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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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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의 시인. 괴테, 실러와 더불어 19세기 독일 문학의 거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초기 시들은 로베르트 슈만이나 프란츠 슈베르트와 같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의해 가곡으로 작곡되어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본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낭만주의 시인 슈텔른의 강의를 듣게 되고 그 영향을 받아 창작 초기에는 낭만주의 풍의 시를 썼으나 이후에는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 신랄한 풍자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득 담긴[3] 시를 많이 남겼다. 특히, 허무주의, 자기비판적 아이러니가 담긴 작품들을 주로 썼다.
슈만의 가곡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하인리히 하이네를 그저 낭만주의 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낭만주의적 작풍은 초기에나 나타나고 이후에는 독일의 봉건적인 구체제를 풍자, 비판하는 참여 문학에 경도된 작품을 썼다. 즉 청년독일파의 일원으로 구분된다. [4] 괴테, 쉴러 등 독일 고전주의, 낭만주의 거장들을 신랄하게 까기도 했다.
14살때는 직접 나폴레옹을 보기도 했고, 괴테, 슈텔른, 마르크스, 헤겔, 뷔르거 등 그 당시 유명인사는 다 만나고 다녔다. 무엇보다 그는 괴테 이후 유럽 전체에서 흥행한 유이한 독일 문학가였다. 하이네 스스로도 "괴테의 요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낭만주의 작가들의 말로가 다들 좋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하이네는 물주 삼촌과 흥행으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충당하며 나름 잘 살다갔다. 대신 병을 많이 앓았는데, 인생 초반부터 끝까지 거의 40년을 병과 싸웠다. 그런데도 59세까지 산 것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797년 뒤셀도르프에서 유대계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났다. 다만 그의 집안은 독실한 유대교 집안은 아니었다. 어릴때 잠깐 유대교 학교를 다닌 것을 제외하면 하이네는 가톨릭 재단이 세운 김나지움으로 진학했을 뿐더러, 궁극적으로 프로이센 당국의 유대인 차별을 피하기 위해 1825년에 신교도로 개종한다. 하이네 본인은 신교도로 개종하고 나서 일신의 이득을 위해 신념을 져버렸다면서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있다.[5]
아버지는 직물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의사의 딸로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하이네의 어린 시절은 유복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유년기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그의 고향이었던 라인란트의 뒤셀도르프 역시 아예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된 상황이었다. 바꿔 말해서 하이네는 어린 시절 프랑스의 영향을 가득 받으면서 자라날 수 있었고, 이는 (아버지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생토록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파산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성공한 상인이었던 숙부 잘로몬 하이네가 하이네를 함부르크로 데려와서 양육했는데, 여기서 하이네는 상인이 되고자 상업과 영어[6] 를 학습했다. 그렇지만 하이네는 상업에는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이에 따라 숙부는 법을 공부할 것을 하이네에게 지시하면서 1819년 하이네는 본 대학교 법과로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법학 역시 하이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고,[7] 오히려 대학교를 다니는 시기 내내 하이네는 역사 및 문학 공부와 자유주의를 위한 정치 투쟁에 활발하게 가담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시인 및 극작가로 데뷔한 것도 본에서의 일. 이후 괴팅겐과[8]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닌 후 1826년에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상인들의 자유도시였던 함부르크는 당시 독일 연방 내에서 가장 검열이 느슨한 국가였기 때문에 하이네는 비교적 마음 놓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26년 낭만주의 성향의 <여행그림들(Reisebilder)>을 출간한 데 이어 다음해인 1827년에는 <노래들의 책(Buch der Lieder)>을 출간하는데, 특히 <노래들의 책>은 처음에는 평범한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나중에 로베르트 슈만을 비롯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가곡으로 써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하이네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슈만의 가곡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이네를 낭만주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1827년 이후 하이네는 낭만주의 성향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를 조롱하는 풍자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827년 이후 하이네는 사회 비판 및 풍자시를 본격적으로 쓰게 되는데, 특히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퍼져나가고 있던 민족주의와 독일 당국의 검열 제도가 주 타켓이었다.
아래는 민족주의와 검열에 대한 풍자가 가득 담긴 하이네의 이 무렵 시들.
게르만족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또 어디에서 끝나는가? 하지만 맥주는 마실 것이다. 아니, 게르마니아의 참된 후예라면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 타키투스가 특별히 게르마니아의 맥주 세르비시아를 언급했을 정도니까.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게르마니아> 열풍을 비꼬는 풍자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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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en: Das Buch Le Grand> 속의 산문
이후 영국과 이탈리아 여행을 거친 하이네는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7월 혁명의 열기가 식지 않은 자신의 이상향 프랑스로 이주한다. 이후 그가 사망하는 1856년까지 그는 쭉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꾸준히 독일어로 작품을 쓰는 한편으로[9]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하이네의 영향을 받아서 1840년을 전후로 독일 내에서는 청년독일파라는 자유주의 성향의 젊은 문인들의 모임이 결성되는데, 하이네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다.[10] 1841년에는 파리에서 구두상점 점원으로 일하던 18세 연하의 여성 마틸드(애칭으로 본명은 Crescence Eugénie Mirat)와 동거 끝에 결혼하기도 했다.(둘 사이에 자녀는 두지 않았다.)
한편 1843년부터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신문 지면에서 마구 비판하다가 결국 추방되어 파리로 망명을 온 카를 마르크스와 교제를 하기 시작한다. 망명객이라는 공통 분모로 인하여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하이네는 마르크스의 공산 혁명 개념을 "예술 작품과 예술가들을 파괴시킬 끔찍한 생각"이라며 반대한데다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파리에서도 프로이센 국왕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다가 프랑스 당국에 의해[11] 결국 벨기에로 추방되면서(이후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다시 이주해서 엥겔스와 함께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는 한편 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둘 사이의 교류는 끝을 맺는다.[12] 게다가 1847년 오랫동안 재정적으로 그를 후원해온 숙부 잘로몬 하이네가 사망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하이네는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848년 신경계통의 문제로 인하여[13] 상반신이 마비되어 하이네 본인의 표현을 쓰자면 '침대 무덤(Matratzengruft)'에 갇히게 되었고[14] 시력도 크게 악화되는 악재까지 뒤따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이네는 활발하게 정치 참여를 하는 한편[15] , 작품 활동도 병행하였으나 이미 약해진 몸은 이러한 활동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1856년에 숨을 거둔다.
3. 이모저모[편집]
- 유대계 혈통으로 인하여 나치 독일 시기 내내 그의 책은 금서였고, 심지어 나치가 주도한 집회에서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그나마 대표작인 시 <로렐라이>는 워낙 유명해서 차마 없애지는 못했고, 대신 '작자 미상'이라고 쓰였다.
- 백인 우월주의적인 시각이 있었다. 특히, 유럽에 있을 자격도 없다고 헝가리인들을 깠는데 당시 헝가리인들은 이미 천 년 가까이 유럽에서 살면서 인종적으로 백인계로 동화되었고 프란츠 리스트 같이 헝가리인으로서 당시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네는 헝가리인이 미개한 아시아에서 왔다며 헝가리를 질색했다고 한다.
-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입헌군주정을 지지하고 공화정에는 거부감을 표했는데, 이로 인해서 파리 망명 시기에 같은 망명객들 및 좌익 성향의 프랑스 지인들과 자주 키배를 붙었다고 한다.
- 프랑스를 평생 흠모했던 것에 반대급부로 영국은 무척 싫어했는데, 산업혁명이 활발히 일어나던 당대 영국인들의 이해타산적인 태도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의 영웅 나폴레옹을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부대가 꺾은 것 때문에 배영감정이 더욱 강화됐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