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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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의 축구 종목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연령제한이 없이 치러진 마지막 대회다. 또한 1972년 대회 이후 16년만에 진출국의 보이콧 없이 치러진 대회가 되었으며 프로 선수들도 제한적으로나마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90년대 세계 축구계의 스타가 되는 유망주들이 대거 등장한 대회다.
대한민국이 개최국의 자격으로 24년만에 올림픽 무대에 복귀했으나 개최국 메리트를 별로 받지 못한 조 편성 운이 겹쳐 아쉽게 대회 11위로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또한 조추첨 당시 참여했던 멕시코는 조추첨 3주 뒤, CONCACAF 연령별 대회에서 선수 연령 조작을 하다 적발되어 국제대회 2년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로 대회 참가가 무산되었다. 따라서 B조에는 멕시코 대신 차순위 팀인 과테말라가 들어가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참가팀 정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A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B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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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8 서울 올림픽의 축구 종목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연령제한이 없이 치러진 마지막 대회다. 또한 1972년 대회 이후 16년만에 진출국의 보이콧 없이 치러진 대회가 되었으며 프로 선수들도 제한적으로나마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90년대 세계 축구계의 스타가 되는 유망주들이 대거 등장한 대회다.
대한민국이 개최국의 자격으로 24년만에 올림픽 무대에 복귀했으나 개최국 메리트를 별로 받지 못한 조 편성 운이 겹쳐 아쉽게 대회 11위로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2. 경기장[편집]
- 개최 경기장의 상세 소재지, 명칭, 규모 등은 다음과 같다.
3. 본선 진출국[편집]
- 조추첨식까지 참여했던 멕시코가 1988년 CONCACAF U-20 토너먼트 대회에서 연령조작을 했던 것이 적발되어 2년 간 국제대회 출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아 서울올림픽 출전도 좌절되었다. 따라서 멕시코의 출전권이 북중미 예선 대회 차순위였던 과테말라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과테말라는 멕시코가 배정된 조에 그대로 들어갔다.
- 이 대회부터 오세아니아에게 1장의 단독 출전권이 배분되어 OFC 단독 지역예선이 도입되었다. 첫 오세아니아 예선에서 호주가 우승을 차지해 서울 올림픽에 진출했다.
- 이전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 체코슬로바키아의 기권 사태와 FIFA가 올림픽을 연령별 대회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더해져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때 도입되어 24년간 유지되던 전 대회 우승국 자동 진출권 혜택이 폐지되었다. 따라서 서울 올림픽부터는 오직 개최국만 본선에 자동 진출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이 마침내 첫 본선에 진출했으며, 본선 진출 팀 중에서 유일한 첫 출전국이다.[5]
4. 조 편성[편집]
4.1. 조 편성 결과[편집]
조추첨식은 1988년 6월 8일, 서울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됐다. 시드배정은 개최국인 대한민국만 받아 C조에 우선 편성되었고, 나머지는 대륙별 순환원칙에 의해 추첨이 진행되었다.
또한 조추첨 당시 참여했던 멕시코는 조추첨 3주 뒤, CONCACAF 연령별 대회에서 선수 연령 조작을 하다 적발되어 국제대회 2년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로 대회 참가가 무산되었다. 따라서 B조에는 멕시코 대신 차순위 팀인 과테말라가 들어가게 되었다.
5. 선수 명단[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참가팀 정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대회 진행[편집]
6.1. 조별리그[편집]
6.1.1. A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A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2. B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B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3. C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C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4. D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D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토너먼트[편집]
6.2.1. 결선 토너먼트[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축구/결선 토너먼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최종 순위[편집]
8. 여담[편집]
- 프로 선수들이 연령 제한 없이[7] 출전한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이자, 8년 만에 보이콧 파동 없이 치러진 대회여서 훗날 FIFA 월드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코파 아메리카, 유럽 빅리그를 빛내는 라이징 스타들이 무더기로 출전한 대회이기도 했다. 이에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가 차범근에게도 올림픽 축구 출전을 강권하다시피 했지만, 선수생활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었던 차범근은 이를 정중히 사양하였다고 한다.
- 브라질: 클라우디오 타파렐, 베베투, 호마리우, 카레카[8]
- 유고슬라비아: 다보르 수케르,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 이탈리아: 잔루카 팔리우카, 치로 페라라, 마우로 타소티
- 서독: 위르겐 클린스만, 토마스 헤슬러, 카를하인츠 리들레
- 스웨덴: 마르틴 달린
- 또한 이 대회에서 칼루샤 브왈랴라는 깜짝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아프리카에서 중위권 팀이었던 잠비아를 이끌고 올림픽 본선진출에 성공하면서, 본선 1차전에서 이탈리아에게 가히 해트트릭을 박아넣으며 세계 축구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였다. 이 대회 이후에 브왈랴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하였다.
[1] 서아시아 지역과 동아시아 지역을 구분해서 1장씩 진출권을 배분했다.[2] 개최국 없이 홈앤드 어웨이 조별 풀리그로 진행되었다.[3]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 예선은 완전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4] 4개국 더블 풀리그로 치러졌다.[5] 그 전에 중화민국이 여러 번 진출하긴 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본선 진출이 이번이 처음이다.[6] 승부차기 승리 및 패배는 무승부로 처리한다.[7] 연령, 신분 제한은 없었지만 다른 제한이 있었는데, 바로 '유럽 또는 남미 국가의 대표선수들은 이전 월드컵 본선에 90분 이상 출장한 적'이 있으면은 참가할 수 없는 제한이었다.[8] 나폴리에서 마라도나와 콤비를 이뤘던 그 카레카가 아니다. 본명 하미우통 지 소우자인 동명이인의 선수로, 이 선수 역시 공격수였으며 브라질 국가대표로 A매치 경험은 있지만 4경기 출장에 그친 선수였다. 서울 올림픽에서도 후반 교체요원으로 나서는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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