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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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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다루는 문서. 2023년 4월 기준 피파 랭킹 115위의 약체다. 이러한 평가와는 별개로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서 승리를 거둔 팀이자 아시아 최초로 유럽 국가를 월드컵 본선에서 격파한 팀, 아시아 최초의 토너먼트 진출 및 원정 8강 진출,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우승국 격파라는 의외의 진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기도 하다.[2]
대한민국과의 상대전적은 17전 1승 9무 7패로 절대 열세. 심지어 1승도 1990년 평양에서 벌어진 홈 경기이고, 이마저도 1-1로 끝날 경기를 북한인 주심이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경기 종료 직전에 북한에게 페널티킥을 줘서 북한이 간신히 승리한 경기이고 나머지도 남한을 상대로 심판이 북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행동을 하거나 더러운 수법까지 쓰며 필사적으로 했는데도 졌거나 겨우 억지로 비겼다. 실제 남한 국가대표팀들의 인터뷰를 보면 욕설이나 싸움을 거는 것 말고는 볼 것 없고 부상이나 당하지 말자는 반응이다. 반대로, 여자 축구의 경우 남한과의 전적에서 15승 3무 1패로 절대 우세를 보이고 있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지역예선(아시아)/2차예선/H조에서 같은 조에 속해 평양에서 1차 남북대결을 펼쳐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후 2021년 서울에서의 2차 남북대결을 앞두고 돌연 기권을 선언해서 월드컵 예선 탈락이 확정되었다.
현재 유니폼 스폰서는 없지만, 프로파간다 문구 없이 인공기 달랑 하나뿐이다.[3] 그리고 아주 유니폼 스폰서가 없는건 아니라서 가끔씩 아디다스[4] , 휠라, 엄브로[5] , 레게아[6] , JAKO 등과 계약을 한 적도 있다. 현재는 대북 제재 영향으로 외국 용품 제조사의 후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북한 내에서 자체 생산한 유니폼을 입기 때문에 브랜드는 따로 없는 듯 하다. 2019년 10월 15일에 있었던 남한과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경기 당시에도 해외에서 생산된 그 어떤 물품도 북한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미국 제조사 나이키의 유니폼을 입는 남한의 선수들과 유니폼 교환 또한 금지시켰다. 여담이지만 2015년 경부터는 유니폼도 바꾸지도 않고 계속 같은 킷만 입고있다.
주요 선수로는 한광성, 박광룡, 정일관. 장국철 등이 있다.
2. 역사[편집]
2.1. 과거~1966년[편집]
해방 이전부터 평양 지역에서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고, 실제 50~60년대 남한에도 실향민 출신의 선수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최정민.
북한은 남한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와 맞붙기 전에 이미 헝가리와 경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스코어가 10대0이었다고 한다.[7] 실제 이 경기를 뛰었던 선수가 훗날 월남해서 남한 대표팀에 들어가 헝가리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제공해 주기도 했다고.
2.2.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편집]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를 깨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월드컵 본선 첫 승과 함께 8강[8] 에 진출한 전적이 있다. 이 경기의 결과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당대 축구 종주국으로 명성을 떨친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0-1로 진 것과 더불어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1966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아시아 + 오세아니아 + 아프리카를 통틀어 당시 16개국 본선 진출 티켓이 고작 1장밖에 부여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보이콧을 했고, 아시아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월드컵 예선에 참여하지 않아서 예선 참가국은 호주와 북한 단 둘뿐이었다. 여기서 북한이 호주를 꺾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했다.
북한의 16강 조별리그 상대는 소련, 이탈리아, 칠레였다. 소련은 유로 우승국에 당시에는 전설의 골키퍼 레프 야신이 있던 우승후보국으로 지금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당대 최강팀 중 하나였고 실제로 이 대회에서 4위를 기록했다. 칠레 역시 전 대회에서 개최국 어드밴티지에 힘업어 3위에 오른 강팀이었다. 이탈리아는 수페르가의 비극 여파로 1950년부터 15년 넘게 부진했지만 1966년에는 강력한 수비에 힘업어 펠레의 브라질, 개최국 잉글랜드에 이은 우승후보로 꼽혔고 실제로 다음 1970년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북한은 소련에게 0-3으로 무기력하게 패했지만 칠레와 비겼고, 최종전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는 대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분노한 이탈리아 팬들은 귀국하는 자국 선수들에 달걀과 토마토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8강전에서 만난 포르투갈에 3-0까지 앞서기까지 했다. 물론 경기는 에우제비우가 그라운드에 나타나기 전이었고, 에우제비우가 출전하자 마자 연달아 4골을 폭발시켜서 북한 선수들에게 헬게이트가 뭔지 가르쳐줬다. 경기결과는 3-5로 포르투갈에게 패했다. 특히 3-0으로 앞서다가 순식간에 5골을 연달아 얻어맞은 당시의 북한 선수들은 패배한 굴욕감보다도 아연실색이 앞섰다.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패배를 당해 이후 수용소에 끌려가고 말았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것은 일부 선수가 고초를 당한 것이 와전된 것이다. 사실 김일성 입장에서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역전패 한게 아쉬웠을 뿐 어쨌든 2라운드까지 진출하는 성적을 올렸는데 잘가는 팀을 숙청시켜야할 하등의 이유 자체가 없었다.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에 의하면 사창가가 이유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당시 갑산파를 둘러싼 숙청에 애꿎은 축구선수들이 휘말렸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들 북한 대표팀이 수용소에 끌려간 것도 월드컵 몇 달 후였다고 한다. 스탠리 라우스 당시 피파 회장이 "공격에는 에우제비오, 골키퍼에는 레프 야신, 수비에는 신영규"라고 극찬받았던 신영규는 숙청당해서 지방의 도자기 공장 소속 축구팀에서 감독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0년대 말에 복권되어 평양에서 유소년 축구팀 관련 일에 종사했고, 말년에는 외국에 나가 살다가 1996년에 벨라루스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 대표팀 선수단 중에 확실하게 행적이 확인되는 인물은 이탈리아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박두익이다. 박두익은 1970년대 북한 대표팀 감독으로 맹활약하면서 남한과도 여려차례 대결했고, 이후에도 북한 축구계의 대표로 여러차례 모습을 보였다.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北선수들 탄광행?' 그래도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차범근이 국가대표였던 당시 박두익과 맞붙은 적이 있다고 한다.
영국의 다니엘 고든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리마축구단(The Game of Their Lives)을 보면 당시의 선수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도 나오고, 그들 중 박두익을 포함한 몇몇은 꽤나 고위층으로 출세한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출연한 인물은 당시 북한 대표팀 감독이었던 명려현, 골키퍼 리찬명, 수비수 림중선, 미드필더였던 림승휘, 한봉진, 박승진과 공격수 박두익, 량성국 등 8명이다. 그들이 인민복이나 정장을 입고 나온 장면에서 옷에 훈장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고위층으로 보인다.
다니엘 고든 감독은 이후에도 북한 정부의 협조하에 평양시의 두 여학생을 다룬 <어떤 나라>(2004년), 월북미군을 다룬 <푸른 눈의 평양시민>(2006년)을 연달아 제작하였다.
2.3. 1967년~2009년[편집]
안타까운건 정치에 의해 심히 좌지우지되는 북한 체육의 특성상 66년의 전력이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9]
1970년대는 그래도 한가닥 하던 북한의 기세가 남아있어서 아시아권에서는 나름 성적을 거뒀다. 주로 이 시기 북한은 아시안게임 축구와 올림픽 축구에 집중하며 출전했는데, 1974년 아시안게임 4위, 1978년 아시안게임 공동 금메달[10] 등 나름 성공적인 결과물을 얻었다. 또한 1976년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해 개최국 캐나다를 제치고 8강까지 기록하는 등[11] 선전했다. 이 시기 프로축구가 없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당시 아마추어만 참가할 수 있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내보내면서 좋은 결과를 많이 얻던 시절이다. 서유럽과 남미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거의 프로 선수들이니 올림픽(지역예선 포함)에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를 내보냈고.
1980년대 들어서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본선에 진출한 남한에 크게 자극받아 북한도 월드컵, 아시안컵, 연령별 대회 등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한다. 1980 AFC 아시안컵 쿠웨이트 본선 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진출하며 4위라는 성적을 냈고, 특히 준결승전에서 만난 남한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여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정해원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남한이 승리를 챙기고 결승에 진출한다. 이 경기는 아직도 한국 축구사의 명승부로 남아있는 경기다. 하지만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축구에서 불미스런 폭력 사태를 일으키면서 출전 정지 중징계를 받게 되면서 이 기세는 어이없기 꺾였고, 90년대 초반까지 북한 축구는 거의 올스톱되다시피 했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은 다시 아시아권에서 다크호스로 올라오는데, 1990, 1994 월드컵 최종예선에 연거푸 진출했고, 1992 AFC 아시안컵 일본 대회에 12년만에 다시 본선에 진출했으며, 특히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선 대진운이 크긴 했으나 무려 준우승, 은메달을 따내며 동메달의 남한보다 높은 성적으로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를 마무리했다. 1993년 인도에서 개최하는 소규모 축구대회인 네루컵에서 우승하는 등 북한 축구는 이 당시 꽤나 만만히 볼 수 없던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고난의 행군이 1994년부터 터지며 북한 축구계는 그야말로 초토화, 1998년 10월에 열린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참가 전까지 약 5년간의 모든 국제 축구대회에 불참한다. 영양이 필수적으로 중요한 체육계에 대기근은 정말 치명적이었고, 이 당시는 정말 축구가 그깟 공놀이가 된 시기기도 하다. 1995년에 1998년 월드컵도 기권했으며, 한일 월드컵도 기권했다. 약 10년이 지난 이후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북한은 다시 국제 축구계에 복귀한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 최종예선에 진출하면서 깜짝 성적을 내기도 했고, 2005년 남한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에서는 김영준의 결승골로 일본에 1대0으로 이기고 이어진 남북전에서 무승부를 거두는 등 호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4 아시안컵 예선 도중 또다시 징계를 먹고 2007년 아시안컵 예선 자체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매끄럽지 못한 북한의 행정은 여전했다.
2.4. 2010년 남아공 월드컵[편집]
1:1 데스매치로 치러지는 1차예선에서 몽골을 가볍게 때려눕히고 3차예선에 올라왔고, 3차예선에서 대한민국과 한 조에 묶이더니 우리나라의 무재배 전문 감독님이 다른 팀은 거의 다 때려잡아놓고 북한한테만 두 번 다 신선한 0:0 무를 선사하며 남북이 동시에 최종예선에 진출하였다.
게다가 최종예선 마저 대한민국이랑 같이 묶였다. 아랍에미리트를 2승으로 때려잡고 사우디한테 1승 1무를 거뒀으며, 이란이 8경기 5무라는 평화축구로 자멸하면서 조 2위로 본선에 다이렉트로 진출한다. 무려 44년만의 월드컵 복귀. 이 때 대한민국을 상대로 서울 원정은 잘만 와놓고 홈경기에선 태극기를 게양할 수 없다면서 3차예선과 최종예선 전부 중국에서 홈경기를 치렀는데, 다른 나라는 그런 거 없이 전부 김일성경기장으로 불러서 예선 전체를 통틀어 단 한번도 지지 않는 홈 깡패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최종예선 성적은 3승 3무 2패로 2패는 서울과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조 추첨에서는 브라질, 포르투갈, 코트디부아르와 같이 묶이는 최악의 조편성이 나왔다.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브라질전에서는 지윤남이 골을 터뜨리며 1-2 패배로 굉장히 선전하였으나, 2차전 상대이자 44년 만에 만난 포르투갈에게는 전반전은 0-1로 잘 버티다가 후반전에서 갑자기 골먹쇼를 하며 6골을 내리 실점, 0-7로 대패하였다. 역대 월드컵마다 한 팀이 대량실점으로 참패하는 경기가 하나씩은 꼭 있었는데 남아공에서 딱 한번 터진 관광경기가 바로 이 게임이었다.[12] 이어서 코트디부아르에게도 0-3으로 지며 0승 3패 득실 -11로 대회 전체 최하위를 찍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세웠다.
더 무서운 것은 브라질을 상대로 선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정일이 포르투갈전을 실시간으로 봤다고 한다. 실제로 대회 직후 외신에서 북한 대표팀의 김정훈 감독이 감옥에 갔다는 내용이 보도되며 한동안 시끄러웠다.[13] 11월에 김정훈이 AFC 주관으로 카타르에서 열린 감독의 날 행사에 참석하며 오보로 판명나긴 했는데... 대북 소식통으로 유명한 주성하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김정훈 감독이 잡혀간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귀국하자마자 감독은 바로 체포되어 로동교화소로 끌려갔고 선수들은 1주일간 특별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피파에서 북한 대표팀 아오지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북한에 해명을 요구하자, 당국이 부랴부랴 김정훈 감독을 석방하고 감독의 날 행사에 참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훈은 카타르 행사 이후 본인과 가족들이 모두 사라졌고 현재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김정훈의 아내가 남편을 구명하는 과정에서 김정은의 친어머니인 고용희 여사와의 친분을 언급했는데, 문제는 이 고용희 여사가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백두혈통을 강조하는 김정은 입장에서 숨기고 싶은 역린을 들춘 셈이 된 것이다.#
타 종목의 북한 국가대표선수 출신 탈북자도 해당 선수들이 처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월드컵 이전까지 축구선수들은 선수촌에서 특식을 제공받으며 특별 대우를 받았으나 월드컵 이후 더이상 선수촌에서 볼 수 없었고, 처벌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에서 진다고 다 수용소에 끌려가지는 않지만 그렇게 대패했는데 처벌을 받지 않는 건 북한에서는 말이 안된다고. 당시 북한이 월드컵을 사상 최초로 생중계하였는데[14] 그만 대패하면서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오지같은 곳에 끌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로동교화 정도는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리명국이나 홍영조 등 몇몇 선수들은 이후에도 선수로 계속 뛰었기 때문에 적당히 처벌받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북한 소식통발 소식이 그렇듯 신뢰도는 그닥이므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김 감독의 카타르 행사 참여까지다.
2.5. 남아공 월드컵 이후[편집]
2010 월드컵 진출과 동시에 2011 카타르 아시안컵에도 진출권을 따놓았기 때문에 아시안컵도 진출하였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만났던 아랍에미리트와 이란, 그리고 이라크와 같이 묶였는데 공교롭게도 UAE을 제외한 세 나라가 부시가 지정한 악의 축이라 반미모임 드립이 돌기도 했다. 결과는 아랍이랑 비기고 이란 이라크에게는 지면서 단 한골도 못 넣고 광탈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에서는 조 추첨 결과 일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15] 과 같은 조가 되었다. 그리고 6경기 중 4경기를 치른 결과 타지키스탄 상대로 1승 거둔 거 빼고 일본[16] 과 우즈베키스탄에 모두 져서 탈락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아시아 2차 예선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그것도 약체 필리핀에 2-3으로 패하는 부진을 보였고 이 패배로 22년만에 역대 2번째 외국인 감독을 영입했다. 노르웨이 출신으로 1990년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기록한 욘 안데르센이다. 다만, 선수 시절에는 활약했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마인츠의 분데스리가 1부 리그 승격을 이끈 것을 제외하면 미미하다.
이러한 원인은 북한대표팀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선수나 감독이나 현대축구의 흐름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있다. 당장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자국리그인 최상급축구련맹전 소속에 극소수의 재일 조선인 출신들이 J리그팀에서 뛰고 있다. 이렇다보니 북한도 최근 들어서 선수들을 유럽으로 진출시키며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치적 문제로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2016년 5월 미켈레 니콜레티 등 이탈리아 하원의원 2명이 북한 선수 최성혁과 세리에 A 팀인 피오렌티나간 계약에 관한 조사를 이탈리아 정부에 요구했다. 그 이유는 최성혁에게 지급된 돈이 북한에 흘러들어 가면 UN의 대북 제재 조치를 위반한 것 아니냐는 점과 최성혁의 활동 자유 등 인권이 보장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이 부담이 되는지 피오렌티나 측은 최성혁과 계약을 취소했다.
북한 역사상 첫 외국인 감독 선임은 남한(아나톨리 비쇼베츠)보다 1년 더 빨랐는데 19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헝가리 출신의 체르너이 팔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당시 북한은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까지 진출했지만, 최종 라운드에서 남한과 일본에 0-3으로 참패하며 6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2019 아시안컵 최종예선에서는 레바논에 홈에서 2-2로 비겼으나 원정에서 레바논에 0-5로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2연전을 모두 4-1로 대승하였고, 홍콩과의 최종전을 2-0으로 승리하며 조 2위로 아시안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예선에서 또 남한과 한 조가 되었다. 간만에 남한이 평양 원정을 갔으나 무관중으로 방침을 바꿨다. 경기 결과는 0-0 무승부. 그러나 정작 남한 홈경기 일정이 다가오자 코로나를 핑계로 기권했고 남한 홈 경기는 취소되었다.
전세계적인 코로나 19 사태 기간동안 북한은 단 한차례도 A대표팀 경기를 치르지 않다가, 2023년 11월 이후 2026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예선부터 다시 국제 대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