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디미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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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불가리아의 정치인이다.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주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인민전선의 일종인 조국전선을 조직하여 나치 독일군과 싸웠으며 1946년 9월 15일 왕정 체제가 무너지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자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의 디미트로프[편집]
소피아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한 인쇄식자공이었던 디미트로프는 1902년에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였는데, 이후 이 세력은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형성하였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급진화하면서 1919년에 코민테른에 가입했고 불가리아 공산당이 되었다. 그는 1904년부터 1923년까지 불가리아 노동조합연맹의 서기장을 지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 불가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7년에 체포될 때까지 불가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새로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했다.
1923년 6월,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Александър Стоименов Стамболийски) 총리가 쿠데타로 암살당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의 주역 알렉산더르 찬코프 총리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하였고, 디미트로프는 혁명 활동가로서 탄압에 맞선 저항을 지도했다.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와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러 가지 가명으로 1929년까지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다시 이주했고, 거기에서 나치에 맞서서 독일 공산당이 이끄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였다.
2.2. 라이프치히 재판과 코민테른 지도[편집]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공범으로 연루되어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디미트로프는 당시 법원과 검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관련 재판은 3개월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1933년 12월 13일 변론단계에 들어가 검사총장의 논고, 변호인의 변론에 뒤이어 12월 16일에 디미트로프가 최종 진술했다. 당시 나치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독일 사법부는 주범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를 제외한 모든 '공범'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며, 이에 따라 석방되었다.[2][3]
이후 디미트로프는 1935년 8월 2일 코민테른 7차 대회에 참가해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은 코민테른의 임무"라며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전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반파시즘 통일전선론이 코민테른에 정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본격적으로 반(反)파시즘 투쟁을 위한 인민전선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표명한 테제를 디미트로프 테제라고 부르기도.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론은 스페인 내전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미국, 인도, 영국에서도 반파시즘 통일전선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2차대전 시기 디미트로프는 고국인 불가리아로 귀국하여 인민전선의 일종인 불가리아 조국전선을 조직하여 나치를 불가리아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인민전선 노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에 맞서게 되는데 큰 영향을 줬다.
2.3. 불가리아의 지도자[편집]
1944년 붉은 군대의 승리로 불가리아로 돌아온 디미트로프는 1946년 인민 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서기장이 되어 1944년 조국전선 쿠데타로 총리가 된 키몬 게오르기에프(Кимон Георгиев Стоянов)를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4] 이 시기 그는 여전히 소련 시민권자였다.
1946년에 디미트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압력으로 마케도니아의 합병을 목표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미트로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게 접근하여 발칸 사회주의 연맹 창설 프로젝트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시작했다. 1947년, 두 사람은 여러 지역에서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디미트로프 자신이 줄곧 주장했던 소비에트 이념 논쟁에서는 의견이 맞았지만, 1948년 스탈린과 티토가 틀어진 후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점과 같은 해에 디미트로프의 루마니아 방문 때 그가 연방에 참여하라고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지도자들을 설득 하고자 한 대중연설 때문에 이 태도는 동구권 전체의 통제를 원했던 스탈린의 희망에 방해가 되었다. 거기다 티토의 이견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가입 협상과 마케도니아의 할양을 방해했다.
2.4. 최후[편집]
디미트로프는 소련에서 병을 치료받던 도중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했는데, 방사능 치료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독살당했는지의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엠버밍 처리가 되어서 부검을 실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도 전에 재빨리 시신이 화장되어서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엠버밍 처리되어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조성된 영묘[5] 에 안장되었으며 후임 서기장으로는 벌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Вельов Червенков)가, 총리로는 조국전선의 일원이었던 바실 콜라로프(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가 임명되었다.
민주화 이후 유해는 화장되었고, 남아 있던 영묘는 1999년 철거되었다. 1990년 시신이 화장되고 난뒤 남아있는 영묘를 처리하는 문제로 9년 동안 논쟁이 있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을 상징하는 건물이어서 빠르게 철거하려 했지만 그래도 6일만에 완공된 건물치곤 당시 소피아를 대표하는 건물이어서 철거 대신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재활용하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여론조사 결과 소피아 시민의 3분의 2가 철거를 반대했다.
3. 조국전선 강령[6][편집]
[1] 불가리아 공산당의 입장만 반영되었으므로 읽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7, 8, 9, 12번 조항 등에 반접적으로 언급된 소위 탈파시스트화는 단순히 나치즘뿐만 아니라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된 모든 세력을 겨냥했으며 그 정책은 지극히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2] 주범 격으로 체포되었던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는 사형을 판결받고 처형당했다. 이 사건이 나치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증거는 없다. 현대 독일의 공식 입장은 '정신이상자의 단순 방화를 나치가 정치적으로 악용했다'이다.[3] 사실 뤼버를 제외한 피고들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로 할 것을 제안받았으며, 따라서 디미트로프 또한 무죄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4]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1923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1934년에도 즈베노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었었다. 1944년의 조국전선 쿠데타가 그의 마지막 쿠데타. 그래서 그의 별명은 '구 쿠데타 주동자' 였다.거의 불가리아의 피닉제[5] 디미트로프가 사망한 지 6일만에 완공하였다. 그래도 견고하였는지 1999년에 철거할 때 4번의 폭파시도 끝에 비로소 해체되었다.[6] 불가리아 공산당의 입장만 반영되었으므로 읽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7, 8, 9, 12번 조항 등에 반접적으로 언급된 소위 탈파시스트화는 단순히 나치즘뿐만 아니라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된 모든 세력을 겨냥했으며 그 정책은 지극히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7] <통일전선 연구> 250~252쪽에 수록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