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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세(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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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의심할 여지 없이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
제45대 교황이자 성인. 재위 기간 동안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가톨릭 교회를 넘어서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거론된다.
대교황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이며, 175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축일은 11월 10일.
2. 생애[편집]
오늘날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주 피사 근교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본토인으로, 태어난 해와 젊었을 적의 행적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연대기에 전해지기로는 총명하고 웅변에 뛰어났다고 한다. 431년까지 부제로서 주로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일을 하였다. 440년에 교황에 선출된 레오 1세는 교황권이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교황권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면서, 이와 동시에 교리논쟁을 통해 이단자들을 축출하여 정통론을 확립했다.
443년 마니교가 로마 제국에 퍼지는 것을 알자,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히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니교를 배척하라고 명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참여하였다. 소아시아의 비티니아의 도시 칼케돈에서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린 이 회의에서, 교부들은 칼케돈 신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갖고 있는, 즉 '참 하느님이면서 참 사람'이라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는 단성론이 동방 교회에 침투하여 서방의 로마 교회과 동방 교회가 분열될까 우려해서였다. 이 공의회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내에 확고히 자리잡았지만, 이 과정에서 단성론파가 분리된 것은 물론 합성론을 지지한 교회들도 오리엔트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2.1. 이민족으로부터의 로마 보호[편집]
로마의 수위권이 교회의 단일성과 교회의 신앙과 서구 세계에 기여한 업적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민족 대이동 시대에 국가 질서가 전반적으로 와해되고 오랜 제국의 수도가 몰락했을 때, 이 베드로 대성당의 봉사만은 거의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반석임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어린 서방 민족들은 얼마나 고맙게 여겼던가! 오직 레오만이 앗틸라와 가이서리히를 대항하여 서로마를 보존할 수 있었다. 로마 교좌는 신생 서구 민족들의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처한 어린 교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큰 봉사를 했다. 그것도 비단 귀중한 고대의 유산을 보존하는 문화적 봉사일 뿐 아니라, 이 교회들의 건설과 보존을 위한 진정한 사목 봉사였다! 이 시대는 물론 이후에도 가톨릭 교회는 크게 교황직에 힘입어, 간단히 국가에 넘어가지 않고 비잔틴 황제들의 정교(政敎) 합일주의나 게르만 영주들의 교권분리주의에 맞서서 교회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었다. 과연 그것은 교회의 단일성에 기여하는 봉사였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173쪽
무엇보다 비(非) 가톨릭 신자들에게까지 이 교황이 알려진 것은 교황의 재위 기간 중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용감히 나서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위엄을 크게 드러낸 것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먼저, 452년 훈족이 서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마침내 로마까지 이르자, 당시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교황에게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레오 1세는 직접 로마 교외로 나가 훈족의 왕 아틸라와 회담하여 그를 말빨로 돌려 보냈는데, 황금전설에 따르면, 무장이고 호위병이고 없이 시종들 몇 명과 함께 성직자의 차림으로 온 레오 1세의 양 옆에는…
위의 그림처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아틸라가 군을 물렸다 카더라. 물론 이는 종교적인 전설이고 실제로는 교황이 아틸라와 담판을 통한 협상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 주된 정설이다. 일부 학자들은 '재물을 뒤로 슬그머니 찔러 넣으면서 협상했다.'고 본다. 어떤 방법이건 간에 레오 1세는 적장에게 직접 찾아가 손에 피 물들이지 않는 평화적인 외교 방법으로 국가를 지킨 것은 자명하다. 더욱이 이 시절 로마에는 이런 걸 앞장서서 할 수 있는 인물조차 없었다.
아틸라 또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대패한 후 전세를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어 전쟁을 일으켰는데, 아퀼레이아 점령전 등으로 물자가 부족했고 전염병이 돌고 식량도 부족했다. 425년에 금 350파운드, 435년에 700파운드, 443년에는 2100파운드를 매년 공물로 요구하고, 따로 금 6천 파운드를 일시불로 넘기라고 요구하고 받아내었으므로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실제 협상 내용은 밝혀진 것이 없다.[1] 훗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된 레오 1세의 석관 위쪽에는 위 장면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455년 이번엔 반달족이 쳐들어오자, 교황은 또 다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와 회담을 벌였다. 그리하여 로마 시내의 약탈은 막지 못했지만, 로마의 파괴와 시민들의 살육만큼은 막아 내었다. 오직 말빨만으로! 다시 말하자면, 이 때는 반달족한테 찔러 줄 돈도 없었다. [2]
이때 레오 1세가 반달족의 가이세리크와 맺은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교 교회와 관련 시설ㆍ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2.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이리하여 로마는 그 옛날 자신이 박해하던 그리스도인에게 2번이나 구원을 받은 셈이 되었다.
이 덕분에 로마 시민들은 레오 1세에게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바쳐서,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고, 이후부터 로마 교황들이 아비뇽 유수 이전까지 정치 영역에 손을 뻗치면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
레오 1세는 반달족의 로마 약탈 이후인 461년 선종했다.
3. 대중매체[편집]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아틸라 6번째(마지막) 미션에서 수도사 영웅으로 등장한다.
[1] The Rhetoric of Power in Late Antiquity: Religion and Politics in Byzantium By Elizabeth DePalma Digeser, Justin Stephens, Robert M. Frakes 70p, The Pope Vs. Attila the Hun By Charles L. Mee Jr.Ancient Rome: A Military and Political History By Christopher S. Mackay 343p[2] 사실 이건 가이세리크가 장기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로마를 불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