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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인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이완용(187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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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정대신 (1905~1907)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1907~1910) | 제20대 민영규 | 제21대 조병호 | 제22대 이완용 |
|
지도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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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62861> 의장1 || ||<width=20%>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width=20%> 제2대 미즈노 렌타로 ||<width=20%>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width=20%> 제4대 시모오카 주지 ||<width=20%>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 || 제6대 이케가미 시로 || 제7대 고다마 히데오 ||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 제11대 엔도 류사쿠 || ||<-5><bgcolor=#062861> 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제5대 윤덕영 || || 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5> - [ 1920 ]
고문 | 고희경 | 권중현 | 민병석 | 민영기 | 박영효 | 송병준 | 이하영 | 윤덕영 | 이윤용 | 부찬의 | 김현수 | 칙임 참의 | 김영진 | 김영한 | 김한목 | 남규희 | 민상호 | 민영찬 | 민형식 | 박승봉 | 박이양 | 박기양 | 박상준 | 박승봉 | 박의병 | 박제빈 | 박중양 | 백인기 | 상호 | 서상훈 | 신석린 | 신응희 | 어윤적 | 엄준원 | 염중모 | 유맹 | 유성준 | 유정수 | 유혁로 | 이건춘 | 이겸제 | 정진홍 | 조민희 | 조진태 | 조영희 | 조희문 | 한상룡 | 한진창 | 주임 참의 | 강병옥 | 고원훈 | 권태환 | 김갑순 | 김교성 | 김기태 | 김명규 | 김명준 | 김상설 | 김상섭 | 김연상 | 김영무 | 김정태 | 김준용 | 김창한 | 김필희 | 김현수 | 나수연 | 노창안 | 박경석 | 민건식 | 민영은 | 박기동 | 박기순 | 박봉주 | 박이양 | 박제환 | 박종렬 | 박흥규 | 박희양 | 방인혁 | 서병조 | 선우순 | 송종헌 | 송지헌 | 신석우 | 신태유 | 신창휴 | 심준택 | 심환진 | 안병길 | 양재홍 | 오재풍 | 오태환 | 원덕상 | 유기호 | 유빈겸 | 유익환 | 유흥세 | 윤치소 | 이강원 | 이근우 | 이기승 | 이도익 | 이동우 | 이만규 | 이병렬 | 이병학 | 이택규 | 이택현 | 이항직 | 이흥재 | 이희덕 | 장대익 | 장도 | 장상철 | 장응상 | 장직상 | 장인원 | 전석영 | 정동식 | 정란교 | 정병조 | 정순현 | 정재학 | 정태균 | 정호봉 | 조병건 | 천장욱 | 최석하 | 피성호 | 한영원 | 한상봉 | 한창동 | 허명훈 | 홍성연 | 현은 | 참의 | 구연수 | 김윤정 | 김춘희 | 김한목 | 김희작 | 남규희 | 민병석 | 박기순 | 원응상 | 윤갑병 | 윤정현 | 장헌식 | 정건유 | 현기봉 |
- [ 1930 ]
고문 | 민병석 | 윤덕영 | 이윤용 | 칙임 참의 | 고원훈 | 김관현 | 김명준 | 김서규 | 김영진 | 김윤정 | 남궁영 | 민상호† | 박두영 | 박상준 | 박영철 | 박용구 | 박중양 | 서상훈 | 신석린 | 어담 | 엄준원 | 염중모 | 유정수 | 유진순 | 유혁로 | 윤갑병 | 이겸제 | 이범익 | 이진호 | 장헌식 | 정교원 | 조경하 | 조성근 | 조희문 | 주영환 | 최린 | 한규복 | 한상룡 | 한진창 | 홍종국 | 주임 참의 | 강동희 | 강번 | 고일청 | 김경진 | 김기수 | 김기홍 | 김도현 | 김두찬 | 김병규 | 김사연 | 김상설 | 김상형 | 김상회 | 김신석 | 김영택 | 김정석 | 김정호 | 김종흡 | 김진수 | 김창수 | 김한규 | 김한목 | 김한승 | 남백우 | 노영환 | 문종구 | 민병덕 | 박기석 | 박종렬 | 박보양 | 박봉진 | 박철희 | 박희옥 | 방의석 | 방태영 | 서병조 | 서병주 | 석명선 | 선우순 | 성원경 | 손재하 | 손조봉 | 송지헌 | 신희련 | 안종철 | 오세호 | 오태환 | 원덕상 | 유승흠 | 유태설 | 이경식 | 이교식 | 이근수 | 이근우 | 이기찬 | 이기승 | 이동우 | 이명구 | 이방협 | 이승우 | 이병렬 | 이선호 | 이은우 | 이종섭 | 이충건 | 이진호 | 이택규 | 이희덕 | 이희적 | 인창환 | 장대익 | 장석원 | 장직상 | 장헌근 | 정관조 | 정란교 | 정대현 | 정석모 | 정석용 | 정해붕 | 조병상 | 주영환 | 지희열 | 최남선 | 최양호 | 최연국 | 최윤 | 최윤주 | 최준집 | 최지환 | 최창조 | 하준석 | 한영원 | 현준호 | 현헌 | 홍치업 | 황종국 | 참의 | 강필성 | 김병원 | 김성규 | 김제하 | 박상준 | 어윤적 | 유만겸 | 유성준 | 진희규 | 홍정철 |
- [ 1940 ]
고문 | 김윤정 | 박중양 | 윤치호 | 이범익 | 이진호 | 한상룡 | 칙임 참의 | 고원훈 | 김관현 | 김명준 | 김사연 | 김연수 | 김영배 | 김영진 | 김우영 | 김윤정 | 김태석 | 김화준 | 박두영 | 박상준 | 서상훈 | 신석린 | 안종철 | 원덕상 | 유만겸 | 유진순 | 이겸제 | 이경식 | 이계한 | 이병길 | 이원보 | 장직상 | 장헌식 | 정교원 | 정란교† | 정연기 | 진학문 | 최린 | 한규복 | 주임 참의 | 강이황 | 권중식 | 김경진 | 김동준 | 김병욱 | 김부원 | 김사연 | 김신석 | 김원근 | 김재환 | 김태집 | 노준영 | 민재기 | 박지근 | 박창하 | 박필병 | 방의석 | 서병조 | 손창식 | 송문화 | 신현구 | 양재창 | 원병희 | 위정학 | 이경식 | 이기찬 | 이승우 | 이신용 | 이영찬 | 이익화 | 이종덕 | 임창수 | 장용관 | 장윤식 | 장준영 | 장직상 | 전덕룡 | 조병상 | 조상옥 | 차남진 | 최윤 | 최승렬 | 최정묵 | 최준집 | 한익교 | 한정석 | 현준호 | 황종국 | 참의 | 김하섭 | 문명기 | 이승구 |
|| ||<-5>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
|
|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대한제국 제22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李完用[1] 창씨개명으로 등록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성인 '이(李)'를 리노이에(李家)로 바꾸었다. 또 이름인 '완용(完用)'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었다. | Ye Wan-yong |
|
출생 | 1858년 7월 17일 |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 (現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6-1)[2] 원주민의 구증을 토대로 밝혀진 주소다. 이 지역에 판교신도시가 지어졌는데, 이 와중에 이완용 생가 터가 아파트랑 학교에 파묻혔다. 집 터에는 중학교가 들어선다는 내용으로 보아 백현마을8단지아파트와 신백현중학교 사이로 추정된다. 과거 푯돌을 세우려고 추진하기도 했다. 2023년에 실제로 푯돌을 세웠다가 며칠만에 다시 철거했다. |
사망 | 1926년 2월 11일[3] (향년 67세) |
경기도 경성부 옥인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4]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암살 미수 이후 폐에 상처를 입어 매년 겨울철만 되면 폐렴과 천식 등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1926년에는 호전되는 듯이 보여 1월 12일 총독부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서 다소 무리를 했었고 부축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이후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다. |
묘소 |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
본관 | 우봉 이씨 (牛峰 李氏)[5] 23세 용(用) 항렬.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였으나 감찰공파(監察公派) 집안으로 양자를 갔다. 2002년판 우봉이씨세보 중에 인권(仁卷, 1권) 821(八二一)쪽에 이름이 있다. |
자 | 경덕(敬德) |
호 | 일당(一堂) |
재임기간 | 제22대 내각총리대신 |
1907년 6월 24일 ~ 1910년 8월 29일[6] 임기 중 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박제순이 임시로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되었고, 이완용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내각총리대신으로 복귀했다. |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1912년 8월 9일 ~ 1926년 2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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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이석준 (생부)[1] · 이호준(李鎬俊) (양부) 어머니 신씨 (생모) · 민씨 (양모) | 형제자매 | 형 이윤용 | 배우자 | 양주 조씨 | 자녀 | 장남 이승구(李升九)[2] 계몽운동에 참가했고, 경술국치 이전에 사망하였다. 차남 이항구 손자 이병길[3] 이항구의 아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할아버지 이완용, 아버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 | 종교 | 불교[4] 불교옹호회 고문을 역임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 소속 단체 | (제명)[5] | 작위 | 조선귀족 후작 | 약력 |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조선귀족 백작,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 후작, 중추원 부의장 | 비고 |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
|
|
노년의 이완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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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완용 내각 출범 기념 사진. 가운데 아이는 영친왕.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있는 인물이 이완용 이다. |
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 제국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도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7] 대부분 을사오적이 누군지 물어보면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직접 국새를 가져다 찍은 박제순과 이완용은 아는 경우가 많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완용/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완용은 생전에도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관료로서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의외로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가
광무개혁 중반에는 부친상 때문에 등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초반에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대신직이 아닌 관찰사직에 머물렀다. 당시 대신직에는
서자였던
김가진도 등용되었는데, (적어도 신분적으로는) 이완용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관찰사로서의 문제 해결 능력은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8]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해일이 들이닥쳐서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 당시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로서 직접 부안을 방문해 참상 현장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하도록 지시하는 등 수습과 구호 사업에 힘썼다. 이에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 사업을 기리기 위해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라는 이름의 공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이 공덕비를 놓고 "보존하자 vs 없애버리자" 등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다른 관료는
윤영렬 정도로 볼 수 있다.
[9] 윤영렬은 안성군수로 재직 중에 마장수라는 도적떼를 토벌하고, 만주에서 경기도까지 남하한 만주족 마적단을 소탕했다. 그리고 흉년과 질병이라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이전의 군수들이 해결하지 못 한 역둔토(驛屯土)의 밀린 세금을 거두어 납부하는 한편, 안성군 호포(戶布)의 절반을 탕감받고, "의병들이 관청 서류를 모두 불에 태워 밀린 세금의 납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해서 세금 탕감을 받아내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지나친 명성을 부담스러워한 윤영렬은 안성군 주민들에게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주민들은 오히려 선정비를 4개나 세웠다.
을사조약 체결,
고종의 강제
퇴위 주도,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체결 등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가 사망한 지 98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
[10] 구글에 매국노 이미지 검색을 하면 대부분의 사진이 이완용 관련사진일 정도이다(...). (캡쳐 이미지)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11]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었으며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 ·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왜냐하면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서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 쪽을 더 이용해 먹었다. 더구나 이쪽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더욱 지독한 셈이다.
,
윤덕영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악명을 지속적으로 얻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 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으며,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자 한민족의 반역자로 평가받고 있다.
[12] 그도 그럴 것이, 이완용은 '국권피탈 3조약에 모두 찬성한 것을 넘어 체결에 직접적으로 참여 + 강제병합 후에도 일제의 학정에 아이디어를 제공 + 35년(을사조약 직후까지 포함한 40년) 동안 동포들을 지옥에 집어넣었음 + 그럼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죗값과 비교하면 매우 편하게 죽음' 때문에 영원히 한국인들의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유다 이스카리옷,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이완용의 유명세 때문에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들은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고,
[13] 그나마 박제순이 어느 정도 악명이 있긴 하다.
비을사오적 매국노들은 여러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남긴
송병준,
윤덕영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국권 피탈에 관여하지 않은
민영휘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가
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
[14]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15]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때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런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16] 이런 문화는 일본에도 존재해서 덴노의 점심 저녁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식사가 차려졌다고 한다. 특히 메이지덴노는 점심 때 양식을 즐겨서 시종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문이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 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테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테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
[17] 재임 시절 공교육에 일본어 수업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수업시수가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 친부 이호석 / 친모 신씨
- 이완용(1858 ~ 1926) / 妻 양주 조씨
- 장남 이승구 (1879 ~ 1905) / 임건구
- 손자(양자) 이병길(1905 ~ 1950) 이항구의 친자
- 차남 이항구 (1881 ~ 1945)
-
손자 이병길(1905 ~ 1950)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 - 손자 이병희
- 손자 이병주 (1913 ~ ?) 1962년 일본 국적 취득
- 손자 이병철
- 손녀 이병오
- 양부 이호준(1821 ~ 1901)
본인의 평판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
[18] 협성회 등 구한말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1905년 26세에 사망했다.
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조롱성 루머가 돌았다. 이 내용은
매천야록에도 기재되어 있어서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당 기사.
제 양부에게는 의외로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양 이복형
[19]인 의붓형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 같은 진짜배기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 감역(監役) 허욱(許煜)
-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 승지 정해(鄭楷)
-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 이조 참의 윤연(尹㝚)
-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괘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 대사헌 심악(沈䥃)
-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 지평 이동양(李東讓)
-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 승지 이중술(李重述)
-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 승지 이보욱(李普昱)
- 승지 김호(金浩)
-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 감역(監役) 정권(鄭權)
-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 승지 이재화(李在華)
- 정언 이우화(李宇和)
- 주서(注書) 권숭(權崇)
-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 정언 권집(權䌖)
-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 승지 박홍도(朴弘道)
행적의 질이 매우 나쁜 인물이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매우 안 좋은 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조선귀족 朝鮮貴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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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
[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
[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오등작 중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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