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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범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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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1989. 9. 20. | 정규 2집
1991. 2. 20. | 정규 3집
1992. 3. 20. | 정규 4집
1994. 6.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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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1집
1993. 3. 2. | 커버 2집
1995. 3. 1. | | |
- [ 사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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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1996. 8. 13. | 라이브
1996. 8. 13. | 대표곡
2001. 4. 1. | 리메이크
2016. 12. 7. |
김광석 金光石 | Kim Kwang Seok[1] 여권에 표기된 정식 영어 표기. # 그의 미국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에서는 'Kim Kwang Suk'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음악 행보와 김광석거리를 주제로 다른 논문들의 표제의 영어 표기에는 'Seok'과 'Suk'이 혼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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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4년 1월 22일 |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2]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특별시로 올라갔기에, 사실상의 출신지는 서울특별시이다. 그의 주민등록번호(640122-1001817)의 지역 란에는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00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1968년 말부터 전 국민에게 순차적으로 부여되었고,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될 당시에는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00이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봉덕동] 그의 친형인 김광복씨는 김광석의 출생지이자, 생가를 남구 봉덕동 구 남도극장네거리 일대로 증언하고 있다. 4남매는 모두 범어동 본가에서 태어났고, 막내인 김광석은 봉덕동에 있었던 번개전업사로 이사온 뒤 태어났다고. # 번개전업사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
사망 | 1996년 1월 6일[3] 빈소는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되었고, 1월 8일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었다. (향년 31세/28주기)[4] 현재 김광석의 음반 등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With33엔터테인먼트'인데, 이는 김광석이 사망할 당시의 세는나이였던 33세에서 따온 것이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세는 나이로 61세, 만 나이로 60세로, 2024년에 환갑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5] 아내인 서해순이 발견 후 30분 뒤에 신고해, 1시간 후인 새벽 4시 30분에야 병원에 도착하는 바람에 (심정지가 일어나고 4분 뒤부터 뇌에 손상이 가기 시작한다.) 서교동 자택에서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의료법상 사망 판정은 의사만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망 장소는 세브란스병원으로 본다. |
불완전 의사[6] 신체의 일부가 지상 또는 주위의 물체에 지지되어 체중의 일부만이 목을 조여 질식사한 것을 의미. |
거주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7길 39 원음빌딩[7] 본인 소유의 건물이었다. 1994년 10월 14일에 전입. 202호에는 팬클럽인 '둥근소리'가 들어와 있었고, 403호에는 본인의 자택이 있었다. - [ 이전 거주지 ]
|
장지 |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산[8] 2003년에 유골과 사리가 뿌려졌다.# 위치는 불명. 유골이 산속에 뿌려진 관계로 추모 관련 행사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청광사에서 진행한다.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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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싱어송라이터 |
본관 | 김해 김씨[9] |
데뷔 | 1984년 5월 31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데뷔로부터 D14638일, 40주년) |
서명 | |
링크 | 파일:대봉문화마을협의회 마크.jp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obj-sg.the1.wiki/svgs/d/3d/9d/9f0f2968a6fde3e720a2167bf58e078104e0720dcdc92077fa092fb2e6fbe68a.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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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범어동 268 (現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로18길 22 힐스테이트 범어)[1] 1912년 당시 지적원도 참고. 힐스테이트 범어 101, 102동과 경신고등학교(대구) 건물 일대로 추정된다.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 354-10 (現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동안로 283 평촌 자이 퍼스니티)[2] 결혼 이후부터 1994년 10월 13일까지 거주하였던 뉴타운삼호아파트의 주소. 공교롭게도 본적지 두곳 다 재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망진단서] 사망진단서에 적힌 본적지. 분가 등으로 본적지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 신체 | 164cm[3] 콘서트 중에 본인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밝혔다. , 58kg | 학력 | 서울창신국민학교 (전학) 대구동덕국민학교 (전학)[4] 이미 6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대봉동 본가에 계신 조부모의 건강 문제로 누나와 함께 1년 간 대구에서 보내다가 다시 서울로 간다. # 서울창신국민학교 (졸업) 경희중학교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상학부 (경영학 82 / 학사) | 가족관계 | 아버지 김수영(1920년대 ~ 2004년 10월 8일)[5] 6.25 전쟁 참전용사로 1953년 12월 28일 국방부장관 명의의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제8보병사단에서 육군 대위로 복무했다. 아내 이달지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병2묘역에 안장되었다. 어머니 이달지(1930년 9월 23일 ~ 2016년 4월 1일)[6]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리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출신으로, 김광석이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생가에서 2013년까지 살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남편 김수영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병2묘역에 안장되었다. 아내 서해순(1965년 9월 14일 ~ )[7] With33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김광석이 사망했던 그해 나이(세는나이로 33살)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외동딸 김서연(1991년 5월 30일 ~ 2007년 12월 23일 / 향년 16세)[8] 개명 전 본명은 김서우였으며 자폐성 장애가 있었던 고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9] 전에는 미국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7년 12월 23일에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자택에서 의식불명으로 발견되어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0] 납골함에 성도라는 글자와 크리스천을 뜻하는 십자가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종교인인 부친과는 달리, 크리스천이었던 듯하다. 큰누나 김광나 작은누나 김광득 큰형 김광동(1950년대 중반 ~ 1980년 10월 3일)[11] 사망 당시 최종 계급은 대위. 군복무 중 사고로 1980년에 순직했다고 김광석이 생전 언급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결혼을 이십 일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28사단에 마지막으로 근무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되어있다. 제29묘역 2행 39열에 안장. 둘째형 김광복(1959 ~ )[12] 김광석의 가족을 대표해서 서해순을 고소하러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다. | 병역 | 대한민국 육군 이병 소집해제 (방위병)[13] 큰형 김광동씨의 사망으로 구 병역법 제54조 1항의 4(부 또는 형제중 전사ㆍ순직자가 있는 경우)에 따른 방위병 복무. | 종교 | 개신교(예장통합)[14] 대광고등학교가 개신교계 고등학교였던지라 교회에 다녔었다고 한다. 동대문 동신교회에 출석했으며, 조영남의 교회 후배였다고. → 무종교[15] 흔히 불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종교가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다만, '둥근 소리'라는 뜻의 원음(圓音)이라는 불교 법명을 받은 적이 있으며, 불교방송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 사망 당시 위패도 수안사에 안치되는 등 불교계와의 교류가 잦았다. (법명: 원음)[16] 원음이라는 법명은 불교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활동에 참가한 인연으로 법정스님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본인은 생전 이 법명을 매우 마음에 들어해 본인의 자택 이름을 '원음빌딩'이라 짓고, 팬클럽 이름도 원음을 직역한 '둥근소리'로 짓기도 하였다. | 퍼스널 컬러 | 수박색 (#435F4E)
고동색 (#996633) | 별명 | 가객(歌客), 노래하는 시인, 숏다리(휜다리)[17] 본인의 공연 진행 중 밝힌 내용. 아는 지인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보고, 40살때에(7년 뒤라는 언급으로 보아 공연의 연도가 1995년인걸로 보인다.)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다리가 닿겠니?'라고 걱정을 했다고. 다행히 충무로 매장에서 시승한 결과, 닿긴 닿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 반쪽, 작은 돌, 또해[18] 공연을 계속 하여 '또 해?'라는 별명이 붙었다. 문화방송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려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또해 왔다"고 말해 그 별명을 알게 되었다고. 그러나 김광석 본인은 '해'라고 불러주길 원했다고 한다. , 아저씨(형)[19] 김광석의 팬들과 그와 친했던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사후에 친근한 이미지였던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붙은 호칭은 아니고,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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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학창 시절부터 음악 활동 초반까지 (1964 - 1988)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김광석, 1995년 9월 『월간 샘터』 인터뷰 中 |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흔히 알려져 있는 별명은 '가객(歌客)'. 진정성 있고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많은 명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로, 대한민국에
포크송 붐을 일으켰던 전설적인 가수이며,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해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다.
[10] 또한 포크 음악을 리메이크한 다시 부르기 1과 다시 부르기 2 음반을 발매, 큰 인기를 끌며 한국 음악계에 '리메이크' 열풍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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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미공개 연습 영상[11] 김광석 생전에 촬영된 영상 중 유일하게 김광석의 집 내부와 가족들의 모습이 나온 영상이다. |
[12] 위에서 세 번째의 얼굴은 그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이기도 하며, 다시 부르기 2의 앨범 커버에도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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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고리'를 운영하고 있는 김광석 (1987년 5월 25일) |
2.1. 학창 시절부터 음악 활동 초반까지 (1964 - 1988)[편집]
김광석 본인이 '렛츠' 1995년 12월호에 기고한 글과, 잡지 '샘터'에서 김광석과 인터뷰한 글, 책 '김광석 평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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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대광고등학교 학생증[13] 본적인 대구시가 별도의 광역자치단체가 아닌 경상북도 소속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구직할시로 승격되고 범어동이 수성구에 편입되는 것은 그의 학생증이 발급되고 4개월 뒤인 1981년 7월에 이루어진다. |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
[봉덕동] 그의 친형인 김광복씨는 김광석의 출생지이자, 생가를 남구 봉덕동 구 남도극장네거리 일대로 증언하고 있다. 4남매는 모두 범어동 본가에서 태어났고, 막내인 김광석은 봉덕동에 있었던 번개전업사로 이사온 뒤 태어났다고. #
에서 김광석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김수영씨는
대구사범대학 출신의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 되는 교원노조를 결성하는 데 동참하여 대구지부장과 교원노조 회지의 집필자로 활동하는 등 교원노조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교단에서 추방당했고, 집안사람이 운영하는 전당포에서 일하다가
[14] 이때 어떤 사람에게 받은 회중시계에서 북한의 선전 유인물이 발견되어 간첩으로 의심받는 등 큰 곤혹을 치렀었다고 한다. 당시 반공 정서가 극심했던 것도 있었고, 거기에 교원노조 활동 이력이 있었기에 어떤 죄목이 만들어져서 남산으로 갈 지 몰랐기에, 결국 다시 입대해서 대위까지 복무했다.
시장에 전업사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업사는 장사가 잘 되어가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서울로 가야 더 사업이 탄탄해질 것이라 믿고 김광석이 5살이 되던 해
장충단공원 인근인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를 갔고
[15],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72년에 옆 동네인
창신동으로 옮겨간다.
[16] 김광석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1973년, 범어동 본가에 계신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광석과 그의 누나는 다시 대구로 내려가 1년여간을 보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17] 원래는 대구 사투리를 썼던 것으로 보이나, 사투리로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본인의 회고로 보아 스스로 말투를 고친 것으로 보인다. 표준어를 구사한 김광석과는 달리, 그의 가족들은 사투리 억양이 약간 묻어나는 말투를 구사한다.
경희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특별활동으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18] 1992년 6월 13일, 충남 예산에서 책마당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초청공연에서 안치환과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는데, 안치환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를 때 김광석은 바이올린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연주한다.(#)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혔고,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성가대와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이후 김광석을 눈여겨본 교사가
음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가족들도 반대를 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관심분야와는 거리가 먼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오히려
"안기부, 보안사 다니는(= 자주 불려가는) 사람들은 가끔 사람 구실을 못 해서 문제다"라며
정부의 공포정치를 합리화하는 모습도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득권 세력들이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부린 횡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고교 때 진실이라고 배웠던 것들 가운데 진실이 아닌 것도 많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하나 둘 깨달으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데모 대열에 합류해 구호도 외쳐봤지만,
운동권은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삶의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친구에게 '젊은 예수'라는 노래책
[19] 중간중간 시도 적혀 있고,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을 받게 되고, 그 노래책에 있는 노래들을 살피다 그가 생각하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또다른 현실을 다룬 노래를 찾게 된다.
[20]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룬 노래였다. 김광석 본인의 회고로는 이때까지 돈이 생기면 맨날 친구들이랑 술만 마시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 노래를 보고 다른 노래들도 찾아보며 본인 왈
'라디오에서 나오던 사랑 노래들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대학연합 노래패 서클인 '연합메아리'에 가입해 첫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해인 1982년 9월, 그는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에 있는 '코스모스 코러스'라는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도
신촌과
이대 앞 등지를 떠돌며 밤무대에 섰다. 라이브 카페의 아르바이트와 대학 노래패 활동을 이어가던
1983년 2학기, 기어코 명지대학교로부터
학사경고를 받게 됐고, 가족들의 반대는 더욱 심해져 갔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사주며 그의 음악 활동을 가장 많이 지원해준 형 김광복은 그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질책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21] 사실 김광복은 김광석이 음악을 취미생활로만 즐기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런 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무대나 돌다가 대학에서 경고까지 받았다.
학사경고로 대학 생활에 위기가 닥치자, 군 입대를 결심하고 휴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여름, 대학 노래패 '연합메아리'에 초기 멤버로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민기와 함께 그의 동요 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민기의 작품
[22] 과거 발표한 아침 이슬이라는 곡이 학생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 컸다.
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탈락했고, 김민기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벽'이라는 노래패와 음반의 기획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음반은 훗날
노찾사 1집이 된다.
1985년 1월, 김광석은 6개월 단기 사병으로 군 복무를 했고, 1986년에는 제대를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무교동과 대학교는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라이브 무대를 주무대로 삼던 선배들은 방송으로, 친구들은 군 복무 중이거나 각자의 길을 찾아서 떠난 상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부모님은 가수라는 직업을 '딴따라'라고 여기며
[23] 특히 아버지가 자신의 사촌이 음악판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반대했다고 한다.
좀 더 평범한 직업을 가지길 바랬다. 그러나 형 김광복은 달랐다. 동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김광석이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마련하라는 의미로
고려대학교 앞에 '고리'라는 카페를 차려주었다.
[24] 이름은 김광석 본인이 직접 지었는데, 이 카페가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길 바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복학과 함께 노래패 '새벽'의 활동을 재개한 김광석은 1987년 10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 공연에서
'녹두꽃'[25]과
'이 산하에'를 불러 매우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집회 현장에서, 그리고 선거 유세
[26]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불렀다.
에서 단골 가수로 불러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가수로서의 활동은 노찾사의 두 번째 공연으로 마무리했다.
한편, 김광석과 신촌 등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는 6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그때까지 만들어놓았던 노래를 녹음해보자는 친구 유준열의 제안으로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만들어 친구들끼리 기념품 삼아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테이프를 듣고 김광석을 포함한 7명을 불러
진짜 음반을 내자고 했다. 그는 다름아닌
산울림의 리더인
김창완. '김창완과 꾸러기'에서 같이 활동하던 멤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음반은 제작에 들어갔고, 테이프에 있던 30개의 곡 중 11개가 추려져 마침내 '
동물원'이라는 음반이 발매되었다. 친구들과 재미로 녹음하던 음악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대생만 공략해도 괜찮겠다', '이런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음반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매우 잘 팔렸다. 그리고 동물원의 성공은 김광석이 노찾사에서 나와 보다 대중적인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김광석은 음악에 대한 생각 차이로
[27] 친구들은 아마추어이길 원했으나, 김광석은 이미 음악을 직업으로 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
동물원 2집까지만 활동하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김광석 1을 발매하게 된다.
2.2. 솔로 활동 (1989 - 1996)[편집]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 김광석, 「나의 노래」중
|
음악 프로그램 '쇼특급'에 출연한 김광석 (1988년 12월 4일)[28] |
1989년 동물원을 나온 김광석은 '
기다려줘', '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 서해순과 결혼하게 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1년 10월 14일부터 1995년까지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1992년 김광석은 '
나의 노래'와 '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한 달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
다시 부르기 1'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
일어나' 등 그를 대표하는 여러 곡이 실린
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
[29]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70년대의 대표 저항 포크가수로 유명했던 가수이다. 2021년 12월 24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
다시 부르기 2'를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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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회 기념 공연 포스터[30] 오랜 친구이자 학전 동료인 이창우가 만든 포스터 |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11일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31] 실제로 그의 공연 기록을 보면, 최소 1달에 한 번 이상은 하였고, 1달 내내 하기도 하였다.
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 60대 노부부들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 18일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1월 23일부터 11월 24일까지는
뉴욕 맨해튼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후, 그의 마지막 7시간 30분
[32] 1996년 1월 5일 오후 8시 ~ 1996년 1월 6일 오전 3시 30분
은 사망 문서에서 후술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obj-kr.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obj-sg.the1.wiki/d/2a/c3/2af8a3cde73220d4d2ce2a2d6cd7ab6096df203a6cf8021431522ae01d6c0ecb.png)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의문사 음모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정말 힘들다.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돈을 버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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