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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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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후한의 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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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朱儁[1]
1980년대까지 국내 번역된 삼국지연의에는 儁의 오독으로 인해 이름이 주전으로 틀리게 표기된 판본들이 많다.
(? ~ 195)
고대 중국 후한 말기의 대신이자 장군으로 자는 공위(公偉)다. 아들로는 주부, 주호가 있으며 양주 회계군 상우현[2]
현 저장성 사오싱시 일부.
장강 이남의 강남 지역이기도 하다.
"기존의 규범이나 사회 제도를 벗어나지 않는 영역 또는 범위."라는 뜻이다.
조금 더 후대의 손견 같은 케이스는 제외하자면
2. 정사[편집]
의(義)와 학문을 좋아하고 재산을 가볍게 여겨 고향에서는 주준을 존경했는데, 같은 군의 주규가 공부의 부름을 받고 출발할 때 군고의 돈 백만 냥을 빌려 관을 갖췄다. 빚으로 인해 주규의 집이 가난하자 몰래 어머니의 비단을 빼돌려 그 빚을 갚아주고 어머니가 생업을 잃고 주준의 행동을 깊이 원망하자 지금은 작은 손해를 봐도 앞으로 큰 이득이 올 것이라 했다.
도상이 이를 보고 보통 인물이 아니라 생각해 회계 태수 위의에게 추천했으며, 회계군의 공조가 되었다가 후임 태수 윤단이 주준을 주부에 임명했다. 173년에 윤단이 허소를 토벌했지만 전과를 올리지 못해 양주 자사에 상주되어 처형당하게 되자 남몰래 낙양에 가서 법을 관장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윤단의 처형을 면하게 함으로써 상주의 오류를 바로잡아 유배에 그치게 했으며, 이 일을 누구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준은 정치에 재능을 발휘해 동해국 상에게 공적을 표창받았으며, 178년에 교지에서 양룡이 남해태수 공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181년에 병사 5천을 이끌고 10개월 만에 평정해 그 공으로 도정후에 봉해지고 간의대부가 되었다.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경들이 재략이 있다면서 추천해 우중랑장에 임명되어 황보숭, 노식 등과 함께 황건적에 토벌에 나섰으며, 손견을 좌군사마로 추천해 함께 토벌에 참여하게 했다.
처음엔 황건적 장수인 파재가 이끄는 군사에게 패했지만 황보숭, 조조 등과 군사를 합해 이를 격파했고 이후 여남, 진국의 황건적을 토벌했으며, 완성을 점거한 조홍을 공격해 죽이고 한충이 항복을 청하자 이를 거부하고 일부러 포위를 풀어서 틈을 만들게 한 뒤에 그가 나오자 공격해서 격파했다. 황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우거기장군,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식읍 5천 호를 받으면서 전당후에 봉해졌으며, 모친상으로 인해 관직을 떠났다가 다시 임관해 장작대장, 소부, 태복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내태수가 되어 낙양으로 내려오는 흑산적을 격파해 병주로 내쫓은 공으로 다시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성문교위 겸 하남윤에 임명되었으며, 동탁이 자신에게 겉으로 친한 척 하면서 마음 속으로 질투하는 것을 알고 이를 대비했다. 조조, 원소 등이 연합해 동탁을 공격할 때 동탁이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자 번번히 나서서 이를 제지했다.
동탁은 그의 명성을 중하게 여겨 이를 탐냈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으며, 동탁이 표를 올려 태복으로 삼아 자신을 보좌하게 하려고 하자 이를 받지 않고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한 강한 반대를 했다. 동탁은 천도할 때 주준을 부상국으로 삼아 데려가려 했지만 주준이 이를 사양하자 낙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장안으로 떠났는데, 주준은 조조, 원소 등과 내응을 약속했지만 동탁이 습격할 것을 두려워해 형주로 달아났다.
형주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동탁이 임명한 하남윤을 달아나게 하고 낙양을 점거했는데, 낙양이 이미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중모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도겸, 공융 등과 연합했다가 이각, 곽사 등의 반격을 받아 패한다. 주준은 중모에 있다가 192년에 동탁이 죽자 도겸 등은 주준을 맹주로 세워 이각을 격파하고 헌제를 데려오려 했지만 마침 이각이 주준에게 관직을 내리고 불러서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자 이를 따라서 장안으로 갔다. 주준이 스스로 이각, 곽사의 밑으로 들어간 이유를 기록에서는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 뜻을 이루고자 할 계획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아마 주준이 생각하기로는 군부에서 자신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으로 짬이 높았던 만큼 이각, 곽사는 애송이로 보였을테고 그래서 자신의 역량으로 이각, 곽사를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본 것 같다.
주준은 조정에 가서 태복이 되었고 주준의 판단과는 달리 이각, 곽사는 전혀 주준에게 통제되지 않았으며, 방약무인으로 날뛰었으므로 이는 오판이었음이 드러난다. 193년에 태위, 녹상서사가 되었다가 194년에 일식으로 파면되고 이후 이각과 곽사가 서로 싸워 장안 일대의 치안이 막장이 될 때 주준은 헌제를 따라 동쪽으로 가지 않고 머물러 대사농이 되었다.
헌제는 주준과 사손서, 양표를 곽사에게 보내 싸움을 말렸는데, 곽사는 오히려 이들을 인질로 잡았지만 곽사의 이런 막장짓은 주위에서 말리는 말이 많았던지라 주준은 곧 풀려났으나 노여움과 수치심으로 병을 얻고 사망한다.
3. 연의[편집]
황건적의 난 때 유비를 만나 앞으로 주요 등장인물이 될 손견을 소개시키고 같이 황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을 표에 적어 올리는 등 명장이자 의리 있는 충신으로 나온다. 그러나 십상시와 동탁에게 견제되어 일찍 리타이어되기 때문에 인상이 옅으며 동탁 사후에는 이각과 곽사를 분열시킨다. 그 후 이들을 말리러 사자로 갔다가 인질로 잡혀 풀려난 후 분노와 수치심으로 그대로 분사한다.
4.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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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둘러보기[편집]
후한서(後漢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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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吳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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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대사농(大司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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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까지 국내 번역된 삼국지연의에는 儁의 오독으로 인해 이름이 주전으로 틀리게 표기된 판본들이 많다.[2] 현 저장성 사오싱시 일부.[3] 장강 이남의 강남 지역이기도 하다.[4] "기존의 규범이나 사회 제도를 벗어나지 않는 영역 또는 범위."라는 뜻이다.[5] 조금 더 후대의 손견 같은 케이스는 제외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