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토리노
덤프버전 :
분류
토리노를 연고지로 하는 세리에 A 축구 클럽에 대한 내용은 토리노 FC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피에몬테의 중심 도시다. 포 강 서쪽 강변에 있으며, 알프스 산맥과 인접해 있다.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도이자, 노동자 권리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 의미있는 도시이다.
2. 역사[편집]
기원전 2세기엔 알프스를 넘어 온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점령했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 도시로서 번영하였으며 당시에는 타우리노룸(Taurinorum)으로 불렸다.
11세기에 사보이아 가문의 시조 움베르토 1세 백작의 막내 아들 오도네가 이 지역의 상속녀 수사의 아델라이데(Adelaide di Susa 1020~1091)와 결혼하면서 사보이아 가문의 영지에 편입되었다. 사보이아 백국 시기에는 시민과 주교의 영향력이 강했고 그 당시 피에몬테의 중심지는 피네롤로[5] 였기 때문에 이곳에 궁정을 마련했던 필리포 1세를 제외하면 사보이아 가문의 군주들이 선호하는 거처는 아니었으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의 섭정을 맡은 어머니 몬페라토의 비앙카(Bianca di Monferrato 1472~1519)의 궁정이 토리노에 자리잡으면서 핵심 도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발전은 1563년에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프랑스 왕국의 침입에 용이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샹베리에서 천도하여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치세에 크게 확장되었고, 17세기 중후반에는 프랑스 출신 어머니 크리스틴 마리의 영향을 받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로 인하여 프랑스풍의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었던 1706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사부아 공자 외젠[6] 이 프랑스군에 맞선 토리노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사보이아 공국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사국 동맹 전쟁이 끝난 1720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왕국을 선포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혁명 프랑스에게 점령당했고 사보이아 가문은 사르데냐의 칼리아리로 몽진했다.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으로 사르데냐 왕국으로 반환되어 다시 수도가 되었고, 카밀로 카보우르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필두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추진할 때는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초창기였던 1861∼1864년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7]
2.1. 근현대[편집]
고대 로마 제국 시기나 중세에 번영을 맞은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 대도시와 달리 17세기부터 발전이 가속화된데다가 이웃 프랑스의 영향으로 이탈리아하면 연상되는 로마, 르네상스 양식보다는 바로크나 신고전주의 양식의 유적이 많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보이아 가문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귀족의 도시, 왕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20세기 초반부터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특히 피아트)의 중심지가 되면서 노동자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등 양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반에는 줄리오 에이나우디, 안토니오 그람시, 카를로 레비, 레오네 긴츠부르그[8] 등 이탈리아 근현대사에 기록된 저명한 반 파시스트 운동가들이 토리노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토리노 공업 지대는 연합국의 주요 폭격 목표였고 이후 독일 국방군의 침공으로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반 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이 펼쳐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시행된 왕정 존속 투표에서는 공화정 득표율이 더 높았다.[9]
이탈리아 경제 고도 성장기인 50년대 후반부터 낙후된 이탈리아 남부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왔으며 이들은 토리노 선주민들과 구별되는 외모와 이탈리아어 억양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3~4세대까지 내려온 현재는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60년대 말에는 68운동의 영향을 받아 피아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가을' 운동이 있었고 70년대 납의 시대에는 테러로 수난을 겪기도 했다. 70년대에 약 120만에 달했던 인구는 현재 약 80만 정도로 줄었는데 인근 몬칼리에리, 리볼리 등 위성도시들이 개발됨에 따라 분산되었다.
2010년대부터는 시 자치단체에서 스마트 도시로 발전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3. 경제와 산업[편집]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라노 광역권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큰 지역이며, 개인 소득 기준으로는 유럽에서 16번째로 부유한 도시이다. 자동차 산업 및 항공 우주 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유명하며,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 업체인 피아트, 이베코, 란치아의 본사와 공장이 있다.
금융업도 발전한 도시로 이탈리아 최대 규모 은행인 인테사 산파올로가 세워진 곳이다. 2023년 기준 전세계 27위 규모 은행이다. 이외에도 통신업체 텔레콤 이탈리아, 방송사 RAI, 스포츠 브랜드 카파, 주류업체 마티니, 커피 브랜드 라바짜 등이 설립된 곳이다.
이탈리아 최대 재벌가 중 하나인 엑소르의 아녤리 가문의 본거지이다. 엑소르의 전신인 피아트의 전 회장이었던 잔니 아녤리의 별명은 '이탈리아의 마지막 왕'. 그의 외손자이자 현 엑소르 회장인 존 엘칸도 토리노에 거주 중이다.
4. 문화와 스포츠[편집]
세리에 A 축구 클럽 유벤투스 FC와 토리노 FC의 연고지로 유명하며, 알프스 산맥 근방의 이점을 살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2007 토리노 동계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했었다. 아울러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서 세계 최초로 FIFA 월드컵과 동계올림픽을 모두 개최해본 도시가 되었다. 2022년에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열렸다.
사보이아 가문의 주도로 초콜릿, 커피 문화가 발달했다. 17세기부터 인근 국가인 스위스, 독일 등으로 초콜릿을 수출했고 에스프레소에 초콜릿과 우유를 넣은 토리노 전통 음료 비체린이 유명하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토리노 여행 후기에도 비체린이 좋았다고 언급된다.
5. 관광[편집]
이탈리아 주요 도시 중 비교적 관광객이 적은 도시로 알려져있다. 외국인 관광객보다 이탈리아 자국인 관광객이 훨씬 많은 것도 특징.[10]
성 요한 보스코가 활동했던 지역이자, 토리노의 수의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뾰족한 첨탑으로 유명한 토리노의 상징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는 이탈리아 국립 영화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카를로 펠리체 국왕의 컬렉션으로부터 시작된 이집트 박물관(Museo Egizio di Torino)은 토리노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이탈리아의 최대 기업 엑소르의 본거지답게 자동차 박물관(Museo Nazionale dell'Automobile)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사보이아 가문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보이아 가문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토리노 대학교(Università degli Studi di Torino)[16] 를 필두로 토리노 왕궁(Palazzo Reale)[17] , 토리노 대성당(Duomo di Torino)[18] , 현재는 토리노 공과 대학교(Politecnico di Torino)[19] 로 사용하고 있는 발렌티노 성(Castello del Valentino) 등 사보이아 가문과 관련있는 장소가 많다.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잘 알려진 수페르가 성당(Basilica di Superga)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토리노 공방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지은 성당으로 사르데냐 국왕으로 선포한 이래 왕실 묘당으로 사용되었다. 유벤투스의 알리안츠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베나리아 궁전(Reggia di Venaria Reale)도 가볼만하다.
이 외에도 토리노 근교에 위치한 몬칼리에리 궁전(Castello Reale di Moncalieri), 스투피니지 사냥 궁전(Palazzina di caccia of Stupinigi) 등이 모두 사보이아 가문과 연관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보호받고 있다.
6. 교통[편집]
주요 철도역으로는 토리노 포르타 누오바(Torino Porta Nuova)와 토리노 포르타 수사(Torino Porta Susa)가 있다. 포르타 누오바역은 터미널식이고, 밀라노 방향에서 말 그대로 U자 모양으로 선로가 들어오기 때문에 선로 배치를 바꾸어 장기적으로 포르타 수사를 중추역으로 바꿀 예정이다.
토리노는 자체 공항(Aeroporto di Torino)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국내및 유럽 각국을 향하는 항공노선을 이용할수 있다. 시내와 연결되는 도시철도 노선이 있으므로 접근성도 좋다.
지하철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과 함께 만들어졌는데 쾌적하다는 반응이 많다. 트램, 버스, 지하철 티켓은 지하철 역 자동판매기나 'Tabacchi'라 불리는 매점에서 구매 가능하다.
7. 출신 인물[편집]
-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 움베르토 1세까지의 사보이아 공국 공작, 사르데냐 왕국 국왕, 이탈리아 왕국 국왕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 수학자, 물리학자
- 아메데오 아보가드로 - 물리학자, 화학자
- 잔니 아녤리 - 피아트 前 회장
- 안드레아 아녤리 - 유벤투스 前 회장
-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 - 배우, 카를라 브루니의 언니
- 카를로 긴츠부르그 - 역사학자
7.1. 우호 협력 도시[편집]
8. 여담[편집]
- 2023년 8월 토리노 인근 알프스 산악지대에 세스트리에레 지역에 때아닌 눈이 내렸다. 적설량은 5cm로 해발고도가 높은지역이라곤 하지만 여름철에 눈이 온 것은 10년만.#
9. 둘러보기[편집]
[Regione] 레조네[1] Città metropolitana di Torino[2] 중부 유럽 표준시.[3] 서머타임 준수.[4] 2021년 7월 31일 기준[5] 프랑스의 미지의 인물 철가면이 수감되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반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과거부터 요충지였고 30년 전쟁 도중에 프랑스가 빼앗아 관리하기도 했다.[6]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는 6촌 관계였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카리냐노(Eugenio di Savoia-Carignano).[7] 이후 피렌체를 거쳐 1870년에 로마로 옮겨갔다.[8]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아버지.[9] 통일 이후에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움베르토 2세가 왕태자 시절 토리노에서 머무르는 등 이탈리아 왕실은 토리노를 아꼈으나 피렌체 천도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야반도주를 하려다 적발당하자 시민들을 학살하며 반대 움직임을 묵사발내고 도망치듯 떠난 이력에다가 독일 국방군의 침공을 받자 비토레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책임하게 남부로 도주하고 남겨진 시민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치면서 왕실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해졌다. 오늘날 토리노의 주요 관광 수입이 알리안츠 스타디움과 더불어 사보이아 가문이 남긴 문화유산임을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10] 로마 제국의 상징이자 교황령의 중심지였던 로마,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이자 운하가 발달한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시발점인 피렌체, 패션의 중심지 밀라노 등에 비하면 외국 관광객을 매료시킬 관광지가 적은게 사실이다. 알리안츠 아레나 포함 주요 명소가 전부 이탈리아어 가이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외국인의 접근을 막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역사를 아는 자국민에게는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다.[11] 2010년 수정[1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1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1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1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16]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의 매부인 피에몬테의 루도비코(Ludovico di Savoia-Acaia 1364~1418)가 1404년 설립하였다.[17]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시대에 기초가 잡혔으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부인 프랑스의 크리스틴 마리의 섭정 시기에 완공되었다.[18] 앞서 언급된 토리노의 수의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며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안장되어있다.[19] 토리노 대학교와는 다른 대학으로 1859년 설립되었다. 엑소르 회장 존 엘칸이 이 대학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