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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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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국회(国会, こっかい)는 일본의 입법부로서 의원내각제인 일본의 헌법상 국권의 최고기관(国権の最高機関)이다. 현행 일본의 국회는 양원제이며, 상원은 참의원, 하원은 중의원이라고 한다. 통상적인 양원제 국회처럼 하원(중의원)이 상원(참의원)보다 우월하다. 의사당은 도쿄도 치요다구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이다.
영어로 'The Diet'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일당(日當)'을 뜻하는 Dieta에서 나온 말이다. 이 dieta라는 용어가 영어로 '회의에서 정한 것'을 뜻하는 단어 'diet'가 되었고, 이 단어가 '의회'라는 뜻도 가지며 외국의 의회를 이를 때 쓰는 말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프로이센 왕국의 의회였다. 이후 메이지 유신 때 이와쿠라 사절단이 프로이센의 정치 체제를 배우는 과정에서 'diet'라는 용어도 함께 숙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의회도 'diet'가 된 것이다.
2. 역사[편집]
2.1. 제국의회[편집]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의 문을 연 일본은 사절과 유학생을 보내고 선진 문물을 도입하는 등 서구화를 추진하였으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로 국가의 부강에만 노력하고 인민의 권리 신장은 제한적이었다. 한편 사민평등을 포함한 급격한 사회제도의 변혁으로 실권을 잃은 무사 계급은 신정부의 개혁안에 반발했다. 이들은 서양의 민권운동을 수입하여 메이지 정부를 견제하고자 했고, 이것이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정치운동인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이다. 이 자유민권운동의 대표적인 요구사항이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이었다.
자유민권운동은 급격한 개혁으로 인해 사회가 급변하면서 불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결국 메이지 정부도 이들의 요구 사항을 일정 수준 수용해야 했다. 그 차원에서 제정된 것이 메이지 천황이 수여하는 형식으로 1889년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과 1890년 개원한 제국의회였다.
당시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귀족원은 상원의 역할을 하여 (남자)황족과 공작, 후작의원은 종신직이었고 모두가 귀족원 의원 자격이 있었고 백작, 자작, 남작의원은 자신들끼리 호선해 선출했는데 임기는 7년씩이었다. 그 외에 황족/화족이 아니어도 천황이 칙선으로 의원을 임명할 수 있었다. 중의원은 하원의 역할을 하여 1년 이내에 일본 내지에 거주하며 일정액 이상의 조세를 납부한 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으나, 1925년에 보통선거법을 도입해 25세 이상 일본 국적의 남자 전원[A] 이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피선거권은 30세 이상의 일본 국적자면서 내지에 거주하는 남자 전원[A] 이 가졌는데, 특이하게도 피선거권 재산 제한 철폐가 선거권 재산 제한 철폐보다 먼저 이뤄졌다.(1901년) 조선적이나 대만적 보유자라도 일본 내지에 거주하면 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제국의회가 가졌던 권한은 매우 작았다. 예를 들면 법률공포권은 천황이 가지고 있는데, 천황은 자의적으로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공포하지 않을 수 있었다.(거부권 행사[1] ) 또한 정부가 내놓은 예산안에 대해서도 수정 권한만 있고 예산을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일단 의회에서 입법할 수 있는 분야가 적었고, 정부의 정책을 의회가 막을 만한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제국의회 개설과 함께 내각이 있지만 내각은 천황이 신임해주는 것이지 의회가 신임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은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지금처럼 의원내각제 국가라고는 할 수 없었고, 입헌군주제라 하더라도 천황이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사례가 극히 적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과두제처럼 돌아가는 요소가 많았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중의원 제1당 당수가 총리로 선출되고 내각을 구성하는 등(정당내각) 의원내각제적인 정치가 시행되기 시작하여 국회의 권한이 어느 정도 강해졌으나 1920년대 일본의 민주주의적, 의원내각제적 정치 운영은 헌법과 같은 견고한 제도적 장치로 지지되는 것이 아니었고 기반도 취약했다. 때문에 1930년대 군부 쿠데타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거친 뒤 제국의회는 유명무실해졌다.
아주 권한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원이라 할 수 있는 중의원은 영미의 하원에 비해 여러모로 약한 권한을 가졌지만, '예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군부건 번벌이건 뭘 하려 할 때마다 필살기 예산 안 줄 건데?를 날려대며 뒷목을 잡게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겪으며 사라졌다. 일본 국민들부터가 전쟁을 환호하는 상황에서 선출 의원들은 군부를 견제하는 대신 같이 전쟁을 외치며 거수기로 전락한다.
2.2. 패전 이후[편집]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헌법 개정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제국의회는 일본국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따라 제국의회도 큰 개편이 이루어져, 이름이 국회로 바뀌었다.[2] 귀족원은 폐지되고 참의원이 만들어졌으며, 현재와 같은 완전한 의회제(의원내각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의 권한이 상당히 증대되었다.
3. 구성[편집]
3.1. 참의원[편집]
일본 국회의 상원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3.2. 중의원[편집]
일본 국회의 하원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4. 여담[편집]
- 1938년 3월 24일에 제74회 제국의회 본회의 중 방청객으로 위장한 박관준과 그의 아들 박영창, 교육가 안이숙 세 사람이 일본 제국의 신사참배 강요와 조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항의하며 '국교개종헌의서' (국교를 기독교로 변경해야 한다는 건의문)을 분포했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박관준 장로는 이 사건 이전과 이후에도 평안남도 도지사,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등 정계 인사에게 신사참배 반대, 궁성요배 반대, 종교의 자유 허용, 기독교 국교 인정 등을 피력하다가 일본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8월 8일 광복을 일주일 앞두고 사망하였다.
- 한국어로는 일본의 양원의 이름이 모두 '의원'으로 끝나기 때문인지 '중의원 의원衆議院議員'을 '중의원衆議員'으로 오독하는 사람이 종종 나온다. 심지어 언론까지 오기하는 사례가 가끔 있다.# 미국으로 비유하자면 '버니 샌더스 상원'이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 국회 내부의 질서유지와 소방업무를 위한 인력으로 위시(衛視)가 있다.
- 한국의 국회의원연구단체처럼 의원연맹이 있다. 일본 의원 연맹 목록
- 양원 의장 공저(公邸) 부지는 원래 세습친왕가 간인노미야의 저택 부지[3] 를 사용하고 있는데 위치가 국회의사당과 매우 가까운 편이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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