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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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당나라의 제4대 황제.
본명은 이철(李哲)로 후에 이현(李顯)으로 고쳤다. 당고종의 7남(혹은 9남)이자 측천무후의 3남이었다. 묘호는 중종으로 시호는 대화대성대소효황제(大和大聖大昭孝皇帝)였으며, 줄여서 화황제(和皇帝)였다.
위의 친형 두 명이 죽거나 폐위되어서 운좋게 황제가 된 경우였다. 하지만 중종의 인생도 결코 순탄치 않았으니, 일생 동안 두 번 정실을 맞아들이고, 두 번 황태자가 되었으며, 두 번 황제가 되고, 두 번 모두 편하게 제위를 마치지 못한 가공할 기록의 소유자였다.
따져보면 증조할아버지는 건국 황제, 할아버지는 성군인 황제, 아버지도 황제, 어머니도 황제, 동생도 황제라는 엄청난 가계도를 가지고 있다. 덤으로 본인이 붕어한 뒤에는 아들과 조카도 황제로 즉위했으니 더더욱 엄청난 가문의 소유자였다. 더군다나 아내인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 여동생 태평공주도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의미가 매우 깊다. 다만, 중종 자신은 황제로서는... 암군이었다.
그리고 이 비범한 집안 내력의 부작용 때문인지, 최후는 매우 비참하기 짝이 없게도 평소에 아끼는 딸이 준 독이 든 떡을 먹고 독살당해서 당나라 황제들 중 처음으로 독살된 황제라는 기록도 달성하고 말았다.
무측천 시기부터 지속된 돌궐 제2제국의 침공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복위한 시기에는 묵철가한(카프간 카간)이 당나라의 변경을 지속적으로 침공하고 있었고, 이에 중종은 돌궐을 파멸시키기 위해 오늘날의 내몽골 지역에 삼수항성을 축조했다. 또한 튀르기시[1] 및 키르기스(힐알사)와 동맹을 맺어 돌궐을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710년 본인이 독살당하면서 북벌 계획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2. 생애[편집]
2.1. 즉위와 폐위[편집]
중종은 천성이 순하여 어머니 측천무후의 말을 잘 따랐다고 한다. 683년 12월 당고종이 붕어하자 태자에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2개월(정확히는 36일 혹은 54일) 만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아내인 위황후의 부탁을 받고 장인인 위현정을 시중으로 발탁하려 하자 그날로 측천무후와 신하들에게 폐위되어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직전에 중종은 어머니 측천무후와 신하들이 위현정에 대한 시중 발탁을 그렇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라고 말했기에 폐위될 만도 했다. 폐위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즉 군주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운 헛소리였다. 일단 중종이 저런 발언을 한 상황을 보면 관료로써 능력이 검증된 것도 아니고 인망이 있는 것도 아닌 사람을 단순히 부인이 부탁한다고 해서, 그리고 자기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중 같은 요직을 주려는 상황이었고 이를 어머니 측천무후와 배염 등의 신하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나는 군주의 지위도 내어 줄 수 있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는데 이는 정말 위현정에게 천자의 자리를 내어 주겠다는 액면 그대로의 문면보다는 "아, 황제 못해 먹겠네. 내가 이 나라 천자인데 관리 임명도 내 마음대로 못하냐?"라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유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군주 한 사람이 독단으로 무언가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을 굉장히 경계할 뿐 아니라 국가 멸망에 대한 기록에는 꼭 한 번씩 등장할 정도로 왕실의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2]"내가 천하를 전부 위현정에게 준다고 해도 큰일 날 것이 없다."
조선의 제3대 태종 이방원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자기 처가는 물론 며느리의 친정까지 박살내버렸는지 생각해보자. 또 선양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선양한 군주치고 그 집안이 온전히 보존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 당중종이 "나는 선양도 기꺼이 할 수 있다"는 소리는 그냥 "내가 내 손으로 집안을 멸문시키겠다"고 하는 말과 동급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과장 좀 보태서 한 집안의 가장이 어느 날 온 가족에게 "나는 내 가족의 주인이니 내 가족 구성원의 운명도 결정할 수 있다. 우리 가족끼리 모두 한날 한시에 사이좋게 죽자" 이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미친 소리이다.
이는 측천무후뿐만 아니라 어떤 가족 구성원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남편인 중종에게 장인인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아줄 것을 요청한 위황후가 측천무후 사후 남편이 복위한 뒤에 무삼사와 바람을 피우고, 그것도 모자라 막내딸인 안락공주와 함께 남편 중종을 독살하기까지 했다는 후일담을 보면, 당중종이 위현정에게 선양했다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는 유추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당중종은 한 나라의 군주로써 그리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정말 용납할 수 없는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맹자는 이미 이러한 선양에 대해서
고 딱 잘라 못박은 일이 있다."천자는 천하를 함부로 남에게 줄 수 없다."
는 것이다. 물론 천하가 남에게 넘어갈 순 있지만 맹자는 그 경우를 천명을 잃었을 때라고 한정했다.하늘이 천자에게 천하를 주었고, 또 백성이 천자에게 천하를 주었는데 어떻게 천자가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느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이렇게 된 건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권이 강했다면 저 정도 말을 해도 욕은 할지언정 감히 황제를 폐위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저런 말보다 더한 말과 행동을 한 폭군들도 얼마든지 많았다. 유교적 이념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이다.
자신이 폐위되는 날, 중종은 측천무후에게
라고 물었고 측천무후는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라고 대답했다.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고 한 것이 어찌 죄가 되지 않겠는가!
2.2. 폐위와 복위[편집]
폐위된 이후 방주(房州)로 귀양을 가고[3] 곧 어머니 측천무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무주혁명) "중종 복위"를 내세우는 반란이 빗발쳤다. 중종은 이제 어머니에게 독살될까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러면서 차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제2의 어머니'가 생긴 셈이었다.
698년 다시 측천무후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중종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두려워하여 스턴되었다.[4] 이런 중종을 부축하여 낙양까지 오게 한 것도 위황후였다. 이것은 측천무후가 갑자기 모성애나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측천무후도 중종의 자질을 보고는 황태자로 삼고 싶지 않았는데 무승사나 무삼사 같은 친족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말만 꺼냈다가[5] 신하들의 반대에 의해 타협점으로 중종을 고른 것이었다. 여하간 705년 측천무후가 쇠약해지면서 재상 장간지의 반정(신룡정변)으로 양위를 받고 다시 제위에 오르는데 드디어 이씨의 황권을 세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참고로 이현이 제위에 오른 건 정월의 일이지만 당나라 국호를 회복한 건 2월의 일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현은 당나라의 황제가 아닌 무주의 황제로 지냈다는 것이다.
2.3. 복위 이후[편집]
하지만 이번에는 중종의 어머니를 닮고자 하는 '제2의 어머니'가 문제였는데 위황후가 '제2의 어머니'를 넘어서 '제2의 측천무후'가 되려고 한 것이다. 위황후는 시어머니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은 정도가 아니라 그의 애인이 되었는데 한마디로 대놓고 간통했다. 그리고 막내딸인 안락공주를 무삼사의 아들인 무숭훈과 결혼시켰다. 무삼사는 자주 위황후 및 중종과 함께 담소를 즐겼으며 용상 위에서 위황후와 서로 손을 만지며 도박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중종은 같이 즐기면서 헤헤거리며 보고만 있었다.[6]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삼사가 죽은 이후에는 정식으로 애인을 두었고, 중종도 이를 용인했는데 이번에도 측천무후가 남자 첩(남총)들을 고종 사후에 거느렸던 것을 선례로 삼았던 듯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녀인 안락공주 이과아는 방주로 귀양가는 도중에 길에서 낳은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과 위황후의 안락공주에 대한 사랑이 매우 각별했으며 오냐오냐해서 키웠다. 그런데 문제는 안락공주가 나중에 가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성격이 되어 공주로서 하지말아야 할 행동을 일삼게 된 것이다. 특히 안락공주는 부모의 총애만 믿고 자신의 사치를 위해 매관매직을 하고 뇌물을 받는 부정을 저질렀으며 더 심하게는 백성들의 농토를 강제로 빼앗고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악행을 저질렀다.[7] 나중에는 아버지를 돕겠다며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했다. 안락공주를 아끼던 중종이었지만 이것만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거절했으나[8] 이때부터 안락공주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증오로 바뀌게 되었다.
중종의 아들이자 안락공주의 이복오빠였던 이중준은 자신을 모함하려는 위황후와 안락공주에게 불만을 품었다. 707년 이중준은 대장군 이다조와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무삼사의 집에 쳐들어가 무삼사와 그의 아들 무숭훈을 죽였으며 위황후와 안락공주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의 허락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살인을 저지른터라 명백한 살인 범죄에다 반역이었기에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여 진압하라는 아버지 중종의 명령을 받은 관군과 싸우다가 죽고 말았다.(경룡정변)
무삼사가 죽고 나서도 위황후에 대한 온갖 소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보다 못한 허주사병참군언사 연흠융(燕欽融)이라는 사람이 중종에게 이런 문제를 고하며
고 충언을 했다. 중종은 분노하여 연흠융을 손수 문초했으나 연흠융은 굴하지 않고 말하니 중종도 비로소 위황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되어 격분한 위황후는 딸인 안락공주와 짜고는 심복인 병부상서 종초객(宗楚客)을 시켜 연흠융을 죽였다. 중종이 이를 알게 되어"황실이 무너지니 거듭 다시 생각해보라"
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위기를 느낀 모녀는 "중종이 이번만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다음에는 중종까지 시해하기로 했다."아내와 딸이 지나쳤다"
결국 710년에 즉위 4년차를 맞은 중종에게 안락공주가 직접 찾아와 "아버지에게 바치려고 직접 만들었다"며 떡을 바쳤다. 중종은 '아끼는 딸이 설마 부모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고 오히려 기특하다며 딸이 준 떡을 먹었다. 그러나 그 떡은 독이 든 떡이었고 이를 모르고 먹은 중종은 피를 토하며 쓰러져 붕어했다. 중종이 독살된 후 아들 이중무가 즉위했는데 물론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꼭두각시였다. 한마디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세 여자인 어머니, 아내, 딸이 모두 중종의 편이 아니었으며 중종은 그 사이에서 효자(孝子), 현부(賢父), 양부(良夫) 노릇만 했다. 얼마나 어질었는지(아니, 얼이 빠졌는지)
라는 노래를 기생이 불러도 내버려 두었다고 하는데 위황후는 그 기생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아내를 무서워하는 것도 좋은 일. 밖에는 배담이 있고, 안으로는 이씨 늙은이가 있구나"
3. 중종의 정치[편집]
그럼에도 중종은 이런 단란한 가족을 상당히 좋아했는지, 정치에도 "가족 같은 분위기"를 중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토번으로부터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재상 종초객을 고발한 어사 최완을 종초객과 형제의 연을 맺게 하여 "그리고 모두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으로 해결을 보았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러한 당중종의 행위를 세간에서는 화사천자(和事天子)[9] 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중종은 아내와 딸, 그외 친족이나 외척이 자기 세력하의 인물의 벼슬을 요청할 때마다 재꺽재꺽 들어주었다. 덕분에 말년에는 조정에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관리가 많아졌다. 또한 마구(격구)를 좋아하여 경기를 보는 것을 즐겼고, 궁내에는 모의 시장을 만들었다. 마치 후한 말의 암군이었던 영제처럼...
그래놓고, 막상 아들인 이중준이 무삼사와 무승훈을 죽이자 이를 반란으로 규정해 죽였고 그렇게 죽은 이중준의 목을 가져다가 제사를 지내고 무삼사와 무숭훈 부자의 관 앞에 바쳤다고 한다.
궁내의 모의 시장, 관리의 지나친 선발, 황제 등극 이전의 궁핍했던 생활을 등극 이후 한풀이했다는 점에서 후한의 영제와 비슷한 필이다. 이런데도 당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것이 참 신기할 정도이다...[10]
그런데 중종이 중풍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독살설은 훗날 당륭정변을 통해 위황후와 안락공주 등을 처단하고 즉위한 당현종이 이들을 매도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라는 것이다. 위황후&안락공주 모녀가 중종과 사이가 나빴다는 말이 없으니 딱히 중종을 죽일 현실적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사서 어디에도 "죽였다"라는 말 이외에 근거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뭔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믿거나 말거나.[11]
4. 가족관계[편집]
부모 모두 황제라는 이례적인 기록으로 중국사 최고의 금수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종은 해당 타이틀의 유일한 보유자가 아니다. 같은 타이틀을 누린 사람은 그의 형제인 예종 이단이다.
- 황후: 화사황후 조씨 - 고조의 딸인 상락공주(常樂公主)의 딸로서, 중종에게는 종고모뻘이었다. 중종이 영왕 시절에 왕비로 맞이했으나, 상락공주가 측천무후의 미움을 받게 되자 조씨는 이에 연루되어 폐위당하고, 이후 죽임을 당했다. 신룡정변으로 복위한 중종이 독살되고 위황후가 폐위되면서(당륭정변) 위황후의 위패를 태묘에 봉안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조씨가 황후로 추봉되어 태묘에 봉안되었다.[12]
- 아들
5. 대외정책[편집]
중종은 복위하자마자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고, 무측천 때부터 지속된 돌궐 제2제국의 침공에 대응했다. 706년에는 백제 출신 번장 사타충의로 하여금 돌궐을 막게 했으나, 명사 전투에서 퀼테긴에게 대패했다. 이처럼 돌궐에 시달리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묵철가한(카프간 카간)을 잡는 자는 왕으로 봉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708년에 명장 장인원[13] 으로 하여금 내몽골 지역에 삼수항성[14] 을 쌓게 하고,[15] 토번에 금성공주를 보내 화친을 했으며, 튀르기시(돌기시) 및 키르기스(힐알사)와 동맹을 맺어 돌궐을 포위해 북벌하려는 전략을 취했으나 710년 독살로 인해 북벌은 물거품이 되었고 묵철가한은 튀르기시와 키르기스(힐알사) 부족을 정복했다. 비록 중종은 허무하게 죽었지만, 그 당시 축조된 삼수항성은 돌궐에 대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후 이융기가 제위에 올라 당 황실 내부의 혼란(무위지화)을 수습한 이후, 돌궐내의 분란을 집요하게 일으켰고[16] , 결국 돌궐에 내란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리하여 바이르쿠(발야고)의 패잔병들에 의해 묵철가한이 암살당하는 등 돌궐을 파멸로 몰아가는 계기가 되었다.[17]
6. 평가[편집]
청렴한 선비는 탐욕스러운 사내를 억제할 수 있지만, 현명한 신하는 나약한 군주를 능히 보필하지 못한다. 진실로 뜻이 어리석은 근신은 마음에 심오한 계획이 없고 창업의 어려움을 모르며 오직 그해의 즐거움에만 취한다. 효화황제(孝和皇帝)는 어두웠고 숨기를 자부하다가 방릉에 유폐되어, 장려(瘴癘)가 들끓는 곳에서 기구한 삶을 살고 유폐지에서 삶을 위해 애를 썼다. 그 까닭에 장한양(張漢陽)[18]
은 정도로 배회했고, 적양공(狄梁公)[19] 은 목이 메어 흐느끼도록 주론하여 결국 생환할 수 있었으나, 효화황제는 어리석었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았다. 금호(金虎)를 씻어 없애고부터 다시 조정의 대권을 쥐었지만, 능히 잘못을 인정하고 자책하여 천하에 사례하지 않았고, 다시 이곳저곳으로 두루 다니며 놀아 팔정을 무너뜨렸다. 요염한 아내의 아첨을 방임하는 것은 바로 추우(棸楀)가 자웅을 겨룬 것이고, 요녀를 믿어 권세를 어지럽힌 것은 곧 상도를 잃은 것이다. 환언범과 경휘는 그로 말미암아 멸족되었고, 절민태자는 그 까닭에 군대를 일으켜, 결국 원수의 존귀함이 부부의 깊은 경애로 일어난 재앙을 면하지 못했다. 한진(漢晉)의 혜영(惠盈)과 비교하여 나았던 것은, 만일 한 시대를 사로잡을 걸출한 인재를 계속 임명하지 않으면, 곧 토덕(土德)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구당서》의 논찬
7. 여담[편집]
-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어리석은 이미지로 묘사된다. 아내 위황후가 불륜행위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돼서 정확한 조사를 명령하지만 그 뒤 방에서 독백으로 아내의 불륜조사에 대해 괴로워하는 말을 하는 걸 끝으로 딸이 준 떡을 먹고 죽는다.
무엇 때문에 우리 여릉왕을 폐했는가?
- 황제로서 굉장히 진기한 기록들을 남겼는데, 두 번 제위에 올랐고 부모가 모두 황제이며 두 정권에서 황제를 지냈다.
8. 둘러보기[편집]
[1] 서돌궐의 별부[2]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건 그런 경우도 아니다. 보통 외척이 발호하는 건 나이 어린 군주가 즉위하고, 대비나 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검증이 안된 외척들을 마구 등용하거나 군주의 권력을 강화시킨답시고 외척들을 등용하면서 문제가 되는 것인데 당중종은 외척도 아니고 처가집의 장인을 등용하겠다고 해서 더 질이 안 좋다. 멀쩡한 성인인 황제가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이니 말이다.[3] 때문에 당중종을 방주룡(房州龍) 또는 방릉(房陵)이라고도 일컫는데 용은 천자의 상징이고, 방릉은 방주의 구칭(舊稱)이다. 즉, 방주에 거하시는 천자라는 뜻이었다.#[4] 이전부터 측천무후가 이따금 보낸 위로 사신이 오면 항상 그랬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위황후가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는 법"이라며 만류했고, 이에 중종이 더욱 위황후에게 의지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5] 사실 무승사나 무삼사가 먼저 말을 꺼낸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남조 진나라의 고조 무황제 진패선의 예시가 엄연히 있는데 측천무후가 그럴리가 없다. 무엇보다 바보같은 아들이 개소리를 지껄이는걸 보다 못해 폐위시킨 사람이 본인이었으니 더 꺼려졌을 것이다.[6] 사실 공식적으로 통정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러 번 사통한 적이 있다'고 거리에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고, 실제로 위황후와 무삼사는 매우 친밀했다.[7] 언젠가 황제 소유의 호수를 달라고 해서 거절하자 자기 재산으로 그 호수를 더 능가하는 호수를 팠을 정도였다. 이는 황제를 우습게보는 행위라서 반역이나 다름없었다.[8] 사실은 다음날 재상인 위원충에게 문의했더니 위원충이 어이없어하며 즉시 반대하고 "그럼 부마를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라는 답변을 듣고는 "재상이 안 된다고 하더라" 식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안락공주는 위원충의 발언에 대해 아무자(阿武子, 측천무후)도 황제로 즉위했고, 자신은 황제의 딸이라서 안 되는게 있겠냐며 분노했다. 훗날 위원충은 경룡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위황후 일파의 표적이 되어 707년에 죽었다.[9] 만사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매사 말썽 안 나게 다독이면 그만인줄 아는 황제.[10] 이건 그만큼 어머니 측천무후가 정치를 잘했다는 말도 된다. 거기다 중종의 재위 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나중에 무법자 아내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는 조카 이융기와 여동생 태평공주에게 숙청당한 데다가, 비슷한 성격이지만 중종처럼 막장은 아니었던 남동생 예종도 얼마 안가 아들이자 중종의 조카인 현종(이융기)에게 제위를 물려줬다.[11] 사실 위황후나 안락공주가 평범하게 생각했다면 당연히 중종이 살아있는 편이 정치적으로 훨씬 좋았겠지만 이들은 제2의 측천무후가 되려고 했으니 당연하게도 중종이 눈엣가시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결론만 놓고 보면 이들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욕망이 이상하리만치 비대했으니 사실 이들이 중종을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짓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지 실제 이들이 독살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12] 중종의 약칭시호는 화사황후에게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가 쓰인다[13] 본래 이름은 장인단이었으나, 당예종과의 휘가 같아 장인원으로 개명했다.[14] 서수항성과 중수항성, 동수항성.[15] 당휴경이 반대했으나, 중종은 이를 강행했다.[16] 처음에는 당현종이 내부 혼란 수습 뒤 돌궐을 파멸시키려고 했으나 거란 전선에서의 대패, 토번의 침공 등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17] 716년 묵철이 암살당하자 이넬이 가한의 자리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퀼테긴과 빌게가 정변을 일으켜 이넬을 비롯한 묵철의 일가족들을 몰살시키고 빌게가 가한의 자리에 올라 혼란을 수습했으나, 묵철 시대와 같은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18] 한양공 장간지를 말한다.[19] 양공 적인걸을 말한다.[20] 실제로 무삼사가 군대를 모집했을 때 사람들이 거의 모이지 않았고, 이현이 군대를 모집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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