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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만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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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2년[1] 에 인조이재팬에서 혐한과 한국 네티즌들이 치고 박던 시절 나온 한국을 까는 노래인데, 원본은 플래시이며 노래를 부른 사람은 업로더의 조부로 추정된다.[2] 가사는 전형적인 일본 우익의 세계관과 식민사학을 담고 있다. 작사자, 작곡자는 불상(不詳). [3]
원본 플래시는 소위 '특정 아시아 3국(한국, 북한, 중국)'을 까는[4] 2ch발 특아플래시 보관소에서 볼 수가 있다. 당연히 다른 대한민국 관련 플래시도 대부분 이 작품처럼 혐한네타로 뒤덮여 있다. 왜곡을 뛰어넘어 창작에 가까워졌지만, 혐한초딩들에겐 이것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우리나라 만세' 한마디는 한국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혐한초딩이라도 아이고, 갠차나요(괜찮아요) 등과 더불어 익숙해져있는(?) 한국어 단어이다. 반대로 일본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인이라도 데스, 칙쇼, 빠가 정도는 익숙해져있는(?) 일본어 단어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가사[편집]
3. 관련 문서[편집]
[1] 영상에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 장면,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2002년에 만들어진 영상임을 알 수 있다.[2] 특히 비탁음 발음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보아 최소 1950년대 이전 출생자일 확률이 매우 높다.[3]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불상이며, 제작자가 홈페이지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4] 그리고 그 외에는 구 일본군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카테고리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미카제 찬양 플래시라든가...[A] A B 이런 논리라면 일본에도 세계 문명이 일본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주장들이 있다. 이 문서 참조[5] 사실이다.[6] 이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도자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통해 가져와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유교는 5~6세기에 왕인과 오경박사같은 백제인들이 가서 처음 가르쳐줬다.[7] 원래대로라면 ~しろ가 맞는데, ~しる라 적혀 있는 이유는 김영진(1947) 및 2ch 용어집 참고.[8] 스스로 김치냄새가 난다고 한탄하는 한국인은 없으므로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다.(...)[9] 에도 막부와의 교역으로 전해졌다면 몰라도 전쟁중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농작물을 전해줬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10] 일단 노비는 노예가 아니다. 더구나 백정은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차별이 남아있어서 형평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일본 우익과 일뽕들의 주장과 달리 노비제 폐지는 대한제국 시절인 갑오개혁으로 이루어졌지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게 아니다. 제도적 소멸이 아닌 사람들 인식 상의 신분제 소멸도 6.25 전쟁으로 이루어졌다. 정작 일본은 아직도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다. 부라쿠민 입장에서는 차라리 몰락 작전이 실행되는 게 나았을지도[11] 정작 일본은 어린 소녀를 위안부로 데려가서 썼다. 무려 10살짜리 일본인 소녀를 위안부로 이용한 증거도 있다. 존 마크 램지어는 한국인 위안부를 정상적 매춘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 10살짜리 위안부마저 정당한 매춘이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써서 전세계적으로 비판을 받았다.[12] 한글 교재는 총독부에서 출판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문제는 조선 현지의 교육 수준이 대학과정을 제외하고 일본의 중학교 과정이 최종 과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로의 접근성은 매우 낮았기 때문에(학교도 거의 없었다)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에서 조사한 한국인들의 문맹률(한국어와 일본어 둘 다 읽지 못하는 비율)은 80%에 달했다. 즉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문맹 하나 해결 못했을 정도로 그 당시 "교육"이라는게 기초적인 것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다.[13] 일제 초기에 기차나, 개발 계획 산미 증식 한다고 길거리에 앉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흠좀무.. (논문마다 주장이 다르다. 피해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정작 소작농의 분쟁을 해결시킨 것은 해방 후 제정된 조봉암의 농지개혁법이다.[14] 민둥산에 푸른 나무가 심어진 것은 광복 이후 박정희 정권 때 실시한 녹화사업의 결과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국유림, 민유림을 가리지 않고 목재부터 나무껍질, 나뭇잎, 송진 채취를 위한 소나무뿌리까지 한국과 일본의 산림까지 철저히 수탈했다. 그 결과, 한국의 산림은 면적이 크게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면적당 나무의 수가 크게 감소하여 말만 숲이지, 휑한 산에 나무가 띄엄띄엄 있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15] 강점 전 조선에서 자체측정한 결과가 전근대 측정의 한계로 실제 인구보다 적은 수가 나왔을 뿐이지 이미 구한말의 인구는 천만대 중~후반으로 추산되며 실제로 당대에 이천만 조선 동포라는 말이 제법 쓰인 것으로 보아 조선인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인구가 일제시기간 늘어난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급격한 증가율은 아니며 근대의 의학과 과학이 들어와 확산된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놀랄 일 또한 아니다.[16] 일본은 1870년대부터 징병제를 시행했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시행했는데, 실상 누가 남의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이 때 반긴 것은 친일파 내지 드디어 국민 취급을 하는 줄로 착각했던 사람들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과 일본군 해체로 징병제가 폐지되고 다시 시행하지 않았고 지금도 시행되지 않지만 한반도에서는 광복 후의 남북분단과 그 후 터진 전쟁을 전후로 해서 남북한에서 징병제가 다시 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한 내부에서는 분단 상황 때문에 병역의무를 필요악이라고 인식하는 것 외에는 대환영을 할 리가 아예 없다.[17] 이 네 줄은 자기모순이다. 당연히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이들은 일본국적을 강제로 박탈당했다. 이 이야기는 일본인으로서 의무를 이행한 대가의 권리를 얻지 못한 셈이다. 즉 일본은 의무에서만 국민을 내세우고 권리는 이런 식으로 외면한 거다. 물론 한국 땅에 살던 사람들이야 일본이 물러갔으니 일본국적이 없어진 거야 별 상관할 바 못 되었다. 하지만 해외(일본 본토 포함) 거주 한국인들의 상황은 다르다.[18]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각종 여성 인권 측면에서 봤을 때 여성의 적은 오히려 일본이다.[19] 한반도를 지금도 조선반도라고 부르는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북한과 그 동맹인 중국 뿐이다.[20] 급조된 증오성 노래라는 공통점이 있다. 단 그쪽과 달리 이 증오발언은 밈일지언정, 일본 넷 우익 그들의 리그내에서만 통용되던 내수용 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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