 측면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아주 적극적으로 추천할만한 책이다. 데이비드 글래츠의 <독소전쟁사>가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군사적 업적을 재조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면, 제프리 로버츠는 그 과정에서 스탈린이 보인 지도력에 초점을 두었으니, 글랜츠의 군사사적 연구하고도 상당부분 비교도 된다. 번역은 러시아 연구자로 알려진 김남섭 교수가 했다.
8.2. 국내 비정발 저작[편집]
- 로이 메드베데프는 여러 저작물.
- 에드바르트 라진스키의 스탈린 정신병자설에 관한 저작물.
- 대중 역사관을 모아다 만든 것으로 학술적 가치는 없다고 평가 받는다.
- 2014년 프린스턴 대학의 스티븐 코트킨 교수가 내놓은 총 3부작으로 예정된 스탈린 평전.
- 그러나 출간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 제임스 해리스 교수의 거대한 우랄 산맥, 스탈린의 철도 시리즈 등
- 스탈린 시대의 철도와 중공업에 대해 다뤘다.
- 아치 게티의 대숙청과 대기근에 대한 2세대 수정주의적 연구를 담은 저서들.
- 현 나무위키의 대숙청 문서는 아치와 로베르타 매닝이 공저한 저술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루도 마르텐스의 스탈린 전기(Another View of Stalin)
- 스탈린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스탈린 전기로 소련 해체 이후인 1996년에 출간됐다. 저자 루도 마르텐스는 역사학자[58] 이자 벨기에 노동당 당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자가 쓴 <스탈린 전기>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Another View of Stalin 다만 국내 사회운동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재글로 책의 전문을 완역하긴 했다. 책은 주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및 혁명적 업적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스탈린의 과오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대숙청 그리고 독소 불가침 조약 등에 대한 서방학계의 주장을 반박하고,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의 성과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과를 재평가한다. 또한 트로츠키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며, 티토와 흐루쇼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나무위키에서 스탈린 전기로 언급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전기 중에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번역본은 디비피아에서 볼 수 있다.
9. 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스탈린주의[편집]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실 스탈린주의는 일종의 비칭에 해당된다(...)
정식 명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11.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편집]
대부분은 스탈린이 격하되고서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개명된다.
- 스탈린그라드 1961년
- 스탈리노 1961년
- 스탈리나바드 1961년
- 스탈리니리 1961년
- 스탈리노고로드 1961년
- 오라술 스탈린 1960년
- 스탈린 1956년
- 슈탈린슈타트 1961년
- 스탈린 봉 1962년
- 쓰딸린 거리
- 스탈린 거리 1979년
12. 어록[편집]
이중에는 실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출처가 없는 말들이 있으니 유념하고 보길 바람.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ㅡ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그렇게 다뤄야 해!!"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
ㅡ 1937년 대숙청 중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출처2]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출처3]
또는 "예의나 배려는 개나 앓는 질병이다." 라고도 전해진다. 정작 스탈린은 별에별 시시콜콜한 호의도 잊지 않고 모두 갚아주고,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악감정 역시 사소한 것까지도 되갚았다."감사하는 마음은 개나 앓는 질병이다."[출처4]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출처5]
트로츠키는 이 말을 카메네프가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와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 것을 회상한 것이라고 했다."가장 큰 기쁨은 적을 골라 세심하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고 무자비한 복수의 갈증을 충족시킨 뒤 집에 가서 자는 거야."[출처6]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하다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출처들] 이 말의 출처는 윈스턴 처칠인데, 처칠은 라발이 뭐라 답했는진 모르지만 열병식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군단(legion)이 있다고 답했을 것이라 추측해 적었다. 이는 극단적인 관념론적 존재인 교황과 반대되는 극단적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적 반종교주의자의 관점을 한 마디로 보여준다."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
몰로토프와 대화를 나누다 나온 말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스탈린 사후 그의 평가는 진짜 저 말대로 되었다.[60][61]"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출처7]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출처8]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파샤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 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1931년 2월 5일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에서 한 연설[출처]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그러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와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로 공장, 토지, 은행, 운송수단 등의 사적 소유권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 1936년 4월, Roy W.Howard와의 인터뷰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 당시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출처9]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다."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며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다."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카이로 회담 당시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우두머리로서 자신과 많은 비교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것에 대해 믿고 따르기보단 어떻게든 그 결정을 막을려고만 드는 자신의 부하에 비해 스탈린의 부하들은 겸손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탈린의 통솔력의 비법이 궁금했던 처칠은 스탈린에게 통솔력의 비법을 물어봤다. 그러자 스탈린은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지요."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소수의 인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별 것 아니지만 다수의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막을 수 없다는 말이라는 해석도 있고, 인민들을 적당히 탄압하면 저항하지만 본보기로 다수를 모아 처리하면 겁 먹어 찍소리도 못한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스탈린이 두 가지 해석을 모두 경험했던 인물인만큼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말이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애매하다."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소련군이 섣부르게 시작한 공세는 이 때의 독일군 역습을 받아 대참사로 끝났다. 마침 캅카스를 향한 하계 공세를 계획하던 독일군은 전투 종료 1달 만에 청색 작전을 발동했다. 티모셴코는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스탈린의 책임이 워낙 컸던 패배다 보니 면피성 인사 조치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스탈린이 군부의 구체적인 작전 수행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사단을 시장에서 판다면 사주겠지만 시장에서는 사단을 팔지 않는다. 증원은 불가능하다."
- 1942년 5월,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도중 포위섬멸 위기에 처한 티모셴코 원수의 증원 요청에 대한 답신.
이는 현대전에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문구로 그냥 한 말이 아니라 포병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도 가지고 있었다. 인력은 아껴도 포탄은 아끼지 말라거나, 공세에는 반드시 포를 동원하라거나 하는 발언을 전략회의에서 했다."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석유 없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다가올 전쟁에서는, 석유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 1927년 12월 3일 연설에서
간부가 제일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간부 집단의 질적 향상이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한다는 뜻."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 1935년 5월 4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자신의 성을 쓰자 이렇게 일갈했다."넌 스탈린도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출처11]
"이제, 우리는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누가 공산주의자인 척 말하고만 있는지 보게 될 것이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력을 얻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은 부족하오."
"동지 여러분, 삶이 좋아졌습니다. 삶이 더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즐거울 때 일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이 나쁘고, 보기 흉하고, 불행했다면 스타하노프 운동이 있었겠습니까?."
-1935년 스타하노프 노동자 회의에서.
"포화 속에 수천 킬로를 달린 병사들에게 그런 즐거움(강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까?"
-구 유고슬라비아를 탈환하며 주둔해 있던 소련군이 현지 여성들에 대해 강간범죄를 저지른 것에대해 항의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 '밀로반 질라스'에게 한 말.[63]
[64]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는 언제나 존경받는다. 핀란드군의 강인함에 경의를 표한다."
-1951년에 했다고 전해지는말.[65]
스탈린은 다포탑 전차인 T-28이나 T-35를 매우 싫어했다. 그리고 그러한 다포탑 전차들이 실전에서 완벽한 실패작으로 판명된 걸 보면 비록 스탈린이 전술, 전략적으로는 문제가 많았지만 무기를 보는 눈 하나는 있던 모양이다. 한편 이 말 때문에 밀덕들은 어떤 무기에 뭔가를 덕지덕지 붙여놓는 걸 "백화점을 차린다" 고 표현하곤 한다.
-1938년 5월 4일 신형 다포탑 전차의 목업모델을 보고 포탑 한개를 부러뜨리며 한 말.[출처12]
한편 저 백화점 드립을 두고 자본주의의 상징이라서 백화점을 싫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소련에도 백화점이 엄연히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상징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백화점처럼 여러가지를 놓았다는 직접적인 비유법에 더 가깝다.[66]
그러나 스탈린 당시 소련의 경제 체제는 클리프주의 계열 좌파 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국가 자본주의이며 스탈린주의는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성향을 어느정도 겸하고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제국주의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파시즘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역시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란 한 줌의 자본가들을 물리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마르크스주의라는 건가. 이건 완전히 봉건주의잖아.
"아니오!"(нет!)
조선 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귀관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전진할 생각인가? 아니면 전진을 중단하기로 했는가?[67]
나로서는 굶주린 인민들과 실직한 사람들이 누리는 개인적인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진정한 자유란 착취와 다른 사람에게 억압받지 않는 곳, 실업이 없으며 직장과 집 그리고 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오직 그러한 사회에서만이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인과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조합을 지주로 한다는 점이다. 서구에 있는 여러 공산당들의 약점은 무엇인가? 그것이 노동조합과 결합되어 있지 않고, 또한 이들 공산당의 몇몇 분자가 노동조합과의 결합을 바라고 있지 않은 점이다. 때문에 현 시점에서 서구 공산당의 기본적 임무는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을 위한 캄파니아를 발전시키고 철저하게 추진하며, 전 공산당원이 빠짐없이 노동조합에 들어가 자본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을 결집시키는 체계적이고 끈질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이 노동조합을 지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