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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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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Virtual Tour
1. 개요[편집]
바오로가 순교한 후 유해를 매장한 장소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로마 4대 대성당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창건 당시의 모습을 1400년 넘게 간직했으나 19세기 초에 대화재가 일어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가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 로마를 두른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에 있었던 반면, 이곳만은 '성벽 바깥(fuori le mura)'에 위치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이름이 붙었다.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세계 가톨릭 교회는 11월 18일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축일(In Dedicatione basilicarum Ss. Petri et Pauli, apostolorum)로 기념하는데, 로마 보편 전례력상 이 축일은 선택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
2. 역사[편집]
2.1. 창건[편집]
서기 64~67년 사이에 바오로는 지금의 트라 폰타네 지역에서 처형되었는데, 그의 유해를 베드로의 유해와 함께 신자들이 비밀리에 수습해 매장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가 두 사도를 기념하는 성당의 건설을 제안하고 대제가 이를 받아들여 공사가 시작되었다. 실베스테르 1세는 324년 11월 18일에 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함께 축성하였다.
2.2. 확장[편집]
첫 확장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364-375 재위) 치세 때인 370년에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규모가 커진 것은 386년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명령에 있은 다음부터였다. 기존 신랑에 측랑과 익랑을 4곳 추가하고 포로 로마노에서 가져온 원기둥 24개를 포함하여 기둥 80개를 내부에 세웠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당시의 성 베드로 대성당[9] 보다 더 크고 웅장해졌다. 호노리우스 황제의 누이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는 개선문 형태로 된 '승리의 아치'를 이곳에 기증하기도 했다.
4세기 후반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완성된 대성당은 461년 낙뢰, 739년 롬바르드족의 약탈, 801년 지진, 847년 사라센인의 약탈 등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지만 건물 자체는 그때마다 보수 공사가 계속되어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다. 로마 4대 대성당 가운데서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교황 율리오 2세가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밀어버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축을 감행해 원형이 남지 않았고,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또한 후대로 내려오면서 기존 건물이 증개축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등 각종 건축 양식이 추가되는 통에 원형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만은 4세기 후반 당시의 바실리카풍 원형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2.3. 1823년 7월 15일 대화재[편집]
1823년 7월 15일 밤, 연판 지붕을 수리하던 인부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고, 로마에 있던 교회 중 무려 1435년 동안 고대 로마의 교회 모습을 유일하게 간직했던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은 후진 부분만 남긴 채 전소되고 말았다. 성당에 보관되었던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품도 이때 모두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대화재는 즉각 교황청에 보고되었지만 교황 비오 7세의 병환이 위중했기에[10] 아무도 병석의 교황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임종 직전의 비오 7세도 뭔가를 예감했는지 병마에 고통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바오로를 찾았다.
재건은 후임 교황 레오 12세가 선출된 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레오 12세는 전세계 교회에 재건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이집트에서 보낸 설화석고 기둥, 러시아에서 보낸 청금석과 공작석 등 세계 각지에서 희귀한 자재들을 기증해 공사를 지원했다. 전소 이전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둔 재건 공사는 1840년 교황 복자 비오 9세가 축성식을 거행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재건 이전의 건물은 바실리카풍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재건 이후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반영되어 다소 차가운 인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신랑의 천장에는 축성식을 거행한 비오 9세를 기념해 그의 문장이 장식되었다.
3. 역대 수석사제[편집]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등 로마 4대 대성전에는 수석사제(archipresbyter)가 있어서 각 대성전의 본당사제로 재직한다. 다른 대성전의 수석사제들은 11~13세기부터 봉직하여 역사가 8-9백 년이 넘는 반면,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의 수석사제는 2005년에 와서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임명하여 역사가 매우 짧다. 현재까지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역대 수석사제는 아래와 같다.
이들이 주임신부 또는 본당신부라고 해서 현재 대한민국의 각 성당별로 있는 단순한 주임신부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4대 대성전은 교황직속 성당들로서, 원래의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은 매주일마다 이들 성당에서 1번의 미사를 집전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는 전세계 교구의 중심인 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들이 미사 예물을 받지않고 교구 신자들을 위해 교중 미사를 집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된 주임신부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수석사제'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수석 사제 아래에 별도의 주임신부가 있으며 담당업무가 나뉜 교구 소속 보좌사제나 특별임무나 대성전 내의 특별구역 관리를 맡는 수도회사제들이 주임신부와 수석사제를 보좌한다.
따라서 수석사제는 교황의 이름으로 각자의 임무를 담당하는 사제들과 대성전 주임신부로 구성된 사제단의 수석이자 대표이다. 이들 수석사제는 교황의 대리자로서 대성전을 관리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미사나 성무일도 등의 전례를 대리집전하는 역할을 하므로, 가톨릭 교회건물 지위등급 10종류에 따른 서열 기준에 맞춰서 추기경이나 주교가 임명되거나, 주교가 아니라면 주교와 비슷한 예우를 받는다
이를 조선시대로 비교하면 선왕들의 기일에 조선 조정에서 별도의 관리나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 참봉에게 왕이 명령을 내려서 왕의 이름으로 다례나 기제례를 집행했던 예를 비춰서 이해하면 쉽다.
4. 기타[편집]
성당 신랑을 이루는 열주랑 위쪽 프리즈(Frieze)에는 초대 교황 베드로부터 교황 프란치스코에 이르는 역대 교황 266명의 원형 모자이크 초상화(Medallion)가 장식되어 있다. 링크 이러한 전통이 시작된 것은 교황 성 레오 1세 때인 5세기부터였는데, 당시에는 프레스코화로 메달리온을 그렸고 1823년 대화재 이후 복원되면서 모자이크로 바뀌었다. 현직 교황인 프란치스코의 메달리온이 프리즈의 원형 틀에 끼워지면서 남은 공간은 6개밖에 없는 상황이라 일각에서는 '앞으로 교황이 6명 더 선출되면 최후의 심판이 온다.'는 종말론 같은 것도 있는 모양. 링크 나무위키에 개설된 개별 교황들의 문서에 있는 원형 사진이 바로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에 장식된 메달리온들이다.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과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을 포함한 성당 다섯 곳은 고대 그리스도교 세계의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들과 각각 연계되어 로마가 다섯 총대주교 관구들 가운데서도 그 정점에 있음을 나타냈는데,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은 알렉산드리아와 연계되었다.
그럼 위에서 언급된 '성 밖의 성 라우렌시오 대성당(=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은 왜 로마 4대 대성당에 없을까? 그야 크기가 '대'성당이 아니니까. 나머지 네 성당이 각각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와 연계돼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 밖의 성 라우렌시오 대성당은 예루살렘을 나타낸다. 역시 로마에 있으며, 구글 지도에서 'San Lorenzo al Verano'로 찾을 수 있다. 그냥 '성 밖의 성 로렌초 성당' 이런 식으로 찾으면 피렌체에 있는 다른 성당이 나오니 주의하자. 더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의 '대성당' 문서를 참고.
[1]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2]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3]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4]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7]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8]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9] 교황 율리오 2세가 새로 짓기 전의 옛 성당.[10] 교황 비오 7세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이 불타고 한달 뒤인 1823년 8월 20일에 81세를 일기로 선종했다.[11] 대부분의 수석사제들이 이탈리아 출신인데, 하비 추기경은 미국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