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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함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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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창경궁의 정자이다. 명정전의 서북쪽, 환경전의 남쪽에 있다.
'함인(涵仁)' 뜻은 '인(仁)에 흠뻑 젖는다(涵)'이다.
2. 역사[편집]
인조 이전 창경궁에는 없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왕실 연회를 열던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 인양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사라졌다. 저 때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 주요 건물 대부분이 같이 불탔다.#
1633년(인조 11년)에 인조는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 및 이전하여 창경궁을 재건했다. 이 때 옛 인양전 터에 헐어온 인경궁 전각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함인정이다.
이 때 어떤 건물로 함인정을 지었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궁궐지》에 적힌 내용은 '함인당을 헐고 옮겨 세우면서 그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가 훗날 함인정으로 고쳤다'이다. 그러나 1633년 창경궁 복구 당시 작성한 《창경궁수리소의궤》에는 '함인정의 5칸은 경수전 후행각 5칸을 옮겨 짓고, 나머지 4칸은 새로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후대에 작성한 《궁궐지》보다는 아무래도 당대에 적은 《창경궁수리소의궤》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후 왕들은 함인정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주로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했다.# 국상이 생겼을 때는 망곡하고 향을 올리는 곳으로도 이용했다.# 참고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지만, 함인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주변의 행각과 문은 없어지고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 몇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3. 구조[편집]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이익공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마루 위에 용두만 두고 잡상은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3] 으로 칠했다.
- 실내의 바닥은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 가운데 한 칸을 크게 하고 나머지 칸들을 툇마루처럼 만들었다. 높이 또한 가운데 칸이 다른 칸보다 높다. 가운데 칸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나, 나머지 주변 칸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중국 동진 ~ 송(육조) 시기의 시인 도연명이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여러 연구자들이 동진 시대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임을 밝혔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봄 시는 동쪽, 여름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의 물은 사방 연못 속에 넘치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여름에는 구름이 기이한 봉우리에 많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 달빛 밝게 비치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