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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희(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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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서광범
제2대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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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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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제5대

한규설
제6대

조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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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
제8대

조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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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조병직
제11대

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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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순
제13대

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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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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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이근택
제31대

권중현
제32대

박용대
제33대

이하영
제34대

조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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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어윤중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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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제4대

어윤중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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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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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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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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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기
제10대

조병호
제11대

조병직
제12대

민영기
제13대

박정양
제14대

민영환
제15대

민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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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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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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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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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홍
제20대

심상훈
제21대

김성근
제22대

심상훈
제23대

이용익
제24대

박정양
제25대

민영기
제26대

조병호
제27대

민영기
제28대

민영철
제29대

민영기
제30대

고영희




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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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후작백작
완순군 · 의양군 · 창산군 · 청풍군 · 박영효 · 윤택영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자작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남작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5] · 최석민 · 한창수
습작후작백작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윤의섭 · 박찬범 · 이병길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자작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 · 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3]
남작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영욱 · 민철훈 · 민태곤 · 민태윤 · 박경원 · 박서양 · 박승원 · 성주경 · 윤치호 · 이규환 · 이기원 · 이능세 · 이동훈 · 이범팔 · 이병옥 · 이원호 · 이인용 · 이장훈 · 이중환 · 이풍한 · 장인원 · 정주영 · 정천모 · 조중구 · 조중헌 · 최정원 · 한상기
승작후작백작
이완용고희경 · 송병준
반납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이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조희연 · 한규설 · 홍순형
{{{-2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 [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 [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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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62861> 의장1 ||
||<width=20%>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width=20%>
제2대

미즈노
렌타로 ||<width=20%>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width=20%>
제4대

시모오카
주지 ||<width=20%>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
||
제6대

이케가미
시로 ||
제7대

고다마
히데오 ||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
제11대

엔도
류사쿠 ||
||<-5><bgcolor=#062861> 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제5대

윤덕영 ||
||
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5>
[ 1910 ]

고문
고영희권중현민상호박제순송병준
이근상이근택이완용이재곤이지용
이하영임선준장석주조중응조희연
조민희한창수
찬의
강경희권봉수김만수김사묵김영한
남규희민상호박경양박승봉박제빈
박중양염중모유맹유정수윤치오
이건춘이겸제이재정이준상정인흥
조영희조희문한창수홍승목홍종억
부찬의
고원식구희서권태환김교성김낙헌
김명규김명수김준용김필희김한규
김한목나수연민건식민원식박제환
박희양서상훈서회보성하국송지헌
송헌빈신우선신태유어윤적엄태영
오재풍오제영윤치오이도익이만규
이봉로이원용이항직정동식정병조
정진홍조병건조재영조제환조원성
최상돈한동이허진홍우철홍운표
홍재하

[ 1920 ]

고문
고희경권중현민병석민영기박영효
송병준이하영윤덕영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김영한김한목남규희민상호
민영찬민형식박승봉박이양박기양
박상준박승봉박의병박제빈박중양
백인기상호서상훈신석린신응희
어윤적엄준원염중모유맹유성준
유정수유혁로이건춘이겸제정진홍
조민희조진태조영희조희문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고원훈권태환김갑순김교성
김기태김명규김명준김상설김상섭
김연상김영무김정태김준용김창한
김필희김현수나수연노창안박경석
민건식민영은박기동박기순박봉주
박이양박제환박종렬박흥규박희양
방인혁서병조선우순송종헌송지헌
신석우신태유신창휴심준택심환진
안병길양재홍오재풍오태환원덕상
유기호유빈겸유익환유흥세윤치소
이강원이근우이기승이도익이동우
이만규이병렬이병학이택규이택현
이항직이흥재이희덕장대익장도
장상철장응상장직상장인원전석영
정동식정란교정병조정순현정재학
정태균정호봉조병건천장욱최석하
피성호한영원한상봉한창동허명훈
홍성연현은
참의
구연수김윤정김춘희김한목김희작
남규희민병석박기순원응상윤갑병
윤정현장헌식정건유현기봉

[ 1930 ]

고문
민병석윤덕영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서규김영진
김윤정남궁영민상호박두영박상준
박영철박용구박중양서상훈신석린
어담엄준원염중모유정수유진순
유혁로윤갑병이겸제이범익이진호
장헌식정교원조경하조성근조희문
주영환최린한규복한상룡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강번고일청김경진김기수
김기홍김도현김두찬김병규김사연
김상설김상형김상회김신석김영택
김정석김정호김종흡김진수김창수
김한규김한목김한승남백우노영환
문종구민병덕박기석박종렬박보양
박봉진박철희박희옥방의석방태영
서병조서병주석명선선우순성원경
손재하손조봉송지헌신희련안종철
오세호오태환원덕상유승흠유태설
이경식이교식이근수이근우이기찬
이기승이동우이명구이방협이승우
이병렬이선호이은우이종섭이충건
이진호이택규이희덕이희적인창환
장대익장석원장직상장헌근정관조
정란교정대현정석모정석용정해붕
조병상주영환지희열최남선최양호
최연국최윤최윤주최준집최지환
최창조하준석한영원현준호현헌
홍치업황종국
참의
강필성김병원김성규김제하박상준
어윤적유만겸유성준진희규홍정철

[ 1940 ]

고문
김윤정박중양윤치호이범익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사연김연수
김영배김영진김우영김윤정김태석
김화준박두영박상준서상훈신석린
안종철원덕상유만겸유진순이겸제
이경식이계한이병길이원보장직상
장헌식정교원정란교정연기진학문
최린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권중식김경진김동준김병욱
김부원김사연김신석김원근김재환
김태집노준영민재기박지근박창하
박필병방의석서병조손창식송문화
신현구양재창원병희위정학이경식
이기찬이승우이신용이영찬이익화
이종덕임창수장용관장윤식장준영
장직상전덕룡조병상조상옥차남진
최윤최승렬최정묵최준집한익교
한정석현준호황종국
참의
김하섭문명기이승구

||
||<-5>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 남작
고영희
高永喜 | Go Yeong-hu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o_Yeong-hui_Portrai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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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高永喜.jpg
이름고영희 (高永喜)
본관제주 고씨 (濟州)
우정 (雨亭)
자중(子中)
출생1849년 (철종 즉위년) 11월 2일[1]
충청도 회덕군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사망1916년 1월 25일 (향년 66세)
직업관료, 정치가
신장약 162~164cm[2]
종교유교 (성리학)
작위조선귀족 자작
주요 경력중추원 참의
황해도 관찰사
법부 대신
탁지부 대신
조선귀족 자작
이왕직 장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비고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정미칠적경술국적 중 1명으로 매국노.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중(子中), 호는 우정(雨亭).

2. 생애[편집]


1849년 11월 2일 한성부에서 중국어 역관 고진풍(高鎭豊)과 전주 이씨 이일준(李一遵)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867년 19세의 나이로 식년시 역과 왜학(일본어) 전공에 2등 2위로 급제했다.# 젊어서부터 개화 사상을 접해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으며 1876년 5월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에 일본어 통역으로 수행해 일본을 시찰했다. 1880년 5월 원산항 개항 때 사무관으로 종사하고 같은 해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1882년 6월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이 인천에 도착해 있을 때 차비 역관으로 영접과 통역을 담당했으며 1883년 인천항 개항 때는 조계정 사무를 담당했다. 1884년 2월 양지현감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날 다시 간성군수에 임명되었고 9월 지평현감으로 옮겼으며 10월 통리교섭사무아문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1월 삭녕군수로 옮겼다. 1885년 4월 고양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1월 연천현감으로 옮겼으나 곧바로 사직했으며 1886년 4월 기기국 방판으로 관직에 복귀해 종목국 사무를 겸임했다. 1894년 6월 내무부 참의에 임명되어 9월 의화군 이강이 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1등 수원으로 수행했으며 갑오개혁에도 참여하였다. 1895년 4월 학부 협판에 임명되어 5월부터 8월까지 일본 특명전권공사를 지냈다. 1896년 1월부터 3월까지 농상공부 협판을 지내면서 2월에는 농상공부대신 사무를 서리했고 3월에 외부 협판에 임명된 후 9월부터 외부 대신 사무를 서리했으며 7월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897년 9월에는 다시 학부 협판에 임명된 후 1898년 7월부터 10월까지 학부대신 사무를 서리하면서 양지아문 부총재관을 겸임했다. 1898년 10월 탁지부 협판에 임명된 후 탁지부대신 사무도 서리했으며 1898년 10월에 열린 관민공동회에 정부 측 참석자로 참여한 일로 11월 징계를 받았으나 곧바로 탁지부 협판으로 복귀했다.

1903년 2월부터 11월까지 다시 일본 특명전권공사를 지냈고 12월부터 다시 탁지부 협판에 임명되었다가 1904년 5월 학부 협판으로 옮겼다. 1905년 5월 법부 협판에 임명되었다가 7월 평리원 재판장과 중추원 참의를 거쳐 10월부터 황해도 관찰사 겸 황해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고 1906년 6월 제실회계심사국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2월 서울에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4월에 교장에 취임했으며 5월에 성립된 이완용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어 1908년 6월까지 재임했다. 재임 중이던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관련해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면서 어전 회의에서 이완용 등과 함께 양위를 주장했다. 고종 강제 퇴위에 앞장서는 한편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동조해 이완용 - 총리대신,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임선준 - 내부대신, 이병무 - 군부대신, 조중응 - 법부대신, 이재곤 - 학부대신과 함께 정미칠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07년 10월 조선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1907년 10월 고종의 강제 양위와 정미 조약 체결에서 보여준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3월 탁지부대신으로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시정 개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일시 대부금에 관한 계약'에 조인했다. 1908년 6월 법부대신에 임명되었고 8월 조선에 대한 자선 구제와 복리 증진을 명분으로 진출한 동양협회[3]의 취지에 찬성해 100원을 기부했으며 10월에 일본 적십자사에서 특별 사원장을 받았고 11월에는 대한산림협회[4] 명예회원으로 참여했다. 1909년 6월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황태자 도한 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0월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임시로 법부대신의 사무를 서리했는데 11월 도쿄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맞춰 대한제국 내각 및 한성부민회 주최로 장충단에서 관민 추도회를 열 때 발의에 참가하고 추모했다. 같은 달 말에는 일진회가 성명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자 이완용의 지시로 오사카 조폐국 시찰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해 수상 가쓰라 타로를 만나 '합방안 5개 조항'을 제출했으나 거절당했다.

1910년 3월 토지조사국 관제 발표와 함께 탁지부대신으로서 경술국치 때까지 토지조사국 총재를 겸임했다. 1910년 8월 22일 탁지부대신으로서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 회의에 참석해 가결시킴으로써 황족 대표로 참석한 이재면과 더불어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시종무관장 겸 친위부장관 이병무 등과 함께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2월 조선귀족의 실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명농회 조직에 참여해 취지서와 규칙을 발간했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10만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으며 8월 29일 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매일신보> 특집호에 '공축 병합 일주년 기념'이라는 기념 축사를 게재했다. 1912년 8월 '한일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1월 조선귀족 대표로 일본 교토 모마야마 백일제에 참석해 참배했으며 12월에는 정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7월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 덴노 1주기 추도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 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5월 특별유공회원으로 50원을 기부했으며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1월 25일 사망했는데 사망 당일에 종3위로 추서되었으며 2월에 치러진 장례식에 일본 정부가 보낸 칙사가 참석했다. 그의 작위는 1916년 3월 장남 고희경이 세습했다.


3. 기타[편집]


  • 장남 고희경(1873~1934)과 손자 고흥겸(1893~1939) 모두 일제강점기조선귀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후손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 등을 국가에 몰수당하게 된다. 고희경의 후손들은 선조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고희경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매각한 대금 4억 8천여만 원을 국가에 반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고영희의 증손자 고중덕은 조상의 토지를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다.[5]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그의 조카다. 중부(仲父) 고영희와 달리, 예술인인 고희동에게는 특별한 친일행적이 없다.

[1]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12월 1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중앙에 있는 인물이 순종이고 왼쪽에 있는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이고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 있는 인물이 이완용이고 이완용 왼쪽에 있는 인물이 임선준이고 임선준 왼쪽에 있는 인물이 고영희이다.) 이 사진을 보면 키가 162~164cm 추정되는 이완용하고 임선준과 같은 키로 추측할 수 있다.[3] 1907년 2월 조선과 대만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직된 단체.[4] 대한산림협회는 일제가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단체로 일본인 측량 기사를 초빙해 산림 사업을 주관했다.[5] 해당 재판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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