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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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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윤보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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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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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정당이름비고
1신흥당장이석
2자유민주당송요찬사퇴
3민주공화당박정희당선
4추풍회오재영
5민정당윤보선
6국민의당허정사퇴
7정민회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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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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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정당이름비고
1정의당이세진
2한국독립당전진한
3신민당윤보선
4대중당서민호사퇴
5민중당김준연
6민주공화당박정희당선
7통한당오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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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민당(1971년)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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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윤보선
권한대행
조중서
신민당(1967년)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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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eee,#222><width=33%> 초대
윤보선 ||
||<-3><bgcolor=#fff,#111> ||




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갑)
제2대
박순천
제3·4·5대
윤보선[1]
제5·6대
전진한[2][3]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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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형민
제2대
윤보선
제3·4대
이기붕
제5·6대
김태선
제7대
고재봉
제8대
허정
제9대
임흥순
제10대
장기영
제11대
김상돈
제12대
윤태일
제13대
윤치영
제14대
김현옥
제15대
양택식
제16대
구자춘
제17대
정상천
제18대
박영수
제19대
김성배
제20대
염보현
제21대
김용래
제22대
고건
제23대
박세직
제24대
이해원
제25대
이상배
제26대
김상철
제27대
이원종
제28대
우명규
제29대
최병렬
제30대
조순
제31대
고건
제32대
이명박
제33·34대
오세훈
제35-37대
박원순
제38·39대
오세훈
파일:SEOUL MY SOUL 한글병기.svg
서울특별시장 권한대행경기도 경성부윤





파일:정부상징.svg
파일:산업통상자원부장관.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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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자원부장관 (1993~1994)
초대
김철수

통상산업부장관 (1994~1998)
제2대
박재윤
제3대
안광구
제4대
임창열
제5대
정해주

산업자원부장관 (1998~2008)
초대
박태영
제2대
정덕구
제3대
김영호
제4대
신국환
제5대
장재식
제6대
신국환
제7대
윤진식
제8대
이희범
제9대
정세균
제10대
김영주

지식경제부장관 (2008~2013)
초대
이윤호
제2대
최경환
제3대
최중경
제4대
홍석우

산업통상자원부장관 (2013~현재)
초대
윤상직
제2대
주형환
제3대
백운규
제4대
성윤모
제5대
문승욱
제6대
이창양
제7대
방문규




파일:대한적십자사 엠블럼.svg대한적십자사
역대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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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총재대한적십자회 회장
초대
의양군
제2대
의친왕
제3대
의양군
초대
이희경
제2대
손정도
조선적십자사 총재
초대
김규식
제2대
서재필
대한적십자사 총재
초대
양주삼
제2대
윤보선
제3대
구영숙
제4-6대
손창환
제7-10대
최두선
제11대
김용우
제12-13대
이호
제14대
김용식
제15대
유창순
제16-17대
김상협
제18-19대
강영훈
제20대
정원식
제21대
장충식
제22대
서영훈
제23대
이윤구
제24대
한완상
제25대
이세웅
제26대
유종하
제27대
유중근
제28대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회장
제29대
박경서
제30대
신희영
제31대
김철수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svg대한축구협회
역대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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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승빈
제2대
여운형
제3-4대
고원훈
제5-6대
하경덕
제7대
신익희
제8대
홍성하
제9대
윤보선
제10-11대
홍성하
제12대
장택상
제13대
이종림
제14대
현정주
제15-16대
김명학
제17-18대
김윤기
제19대
장기영
제20대
정문기
제21대
장기영
제22대
김윤기
제23대
장기영
제24대
황엽
제25대
김윤기
제26대
민관식
제27-30대
최치환
제31·32대
장덕진
제33-34대
고태진
제35-37대
김윤하
제38대
박준홍
제39-43대
최순영
제44대
이종환
제45-46대
김우중
제47-50대
정몽준
제51대
조중연
제52-54대
정몽규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결정일수여일이름직책국적비고
1949년8월 15일이승만대통령대한민국
1960년8월 13일윤보선대통령대한민국
1963년12월 5일12월 17일박정희대통령대한민국
1967년6월 23일육영수영부인대한민국
1979년12월 7일최규하대통령대한민국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12월 7일홍기영부인대한민국
1980년8월 29일8월 29일전두환대통령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8월 29일8월 29일이순자영부인대한민국
1988년2월 24일2월 25일노태우대통령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2월 24일2월 25일김옥숙영부인대한민국
1993년2월 11일2월 23일김영삼대통령대한민국
1993년2월 11일2월 23일손명순영부인대한민국
1998년2월 17일2월 25일김대중대통령대한민국
1998년2월 17일2월 25일이희호영부인대한민국
2008년1월 28일노무현대통령대한민국
2008년1월 28일권양숙영부인대한민국
2013년2월 12일이명박대통령대한민국
2013년2월 12일김윤옥영부인대한민국
2013년2월 19일박근혜대통령대한민국
2022년5월 3일문재인대통령대한민국
2022년5월 3일김정숙영부인대한민국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결정일수여일이름직책국적비고
1964년12월 3일12월 8일하인리히 뤼프케대통령서독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12월 3일12월 8일빌헬미네 뤼브케영부인서독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2월 1일2월 7일이스마일 나시루딘국왕말레이시아
1966년2월 1일2월 7일틍쿠 인탄 자하라왕비말레이시아
1966년2월 1일2월 10일푸미폰 아둔야뎃국왕태국
1966년2월 1일2월 10일시리낏 끼띠야콘왕비태국
1966년2월 1일2월 15일장제스총통중화민국
1968년5월 10일5월 18일하일레 셀라시에황제에티오피아
1969년5월 23일5월 27일응우옌반티에우총통남베트남
1969년5월 23일5월 27일응우옌티마이아인제1부인남베트남
1969년10월 28일10월 28일하마니 디오리대통령니제르
1969년10월 28일10월 28일아이샤 디오리영부인니제르
1970년9월 25일9월 28일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대통령엘살바도르
1970년9월 25일9월 28일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영부인엘살바도르
1975년6월 27일7월 5일오마르 봉고대통령가봉
1975년6월 27일7월 5일조세핀 봉고영부인가봉
1979년4월 17일4월 23일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대통령세네갈
1979년4월 17일4월 23일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영부인세네갈
1980년5월 11일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국왕사우디아라비아
1980년5월 14일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국왕쿠웨이트
1981년6월 25일수하르토대통령인도네시아
1981년6월 25일시티 하티나영부인인도네시아
1981년6월 29일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국왕말레이시아
1981년6월 29일틍쿠 아프잔왕비말레이시아
1981년7월 6일페르디난드 마르코스대통령필리핀
1981년7월 6일이멜다 마르코스영부인필리핀
1981년10월 13일로드리고 카라소대통령코스타리카
1981년10월 13일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영부인코스타리카
1982년5월 10일사무엘 도대통령라이베리아
1982년6월 7일모부투 세세 세코대통령자이르
1982년6월 7일보비 라다와영부인자이르
1982년8월 25일압두 디우프대통령세네갈
1982년12월 21일케난 에브렌대통령터키
1983년3월 10일3월 15일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대통령수단
1983년3월 10일3월 15일부띠나 칼릴 압불핫산영부인수단
1983년9월 10일후세인 1세국왕요르단
1983년9월 10일누르왕비요르단
1984년4월 9일하사날 볼키아국왕브루나이
1984년4월 21일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국왕카타르
1984년8월 30일9월 13일다우다 자와라대통령감비아
1984년8월 30일9월 13일치렐 자와라영부인감비아
1985년5월 17일무함마드 지아울하크대통령파키스탄
1985년5월 20일루이스 알베르토 몽헤대통령코스타리카
1986년9월 4일4월 10일엘리자베스 2세국왕영국
1986년9월 4일4월 16일보두앵국왕벨기에
1987년4월 7일아메드 압달라대통령코모로
1988년11월 3일이스칸다르국왕말레이시아
1988년11월 3일자나리아왕비말레이시아
1989년11월 3일11월 20일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대통령서독
1989년11월 3일11월 30일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프랑스
1989년11월 3일11월 30일다니엘 미테랑영부인프랑스
1990년6월 21일안드레스 로드리게스대통령파라과이
1990년11월 5일괸츠 아르파드대통령헝가리
1991년9월 13일아즐란 샤국왕말레이시아
1991년9월 13일투안쿠 바이눈왕비말레이시아
1991년9월 25일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대통령멕시코
1992년8월 13일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대통령과테말라
1993년5월 20일5월 25일피델 라모스대통령필리핀
1993년5월 20일5월 25일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영부인필리핀
1994년11월 7일11월 21일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대통령칠레
1994년12월 5일12월 9일레흐 바웬사대통령폴란드
1995년2월 7일2월 16일이슬람 카리모프대통령우즈베키스탄
1995년2월 21일3월 6일로만 헤어초크대통령독일
1995년3월 28일4월 3일젤류 미테프 젤레프대통령불가리아
1995년6월 26일7월 7일넬슨 만델라대통령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9월 26일9월 29일카를로스 메넴대통령아르헨티나
1996년7월 23일9월 4일알바로 아르수대통령과테말라
1996년7월 23일페르난두 카르도주대통령브라질
1996년10월 8일10월 20일후안 카를로스 1세국왕스페인
1996년10월 8일10월 20일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왕비스페인
1996년11월 26일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국왕말레이시아
1996년12월 10일12월 15일레오니드 쿠치마대통령우크라이나
2000년2월 22일3월 3일카를로 아첼리오 참피대통령이탈리아
2000년2월 22일3월 6일자크 시라크대통령프랑스
2006년3월 12일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대통령알제리
2007년3월 26일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국왕쿠웨이트
2007년3월 28일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국왕카타르
2009년5월 13일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대통령카자흐스탄
2009년11월 12일알란 가르시아대통령페루
2012년5월 30일칼 16세 구스타프국왕스웨덴
2012년11월 21일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대통령아랍에미리트
2018년10월 8일에마뉘엘 마크롱대통령프랑스
2019년하랄 5세국왕노르웨이
2021년6월 14일알렉산더 판데어벨렌대통령오스트리아
2021년6월 16일펠리페 6세국왕스페인
2021년6월 16일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왕비스페인
2021년8월 25일이반 두케대통령콜롬비아
2021년9월 21일보루트 파호르대통령슬로베니아
2023년7월 13일안제이 두다대통령폴란드
2023년11월 21일찰스 3세국왕영국



[1] 5대 임기 중 대통령 당선으로 의원직 사퇴.[2] 전임자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으로 사퇴하면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3] 제6대 총선에서는 종로구 을과 합구되었다.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
尹潽善 | Yun Po-sun
파일:President_PSY.jpg
출생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1]
(現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2]
사망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1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62)
묘소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28-2[3]
재임기간제4대 대통령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4일
서명
파일:윤보선 서명.svg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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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해평 윤씨[1]
부모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李範淑)[2]
형제자매
6남 3녀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남동생 윤완선(尹浣善, 1901 ~ 1970)
여동생 윤예경(尹禮卿, 1905 ~ 2001)
남동생 윤원선(尹源善, 1910 ~ 1971)
남동생 윤한선(尹漢善, 1912 ~ 1972)
여동생 윤의경(尹義卿, 1912 ~ ?)
남동생 윤택선(尹澤善, 1914 ~ 1998)
남동생 윤형선(尹瀅善, 1917~ ?)
여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 ~ 2011)
배우자여흥 민씨[3] (사별)
공덕귀[4] (재혼)
자녀2남 2녀
장녀 윤완구(尹琓求, 1915 ~ 2007)
차녀 윤완희(尹完姬, 1918 ~ 2020)
장남 윤상구(尹商求, 1949 ~)
차남 윤동구(尹同求, 1952 ~)
학력관립교동보통학교 (졸업)
게이오 중학교 (졸업)
세이소쿠 고등학교 (졸업)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 학사)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 석사)
병역해당사항 없음
종교개신교 (예장통합)[5]
신체169cm, 70kg, O형
의원 선수4
의원 대수3, 4, 5(민), 6
약칭[6], PS
경천(敬天)
해위(海葦)[7]

[1] 도제공파 22세손 ○선(善) 항렬이다. ##[2] 1876년 10월 15일 ~ 1969년 6월 18일[3] 1894년 ~ 1937년. 민영환의 6촌 관계인 민영철의 딸이라고 한다.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윤보선과의 사이에서 2명의 딸을 낳았다.[4] 후처이자 영부인인 공덕귀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2명 낳았다.[5] 집 바로 앞에 있는 안동교회(安洞敎會)에 다녔다.[6] 다만 해당 약칭은 20대 대선에서 윤석열이 당선된 이후로는 윤석열을 주로 칭한다.[7] 바다 갈대라는 뜻으로 독립운동가 신규식상하이에서 지어준 호다.

파일:윤보선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4. 평가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어록
8. 각종 타이틀
9. 기타
10. 저서
11. 참고/관련 문헌
12. 관련 단체
13. 대중매체에서
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2. 약력[편집]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보선/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7년(광무 원년) 조선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에서 태어났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떠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6]

1932년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칩거하다가,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신문사를 운영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서울특별시장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맡았다.

1952년 발췌 개헌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4.19 혁명 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7]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8]

이후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제1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정면대결하여 1.5%p 가량 차이로 석패하였고,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다시 야당을 이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를 상대로 다시 대결하였으나 2위에 그친 뒤, 유신정권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고,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80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3.1. 장면 내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면 내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제2공화국이 채 2년도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졌기에 대중에게는 보통 최규하 대통령과 함께 존재감이 미약한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의원내각제 체제 속에서 윤보선 본인은 상징적 국가원수로 옹립된 것이기에 제2공화국의 실권자인 장면 총리에게 인지도도 밀린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빼고 장면국무총리를 넣는 경우가 많다.[9]

긍정적 평가로는 도덕성, 민주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박정희 정권에 맞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5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들어 색깔론을 펼쳤다가 역풍을 맞는 등 공산주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소신을 유지하여 좌익 진영에서는 수시로 윤보선을 공격했고, 윤보선 역시 박정희 정권 때와는 달리 그의 말년에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일각에서는 변절자라고 혹평한다.

기념비적인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내각책임제 하에서 실질적 권력이 적었던 점, 부족한 인지도, 보수적인 성향, 신군부에 호의적이었던 태도 때문에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별로 관심이 없거나 있더라도 평가가 썩 좋지는 않은 편이다.[10]


5. 선거 이력[편집]


연도선거 종류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당선 여부비고
1948제헌 국회의원 선거충남 18[11]
한국민주당

7,069 (14.2%)낙선 (4위)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3[12]

9,485 (32.4%)당선 (1위)초선
1958제4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1(민의원)

22,780 (63.2%)재선
1960제5대 국회의원 선거31,924 (81.9%)3선[13]
제4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208 (79.09%)[14]
1963제5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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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6,614 (45.09%)낙선 (2위)[15]
제6대 국회의원 선거전국구1,870,976 (20.1%)당선 (1번)4선[16]
1967제6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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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6,541 (40.93%)낙선 (2위)
1971제7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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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사퇴[17]

역대 선거 벽보


6. 소속 정당[편집]


소속기간비고

신아동제사

1917 - 1918정계 입문

무소속

1918탈당

신한청년당

1918 - 1922입당

무소속

1922 - 1945탈당

한국국민당

1945창당

한국민주당

1945 - 1949합당[18]


1949 - 1955합당[19]


1955 - 1960합당[20]

무소속

1960 - 1963탈당[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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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1965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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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1966합당[22]
1966탈당[23]
1966 - 1967창당
1967 - 1969합당[24]
1969자진 정당 해산
1969 - 1970정당 재등록
1970 - 1971탈당[25]
1971 - 1972창당
1972 - 1990정당 해산
정계 은퇴
사망


7. 어록[편집]



7.1. 제4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영예의 당선을 얻은 이제 나의 감격이 선서식을 거행하는 오늘에는 영광된 의무감과 무거운 책임감으로 변해졌읍니다.

비록 엄숙해야 할 선서식 전이기는 하나 감격과 책임감이 교착되는 이 순간에 있어 벅차오르는 소회의 일단을 간단히 말씀드리려는 것을 허물치 마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첫째, 나같이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을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회의원제공에게 송구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아울러 올리는 바입니다.

둘째, 내가 사랑하여 마지않는 국민제위에게 방금 정중하게 선서한 바와 같이 국민의 복리를 위해서는 내 신명을 걸기로 했거니와 이제부터는 국민을 위한 정부라기보다도 진실로 국민의 정부이오니 현명하신 국민의 건설적인 비판과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오늘의 난국을 타개할 도리가 없는가 합니다. 오늘날 정치의 책임이 행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인 국민에게도 분담되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셋째, 앞으로 구성되는 정부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정책을 수행해야만하겠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해서라도 먼저 적재적소의 인물본위로 내각의 자세를 갖추고 슬기로운 지혜와 향기로운 인화로써 혼연일체의 행정의 미를 거두어야 하겠읍니다.

거룩한 4월 혁명1개 정당의 집권의 전리품이 아니요 다대수 국민의 민권탈환의 금자탑이요 빈곤해방의 기점이라 할 것인데 오고가는 집권보다는 하나는 둘로 그리고 셋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정당이나 단체보다도 오직 하나밖에 다시 없는 국민과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국가를 위해서 그 모두를 다 바치는 것이 젊은 학도들이 흘린 고귀한 피값을 보상하는 길인가 합니다.

4월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 정부는 이제는 국민이 다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령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경제적 자유에 뿌리를 박지 않는 정치적 자유는 마치 꽃병에 XX꽃 힌 같이 곧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피를 무서워했던 독재는 정명코 물러났기에 오늘 우리의 정치활동은 자유로웠읍니다. 그러나 독재에 따라다니던 경제부패는 아직도 그대로 남았어야 소탕작업도 노정이 요원하고도 험준한 데다가 어제는 탕진될대로 탕진된 나라살림에 누란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읍니다.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 못하는 날에는 한날 내각의 수명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운명이 또한 여기에 달려있다 하겠읍니다.

정부의 시책은 무엇보다도 경제제일주의로 나가야하겠고 현명한 국민에게는 인핍과 절제 그리고 창의와 노력이 요청되는 바입니다. 행정부는 족재가 뿌렸던 반민주성과 부패독소를 조속히 제거하고 민주주의 원치학에서 과감한 혁신행정을 수행해야 하겠읍니다.

자유 진영의 두통거리라는 낙인까지 찍힌 이 정권 외교는 무정견·무정책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세계 우방으로부터 고아취급을 받아왔던 것은 가슴 아팠던 사실입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보아 항상 주변 강대국 사이의 세력관계에 따라 국가 운명이 좌우되게 마령인 처지에다가 설상가상격으로 국내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힘의 진공상태를 빚어낸 까닭에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른 한국의 자태는 우리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북아 국제평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을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국민경제에 직결되는 외교행정면에 까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적 특징을 발휘하여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 독재적 정책을 합리화하고 국내의 불평불만을 외우로 돌려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낡은 방법만을 상요했던 기만적 외교로 일관하여 왔읍니다.

외교란 원래 협상과 거래를 사명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한 국가의 실질적 이익을 중심으로 타국과의 대립되는 이익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외교라 하겠읍니다. 우리는 새로운 외교정책과 새로운 외교체제를 갖추어 새로운 외교활동으로 재출발해야 하겠읍니다. 이외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 너무도 많습니다만, 오늘은 간단히 인사 말씀으로 대신하겠읍니다.

1960년 8월 13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



8. 각종 타이틀[편집]


  • 최장수 대통령, 연령이 검증이 되는 한국사 지도자들 중 두번째로 장수한 인물(향년 92세)[26]
  • 유일하게 기념우표에 새겨지지 않은 대통령.[27]
  • 유일한 충청도 출신 대통령.
  • 유일한 상징적 국가원수[28]
  • 유일한 의원내각제 대통령
  •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29]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한 영국 대학교 출신.
  • 역대 대통령 중 최고 순위의 대학교 학사 출신 (에든버러 대학교[30][31]).
  • 최초의 광역자치단체장(서울시장)[32]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국무위원(상공부장관) 출신 대통령
  • 유일하게 대통령 퇴임 후에도 현역 정치인으로 계속 활동한 대통령[33][34][35]
  • 최초이자 김대중과 함께 둘뿐인, 사별 이후 재혼 경험이 있는 대통령[36]
  • 유일하게 조선시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 임시정부, 제1공화국~제6공화국을 모두 체험한 대통령
  • 이승만과 함께 둘 뿐인 19세기에 출생한 대통령
  • 처음으로 사후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지 않은 대통령.[37]

9. 기타[편집]


  •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쓴 글씨 중에서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이며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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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휘호 중 하나인 민주구국

  •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다. YS와 DJ의 대결구도는 사실상 윤보선과 장면[38] 세력, 즉 신구파의 갈등에서 기원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김영삼이 정계에 뛰어들게 한 '정치적 아버지'는 6.25 전쟁 때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이며, 이후 조병옥을 거쳐 유진산의 정치적 적자가 되었다. 윤보선과 친해져 민주당 구파의 후계자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나, 윤보선보다는 유진산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 YS가 장면과는 초면부터 확실히 선을 그은 것은 맞다.

  • 1980년대 들어서 민주화운동에서 멀어지고, 군사정권에 협조적인 태도로 돌아서면서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39]의 일원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다른 3명과 마찬가지로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 성향이 큰 영향을 끼쳤을 꺼라는 추측이 많다.

  • 대한민국 정부수립 극초창기에 아주 잠깐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초대 김형민에 이어 제2대 서울특별시장이다.


  • 직계 가족으로는 배우자 2명(전처 여흥 민씨[40], 후처 공덕귀)와 2남 2녀가 있다. 이중 딸들은 여흥 민씨와의 사이에서, 아들들은 공덕귀와의 사이에서 제각기 태어난 자녀들이다.


  • 음악인 겸 방송인인 남궁연이 윤보선의 외손자라는 설이 한때 나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남궁연은 윤보선의 동생인 윤완선의 외손자이다. 고로 남궁연에게는 윤보선이 외종조부(外從祖父)가 된다.

  •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고택은 고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며,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야외 음악연주를 비롯한 문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 사망 5개월 전인 1990년 2월 9일 집에 도둑이 들어 골동품 9000만원어치를 도난당하는 일을 겪었다.#


  • 윤보선 전 대통령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41]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42]를 경험한 유일한 대통령이다.[43]

  • 동안으로 보인다. 1950년도 초반에서 1970년도 초반의 정치 인생 중 그의 얼굴을 보면 절대 60대 ~ 70대로 보이지 않는다.[44]

  • 출생년도가 19세기인 마지막 대통령이다.

  • 그의 퇴임 이후 60년 만에 윤씨 대통령이 두번째로 나오게 됐다. 따라서 각종 정치 커뮤니티에서는 노태우를 원조 노짱 혹은 1대 노짱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 처럼 윤보선을 원조 윤카, 1대 윤카라는 식으로 간혹 부르기도 한다.[45]


10. 저서[편집]


  • 구국의 가시밭길: 나의 회고록 - 한국정경사. 1967.
  • 외로운 선택의 나날: 윤보선 회고록 - 동아일보사. 1991. 2012년 해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가 복간했다.


11. 참고/관련 문헌[편집]


  • 해위 윤보선: 생애와 사상 - 김명구 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1.


12. 관련 단체[편집]




1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9년 KBS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선 배우 원근희가 연기했다.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과 1993년 제3공화국,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1998년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 배우 이순재가 윤보선 역할을 4번 소화하였다. 특히 제2공화국의 경우 윤보선의 생전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소감을 물으니 '연기를 점잖게 잘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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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4월 17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최명수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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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둘러보기[편집]









[1] 당시에는 아산만에 접한 천안의 월경지였다. 위키문헌의 광무 10년(1906년) 칙령 제49호, 지방 구역 정리 건[2] 아산시 둔포면에서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길도 "해위길"이라고 명명되었다.[3] 도로명주소 미발급.[4] 평소에는 한글이나 한자 서명이 아닌 영어 서명을 썼는데, Posun Yun의 앞글자만 따서 P.S.Y라고 사인을 했다. 19세기에 태어난 인물임을 감안하면 특이한 점. 다만 법안공포문서 서명에는 尹潽善으로 서명하였다.[5] 신규식이 1912년 설립.[6] 참고로 스코틀랜드 대학의 MA 학위는 학사 학위이다.[7] 내각제 특성상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무게가 실려 있었다.[8] 처음에는 헌법기관이 사라진다는 이유로 군부 세력과 미군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야를 말렸지만,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처럼 되다가 기성 정치인의 출마를 금지한 민정이양 계획 발표에 따라 1년 뒤 하야를 사실상 강요 당했다.[9] 하지만 민주당 구파, 신파의 대립 속에서 민주당 구파의 대표격이였던 윤보선이 정치적 영향력이 없을 리가 없었으며, 윤보선 본인도 상징적 국가원수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 했기 때문에 흔하게 생각하는 얼굴마담격 허수아비 수준의 위치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10] 같은 민주당 구파인 신익희민주당계 정당의 아버지 대우를 받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평가가 박한 편. 근데 그건 당직자들 한정이고, 일반 민주당 지지자들은 신익희도 너무 옛날 사람이라서 별로 관심 없다. 사실상 중시조를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보는 편.(오히려 인지도가 충분하면서도 평가가 미묘하게 갈리는 인물이 3당 합당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전 대통령.)[11] 현재의 충남 아산시 일대.[12] 서울 종로구 갑[13] 1960.8.12. 사퇴.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14] 의원 내각제 의회에서의 간접 선거.
1962.3.24. 대통령 하야.
[15] 역대 직선제 대선 중 1위 후보와의 득표수 최저 격차. (15만 6026표)[16] 1965.8.5.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17] 정확히는 출마 선언은 하였지만 박기출 후보에게 양보하는 모양새로 결론이 났고 최종 후보로 박기출 후보가 등록이 됐으니 공식적으로 후보 등록 후에 사퇴를 한 것은 아니다.[18] 조선민족당과 신설 합당.[19] 대한국민당과 신설 합당.[20] 민주당에 흡수 합당.[21] 대통령 취임으로 인한 탈당.[22] 민주당과 신설 합당.[23] 당내 노선 차이.[24] 민중당과 신설 합당.[25] 당내 노선 차이.[26] 연령이 확실히 검증되는 인물 중 윤보선보다 장수한 한국사의 지도자는 고구려장수왕이 유일하다.[27]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표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취임기념우표에 쓸 사진을 제공하지 않았고 결국 4대 대통령 취임기념우표 대신에 새정부수립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28] 다만 윤보선 직전에 곽상훈 민의원의장, 허정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백낙준 참의원의장이 잠시나마 의원내각제 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적은 있다. 이때는 허정 총리가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대행도 상징적 국가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곽 의장과 백 의장 사이에 잠시 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낼 허정 총리는 상징적 국가원수이면서도 동시에 실질적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도 동시에 갖고 있어 두 권력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을 국가로 본다면 한반도 최초로는 북한이 먼저 김두봉, 최용건상징적 국가원수로 둔 적이 있다. 김일성이 국가주석이 되어 폐지되었으나, 김일성 사후 다시 김영남상징적 국가원수로 두다가 현재는 완전 폐지된 상태다. 더 앞서서는 대한제국 시기에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한 바 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9] 단, 헌법에 따라 임기 중에는 무소속이었다.[30] 에든버러 대학교옥스브리지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는 학교이다. 또한 옥스퍼드대학교에도 입학한 기록이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옥스퍼드대에서 에든버러대학교로 학적을 옮겼다. 당대든 지금이든 옥스퍼드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특별한 계기가 있던 듯 하다.[31]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출신인 이승만서울대학교 학사 출신인 김영삼, 윤석열 등 또한 후보이다.[32] 윤보선이 서울시장을 할 때는 관선이었고,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 출신은 이명박이다.[33] 대통령 사임 후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5대 대선, 6대 대선에도 도전했다.[34] 사실 어떻게 보면 윤보선이 유일한 게 당연하다. 윤보선은 역대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상징적 대통령이었고 임기도 짧았기 때문에 하야 후에도 정치를 계속할 틈이 있었다. 전임자 이승만4.19로 하야하고 하와이에서 은둔하다가 죽어서야 고국에 돌아왔고 하야할 당시 85세의 고령이라 더 하기도 힘든 나이었으며, 후임자 박정희소원대로 종신 대통령을 했다. 최규하는 원래부터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평범한 외교관 출신이었으나 국무총리 재임기와 10.26이 겹치면서 우연히 대통령이 된 케이스라 임기기간동안 대통령보다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고있었으며 5.17 내란으로 하야한 후에도 정치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퇴임이후 권력행사를 시도했다가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를가고 이후 노태우가 퇴임한 이후 김영삼에 의해 사이좋게 손잡고 감방에 들어갔다. 김영삼김대중은 각각 70세, 79세의 고령이라 퇴임 후에도 정치를 할 여력이 없었다. 노무현, 이명박은 임기 말에 레임덕에 걸려 퇴임 후 말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전자는 실제로 총선 재출마를 고려했으나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후자는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박근혜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며 문재인 역시 70세를 바라보는 고령인데다가 본인부터 남은 생을 조용히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지언정 다시 직접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윤석열 의 경우 대통령이 되기 이전 정치경험이 없어 퇴임 후 정치활동을 할 여지는 있으나 현재의 낮은 지지율로 볼때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35] 반면 영국과 일본 같은 의원내각제 국가의 경우 총리 임기를 마치고서도 계속 현역 의원직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보리스 존슨 의 경우가 있다.[36] 이승만과 박정희는 이혼 이후 재혼이다.[37] 윤보선보다 먼저 사망한 이승만, 박정희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으며 윤보선 이후 사망한 대통령 중 최규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김대중, 김영삼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으며 노무현은 김해 봉하마을의 사저 인근에 안장했다. 노태우는 파주시 동화공원묘역에 안장하였으며 전두환은 자택에 안치하고 있다.[38]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39]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용.[40] 민영철(閔泳喆)의 딸이다. 본명은 불명.[41] 그가 태어난지 50일도 되지 않아 대한제국이 성립했다.[42]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1공, 2공, 3공, 4공, 5공, 6공.[43]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허정 전 총리도 조선시대에 태어나 6공까지 생존했다. 그래서 허 총리의 별명이 國老일 정도.[44] 더군다나 그 당시엔 지금과 비교하면 나이에 비해 훨씬 들어보였다는 걸 가정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45] 이 외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윤석열의 부친이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이라, 본인이 충청권 출신인 윤보선과 함께 둘 다 충청권에 연고가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