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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옹
덤프버전 :
蔡邕
(133년 ~ 192년)
惡木盜泉貞士懼(악목도천정사구): 악목과 도천을 곧은 선비는 경계를 하는데,
感恩知已太無因(감은지이태무인): 지기의 은혜에 감격함은 아무 이유도 없네.
文章自足高天下(문장자족고천하): 문장은 천하에 우뚝하다 스스로 만족하는데,
試問何如投閣人(시문하여투각인): 어찌 누각에서 투신했는지 시험 삼아 묻노라.
1. 개요[편집]
후한 중기 ~ 말기의 인물이며 자는 백개(伯喈)로 채릉(蔡棱)[1] 의 아들, 채훈(蔡勳)[2] 의 후손이다. 딸로 채염, 채정희를 두었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가져 명성이 높았다. 교현, 마일제, 왕랑, 노식, 조조 등과 친분을 쌓았으며 서예의 기법인 영자팔법의 고안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훗날 서진 초기의 명장 양호(羊祜)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연주 진류군 어현 사람으로 채옹은 효심이 지극해 어머니를 3년 동안 간호했으며, 숙부, 종제 등과 동거해 재산을 셋으로 분할하지 않고 고향에서는 채옹을 높이 평가했다. 태부 호광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문학, 산술, 천문, 음률에 능했다.
환제 때 서황, 좌관 등 5명의 중상시가 열후에 봉해졌으며, 이들은 채옹이 고금을 잘 타는 것을 알고 진류 태수를 통해 채옹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채옹은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서 거부하고 채옹은 동방삭의 객난, 양웅, 반고, 최인 등의 글을 살펴보고 석회를 저술했다. 170년에 사도부에서 교현에게 벽소되었고 172년에 사도부의 연리를 지내 묘제에 대해 번잡함이 있지만 생략하지 않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175년 여름 3월에는 조정에서 여러 유학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육경의 문자를 바로잡게 하자 의랑을 지내고 있던 채옹은 고문, 전서, 예서 등 3종의 서체로 이를 쓰고 비석에 새겨서 태학의 문 밖에 세우게 했는데, 이는 유학자와 후에 배울 사람이 올바른 것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비석이 세워지자 그것을 보거나 모사하려는 사람이 타고 온 수레가 매일 천여 량씩 거리를 가득 메웠다.
178년에 궁전 마당에 푸른색의 숫무지개가 나타나자 탐관오리들을 쫓아내고 현자들을 그 자리에 임명해야 한다고 상주했다가 중상시 정황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다. 하남인 중상시 여강이 채옹의 무죄를 주장하자 죽는 대신에 삭방으로 유배되었다.
189년에 영제가 붕어하고 소제가 즉위하자 대사령이 내려지면서 귀향하게 되었으며, 동탁이 정권을 잡자 동탁은 채옹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렀다. 채옹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가 일족을 몰살할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아 마지못해 동탁의 부름에 응하였다가 기용되어 높은 벼슬을 맡겨져 중용되었다.
190년에는 화제와 그 이후 후한 황제들의 묘호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동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채옹의 최후에 대해선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하나는 사승의 후한서의 기록으로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당하고, 왕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채옹은 그가 동탁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탄식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정위에게 넘겨졌다. 이때 채옹은 문신을 새기는 경형이나 발뒷꿈치를 자르는 월형을 받아도 좋으니 자신이 저술하고 있는 한나라 역사책을 완성하게 해달라고 왕윤에게 간청했고, 태위 마일제도 왕윤에게 채옹의 구명을 부탁했으나, 왕윤은 "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는 대신 궁형에 그쳤는데, 사마천은 황제를 비방하는 책을 쓰지 않았는가?"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일제는 물러나며 "착한 사람은 나라의 기강이고 기록은 나라의 경전이나 마찬가지인데, 기강과 경전을 없애버리는 왕윤이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왕윤의 미래를 예측했다. 결국 채옹은 60세의 나이로 옥에서 죽었고, 왕윤 역시 마일제의 예측대로 얼마 되지 않아 이각과 곽사에게 죽었다.
다른 기록은 장번이 저술한 한기의 기록이다. 당초 채옹은 정사에 대한 간언을 올렸다가 유배당하였으니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 의(義)로써 지사(志士)들을 감동시켰다. 채옹이 유배지에서 되돌아와 안에서 총애받던 자들이 그를 미워하니 채옹이 이를 두려워하여 이내 바닷가로 망명하였고 왕래하며 태산(太山) 양씨(羊氏)에 의탁해 10년을 지냈다.
동탁이 태위가 되자 채옹은 벽소해 연(掾)으로 삼았고, 높은 성적으로 시어사치서(侍御史治書)로 임명되었다. 사흘 만에 마침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그 뒤 그는 파동태수(巴東太守)로 올랐다가 동탁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시중(侍中)으로 수도에 남겨 두도록 했고, 낙양을 떠난 어가가 장안에 도착했을 때 채옹은 좌중랑장(左中郎將)이 되었다. 동탁이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그를 후대했는데, 동탁은 매번 조정에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채옹에게 명해 초안을 갖추도록 했다. 왕윤이 장차 채옹을 죽이려 하자 이때 명사(名士)들이 다수 그를 위해 변호하였다. 왕윤은 곧 후회하였고 그만두려 했으나 채옹은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3. 후사[편집]
채옹은 두 딸 채염, 채정희가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해당 문서들 각각 참조.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와 친분이 있어서 조조가 유비를 막으러 진출[3] 할 때 채옹의 집을 들르기도 한다. 물론 그때는 채옹이 죽은 지 한참 지난 뒤라서 딸 채염이 맞이해 줬다. 여담이지만 이때 채옹이 남긴 글을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데 양수가 나서서 해독했다고 자랑했다.
4. 다재다능[편집]
4.1. 학문[편집]
학문이 매우 깊어서 여러 경전과 고서를 많이 암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후한서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황제가 두려워하여 채옹에게 무슨 징조인지 묻자
세설신어에는 왕충의 논형을 얻은 일화에서 언급된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4.2. 달필[편집]
학문만이 아니라 달필로도 명성이 대단히 높았으며,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남아 있다.
4.3. 문장[편집]
문장에 있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명사 곽태가 죽은 뒤 "사방에서 7천명에 달하는 선비들이 몰려와 장례에 참석했다. 이들은 뜻을 모아 돌에 문장을 새긴 연후에 비석으로 만들어 새겼는데, 채옹이 그 문장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채옹은 비문을 지은 후, 유주 탁군 출신의 노식에게 "나는 비명(碑銘)을 많이 지은 덕에 부끄러운 것도 꽤 되나 오직 곽유도(郭有道)에게만큼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소!"라고 했다.
왕일(王逸)의 아들이 <영광전부靈光殿賦>[4] 를 지었을 때는 자신도 그와 유사한 부를 지으려다가, "연수(延壽)[5] 가 지은 문장을 보니 매우 기묘하여 이내 붓을 놓고 말았다."라고 할 만큼 자신의 모자람을 떳떳이 말할 수 있는 도량을 지니고 있었다.
4.4. 음악[편집]
음악에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즐,張騭,의 <문사전文士傳>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채옹이 오吳지방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일찌기 회계會稽 고천정高遷亭을 지나는데 그 집의 서까래 가운데 동쪽으로 열여섯 번째 마디에 있는 대나무를 보니 피리로 만들 만하구나.' 그것을 취하여 피리를 만드니 과연 독특하고 뛰어난 소리가 났다."
복도伏滔의 <장적부長笛賦>의 서序에 나오는 "가정柯亭에 가서 보니 대나무로 서까래를 만들었더라. 채옹이 그것을 취하여 피리로 만드니 뛰어난 소리가 났다."는 말도 이 일을 가리킨다.
<남사南史><왕경칙전王敬則傳>에 "중웅仲雄은 고금을 잘 탔다. 장강 동쪽 지방에 채옹의 초미금이 있어 임금의 옷을 보관하는 창고에 두었는데, 임금은 닷새에 한 번 중웅에게 그것을 가져다 달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4.5. 그림[편집]
또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작품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당나라 배효원裵孝源의 <정관공사화사貞觀公私畵史>라는 책에도 그의 작품인 <강학도講學圖>와 <소열녀도小列女圖>가 목록에 올라 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관부의 수장품 목록에 있어 간혹 꺼내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6. 서체[편집]
후대에 서예가로서 가장 칭송받는 업적은 비백서飛白書를 발명한 것이다. 비백서는 먹을 적게 찍어 붓자국에 흰 잔줄이 생기게 하는 독특한 서체다.
당나라 이작李綽의 <상서고실尙書故實>에는 "비백서는 채옹에게서 시작되었다. 홍문鴻門에서 장인들이 솔로 벽에 바르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개발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장회관張懷瓘의 <서단열전書斷列傳>에는 "백개가 숭산嵩山에 들어가 서법을 익히던 중, 석실에서 비단에 쓰인 서신 한 뭉치를 발견했다. 그 안의 글씨는 팔각八角이 뾰족하고, 사주의 대전大篆과 이사의 소전小篆을 절충한 모습이었다. 이것을 얻은 백개는 사흘 동안 침식을 잊고 기쁨에 겨워 환호하기를 마치 수십 명을 앞에 두고 연설하는 사람 같았다. 백개는 삼 년 동안 이 글을 읽고 외운 결과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원앙袁昻의 <서평書評>에서는 "채옹의 글씨는 필세筆勢가 달통하고, 뛰어남이 신기에 가깝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채중랑의 예서와 전서는 천하제일이며, 특히 팔분법八分法[6] 의 깊이와 정밀함은 따로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서체가 변화무쌍하고, 절묘함의 극치를 이루며, 홀로 고금의 서체를 두루 아우르면서도 비백서를 창조했으니 으뜸 중의 으뜸이다. 백개의 팔분법과 비백서는 거의 신기에 가까우며, 대전·소전·예서 또한 매우 훌륭하다."
또한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사용되고 있는 영자팔법이라는 서체 연습방식을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서예의 기초적 수련법인데, 길 영 자에 서예에 써먹을 수 있는 모든 테크닉이 함축되어 있어, 길 영자를 기초로 서체를 연습한다는 이론이다.
5. 기타[편집]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서 송나라 때는 강창(講唱), 원나라 때는 희곡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남송시기 희곡인 희문 가운데 《조정녀채이랑》이 있다. 여기서 조정녀[7] 가 조오랑[8] 이고, 채이랑[9] 이 바로 채옹이다. 채옹은 동탁을 섬기는 바람에 민간에서 인기가 좋지 않았다. 채옹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서 과거에 급제 후 중랑 벼슬을 하고, 우승상의 사위가 된다. 고향에서 채옹의 부모를 모시고 살던 조오랑은 가뭄으로 시부모가 모두 죽고, 자신은 비파연주로 걸식하며 서울로 채옹을 찾아간다. 그러나 채옹은 그녀를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고, 하늘은 이 인간 쓰레기를 벼락으로 쳐죽인다. 이 희곡은 당시 적지 않게 유행했던 것 같다. 남송의 육유(陸游)의 《작은 배를 타고 가까운 마을을 유람하다가 배를 버리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다(小舟游近村,舍舟步歸)》라는 시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 적지 않은 문인들이 이 희문작품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심지어 명대 서위(徐渭)는 《남사서록(南词叙录)》에서 《조정녀채이랑》을 "망작"이라고 깠다.斜陽古道趙家莊,지는 해는 옛길의 조씨 집 비추고
負鼓盲翁正作場。북을 든 눈먼 영감이 노래를 하네.
死后是非誰管得,죽은 뒤 잘잘못을 누가 따지는가?
滿村聽說蔡中郎。모든 마을이 “채중랑”을 듣고 있다.
《小舟游近村,舍舟步歸》(절선)
6. 미디어 믹스[편집]
삼국지 시리즈에서 등장하는데 삼국지 2편을 제외하고는 삼국지 1부터 삼국지 8까지 등장한다. 조조랑 친했던 것을 반영해서인지 동탁보다는 조조와 가까운 상성으로 나와서 조조로 플레이하면 채옹을 손쉽게 등용을 할 수 있다. 물론 동탁과 조조는 상성 차이가 얼마 안 나는 편이고 생각보다 가까운 편이라서 동탁과도 상성이 나쁘지는 않다. 장로와 함께 동탁과 조조와의 상성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는 인물이다.
삼국지 5에서는 무력 23, 지력 82, 정치 87, 매력 79로 무력을 제외하면 모든 능력치가 골고루 준수하며 인사, 외교, 내정 등 다방면에서 활약해준다. 물론 무력이 허접해서 전쟁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면 안 된다. 진형은 학익과 방원이고 특기는 수습, 고무, 진화, 격려, 침착, 반계이며 군사가 아니라서 2만 병력을 거느리는 것이 불가능하고 진형과 특기 모두 수성에 특화되어 공격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실제로 조조와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조조와의 상성이 좋은 편이다. 장안 천도 이벤트 이후에는 동탁군의 장수들의 충성도가 대폭 깎여나가는데 채옹도 충성도가 크게 깎인 상태라서 조조는 물론이고 공주나 왕랑과 같은 조조 쪽 궁합 계열의 군주들이라면 손쉽게 빼올 수 있다.
삼국지 6 파워업키트 추가 시나리오 동태사주살편에서는 왜인지 군주 왕윤의 군사로 등장한다. 다만 상성이 왕윤보다는 조조랑 더 가까워서 조조로 쉽게 빼올 수가 있다.
삼국지 8에서는 무력 16/지력 76/정치력 92/매력 74다.
삼국지 13 PK에서 오랫만에 복귀했다. 능력치는 통솔력 27/무력 16/지력 81/정치력 88. 특기는 상업 2, 문화 8, 언변 3, 인덕 1. 중신특성은 상업중시로 전수특기는 문화이며 전법은 궁공강화. 일러스트는 붓과 병서를 들고 있다. 여담으로 자가 백개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여기서는 나오지 않았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22, 무력 12, 지력 86, 정치 82, 매력 87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5 상승한 대신 추가된 매력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가 소폭 하락했는데 통솔력이 5, 무력이 4, 정치력이 6 하락했다. 개성은 시상, 명성, 문화, 사관, 학자, 주의는 예교, 정책은 태학 Lv 4, 진형은 방원, 정란, 전법은 치료, 진정, 정란, 친애무장은 노식, 마일제, 왕찬, 채염, 혐오무장은 없다. 전작과 달리 자가 백개라는 사실을 반영해서 나왔다.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연주 진류군 출신이나 행보가 낙양에서 거의 살았다시피 딸 채염과 같이 낙양의 재야로 등장한다. 낙양을 차지한 세력이 하진이라 하진 입장에서는 지정매가 높은 무장이 재야에 있으니 이득이나 다름이 없다. 다만 상성이 조조 쪽하고 가깝고 하진은 알다시피 조조랑 상성이 완전히 상극이라서 자칫하다간 빼앗길 수가 있다.
마사토끼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염충의 외조카로 등장하며 염충의 첫 번째 제자가 된 것으로 나온다. 염충은 '재능은 있지만 주류가 되기에는 어긋난 인재들'을 제자로 받아들이던 사람이고, 장제도 그 고명한 채옹이 가후, 진규랑 같은 과의 인물이라는 것에 놀란다. 여기서의 채옹은 '불완벽주의자'로서 불완벽함에 매력을 느끼는 인물로 나온다. 뭔가 만들어내려 해도 완성 직전에 그만두면서 불완벽한 것으로 남겨두길 좋아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지녔지만 끝이 살짝 탄 그의 고금 '초미금'도 그 불완벽한 모양 때문에 좋아할 정도. 가후는 채옹에게 서량으로 떠나는 자신을 대신해서 '불완벽한 인간'인 동탁을 보좌할 것을 권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학사모를 쓴 노인으로 딱 1컷 등장하는데, 그 장면이 동탁의 죽음을 보고 곡하다가 왕윤에 의해 끌려가는 장면이다. 심지어 사실 곡하는 것이 아니라 렌즈를 꼈는데 워낙 따가워서 눈물이 나온 것이라 해명했는데도 왕윤이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10]
삼국지톡에서는 정사의 탄식이 아닌 연의대로 동탁의 시체 앞에서 울다가 체포된다.[11] 채옹을 알아본 왕윤도 처음에는 안타깝다는 듯 어째서 동탁같은 역적을 위해 우냐고 묻고, 채옹 본인도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전 학자들에게는 그래도 예우해주었던 이가 이토록 타락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그래도 스스로의 죄를 물어 두 발목을 잘라달라 청하나, 순유가 이를 말리며 한나라의 역사책을 쓰는 대업 중이라고 알리자, 왕윤은 그게 정말이냐며 살려줄 듯이 말하다가...네 놈 같은 반역자는 목을 잘라버려야겠다고 선언한다. 채옹의 글솜씨는 인정하면서도, 그 재주로 동탁의 혓바닥 노릇이나 했다며, 단 한 번도 동탁에게 맞선 적이 없다고 비난하며 참수를 명했다.[12]
토탈 워: 삼국에서는 정강과 대치하는 것으로 등장. 원래 이곳은 순욱이 대신 있었는데 순욱이 정강때문에 너무 자주 급사하는 바람에 결국 채옹으로 변경되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동탁의 죽음을 동정하다가 왕윤의 명으로 처형된다. 이 때 왕윤은 초선에 대한 사랑이 동탁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어져서 채옹에 대한 탄원을 무시하고 그를 처형하는데, 작가의 글에선 "이상하게 (왕윤이) 차가워진 것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표현한다. 누군가가 썼다는 글귀를 인용하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채옹이 동탁을 동정해서 운 것은 사정에 끌린 일이라 찬양할 것이 못 되고
왕윤이 채옹을 죽인 일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1] 청렴결백하다고 해서 정정공에 봉해졌다.[2] 6대조 할아버지로 평제 때 미현의 현령을 지냈으며, 왕망 때 염융연솔(농서태수)에 임명되나 죽어서도 한을 섬기겠다면서 왕망을 섬기지 않았다.[3] 한중공방전 시기[4] 영광전은 한나라 때의 궁전의 이름이다.[5] 왕일의 아들이다.[6] 예서와 전서를 절충해서 만든 서체. 예서에서 이분二分, 전서에서 팔분八分을 땄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은 그 체體가 팔자八字를 분산시킨 것 같기 때문이라고도 함[7] 바른 여성 조씨다.[8] 趙五娘, 조씨 집안 다섯째다.[9] 蔡二郎, 채씨 집안 둘째다.[10] 최훈이 알고 쓴 건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억울하게 눈물을 흘려서 죽은 사례가 있기는 하다. 정여립의 난 때 김빙이라는 선비가 안구건조증이 있었는지 바람을 쐬자 자꾸 눈물이 나온 것을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 것으로 오해받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고 한다.[11] 그것도 파티 벌이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통곡하며 주변을 갑분싸하게 만든다.[12] 댓글에서도 동탁 시체 앞에서 통곡한건 잘못되었다고 비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