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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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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황해북도 서쪽 끝에 있는 도시. 황해북도 소재지[4] 이다. 인구가 개성시보다 조금 적은데, 일제강점기의 인구가 2:1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배로 증가하여 따라잡은 것이다. 물론 개성에 문화재가 가득한 데다가 개발할 평지가 적어서 상대적으로 인구 증가가 더디게 된 점도 감안해야 되기는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의정부시가 사리원시와 가장 유사한 도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의정부시와 사리원시가 해당 도의 제2청사(황해북도도 황해도에 속하면 해주-사리원 이원체제) 위치이기도 하고, 남북 분단 상황에서 (개성을 제외하고) 각각 접경지에 가장 가까운 지역 중심 도시라는 점이 같다.
2. 지리[편집]
박민하: 사리원이 어디야?
2017년, 시 중심부 경암산 인근[6] 에서 촬영한 사리원 시내. 멀리 보이는 산이 정방산이다.
서쪽으로는 넓은 재령평야를 바라보고, 동북쪽으로는 경암산과 마주한다. 평야에 있는 도시인 만큼 북한 제일의 농업도시로,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농사 시험장이 있다.
시내에는 재령강 쪽으로 향하는 운하를 뚫어놓은 것이 특징. 시내 중심부 경암산(景岩山) 공원에는 민속거리라는 것을 조성해 놓았는데, 한반도 주요 역사 유적들의 미니어처를 전시하고 있다. 북한 유적뿐만 아니라 경주에 있는 첨성대 미니어처도 있으며, 조선시대 건물인 경암루가 그 안에 있다.
사리원시의 정방산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전갈의 서식지로, 북한 천연기념물 171호로 보호하고 있다.
기후는 서울에 비해 모든 달의 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이 각각 2℃가량 낮다. 냉대동계건조기후(Dwa)에 속한다. # 강원도 춘천과 기온이 비슷하되 강수량이 대구보다 약간 낮다.
3. 역사[편집]
본래 봉산군의 일부로 시 승격 이전에는 봉산군 사원면이었다. 이전의 역사는 봉산군 문서 참고.
사리원은 '-원(院)'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평양과 개성을 잇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교통 취락으로 발전한 곳이다. 고려시대까지 평양과 개성을 잇는 주요 교통로는 자비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자비령을 넘는 길을 폐쇄하고 서쪽의 동선령(洞仙嶺)을 넘는 길이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다. 이때 동선령을 넘는 사람들이 동선령 남쪽 사리(沙里)에서 숙박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이윽고 사리에 숙박시설인 원이 설치되어 '사리원'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여 읍치인 동선면보다 더욱 번화하게 되었다. 유명한 봉산탈춤도 여태 전승되던 동선면이 아닌 사리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1905년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사리원을 통과하고 1912년 동선면에 있던 봉산군청까지 사원면으로 이전하면서 사리원은 확고부동한 봉산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1921년 사리원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 사리원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기준 사리원읍은 면적 31.77㎢, 12개 리로 구성되었다. 아래 이북5도위원회 행정구역 참고. 8.15 광복 이후 북한 치하에서 1947년 시로 승격되어 봉산군에서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의 이북 5도 체계로는 1947년이 아니라 1945년 광복 직후에 봉산에서 떨어져 '사리원시'가 되었다고 간주한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레이스를 벌리던 시점에 짧은 전투 후 사리원을 함락시켰는데, 이 때 잠시 대한민국에서 사리원시 임시 시장을 파견한 적도 있다.[7] 물론 중국 인민지원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사리원시를 다시 북한에 내주고 사리원 시장도 남쪽으로 피난갔다. 이 때문에 임기는 3개월이 채 못 됐다고... 이북 5도에서 사리원을 별도로 관리하는 이유는 한국 정부에서 사리원 시장을 파견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문서로 남아있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2년 현재 이북 5도에서 사리원시와 송림시를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파일:정방산.jpg
이북에 있는 데다가 딱히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국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면 고려 시대 다포식(多包式) 건축 양식을 보전[8] 하고 있는 응진전이 있는 성불사가 부근[9] 에 있음을 알 것이다. 참고로 이 성불사가 가곡 <성불사의 밤>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지금도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리원의 관광명소로 성불사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성불사를 보호하듯이 두르고 있는 정방산성 역시 고려 시대에 세워지고 조선 후기 김자점이 대대적으로 보수한 12km 규모의 거대한 산성으로, 전근대 시기 황해도 최대의 군사 거점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이 5천여 병력과 주둔했으나, 청나라 군대가 산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한성으로 바로 진격하면서 무력화되었다. 정문격인 남문 정방루[10] 인근 성벽은 7~9m에 달하 위용을 자랑하고, 치성과 곡성 및 4개의 장대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성가퀴 및 여장도 잘 남아 있으며, 총안과 사혈용 구멍이 무려 6천여개나 있다. 북한의 국보 89호로 지정되어 있다.
4. 경제[편집]
국토연구원은 사리원은 농업 중심의 도시였으나 최근 주민 생활에서 상업 활동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다고 평가한다. 분단 체제 하에서 신의주, 청진보다 시장화 진전에 불리하다고 평가 받는다.
국토연구원은 농업·행정 기능 중심에서 상업 기능에의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으며, 2013년경 같은 시기에 탈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청진에 비해 민간 주택 개발은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하였다. 계층별 주거지 분화가 시작된 정도다. 그러나 큰 차이는 아니라서 2019년 인근 봉산군 등지에서 주택 건축이나 물류 사업을 하는 개인 돈주들에 고용되면 농촌에서 일하는 것보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소위 '농민 일공[11] '이라고 하는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민이 이렇게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그 돈으로 곡식을 바치겠다고 해도 불법이다. #
주민 대부분이 장마당을 통하여 생활 물자를 조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구천장이나 대성장은 국가 계획에 따른 승인된 공식장이고, 상매동 등의 소형 장마당은 도내에서 승인을 해준 것이라고 한다. 시 외곽에 장마당이 있으나 2010년대 들어 인근의 집값이 올라갔다고 한다.
평양을 수도로 하는 분단체제 하에서 꽤 재미를 보고 있다. 우선 수도 평양과 해주, 개성 등 남부 주요 도시를 이어주는 교통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더불어 평양과 강원도 주요 지역들 사이의 교통도 분단된 현재로서는 사리원을 거쳐야 하는 형편이다.[12] 이러다 보니 북한 최대의 도매시장인 평성시장에서 황해도, 강원도로 들어가는 물자들은 거의 무조건 사리원을 경유하고 있다. 또한 원산을 통해 반입된 일본산 고급 제품들, 해주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로 반출되는 쌀 등의 제품들도 사리원을 경유한다. 한 마디로 평성시장의 하위호환인 셈이며, 별다른 산업 시설이 없던 사리원은 이런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서비스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그리고 평야 지역답게 쌀이 유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갑에 나온 사리원 출신 탈북자는 사리원 쌀은 굉장히 부드럽고 맛있다 한다.
개성과 연계 발전을 위한 관광 개발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어, 유튜브에 사리원을 방문한 외국인의 동영상이 있는 편이다. 네덜란드인 유튜버 아이고바트도 방문한 적 있다. 중국의 비리비리 같은 사이트에서도 중국어로 "沙里院"이라고 검색하면 나온다. '민속놀이터'라고 하는 시설 근처에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다. 한복을 대여할 수 있고 지역 특산물인 막걸리[13] 를 주기도 한다고 한다. 문제는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주민과 대화를 하면 감시요원이 있는지 확인하고 주민들이 도망간다는 점이다. 그런 감시요원이 없으면 주민들이 상당히 반겨준다고 한다. (한국계 교포의 개성, 사리원 방문기)
5. 교통[편집]
철도는 평부선의 사리원청년역 - 동사리원역이 있다. 사리원역은 황해청년선의 분기역으로, 신천이나 해주 방면으로 갈 수 있다. 평양개성간 고속도로가 시가지 북부를 지나고 있으며, 평양-개성간 1급도로와 사리원-해주간 1급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택시와 버스도 있다.
시의 서쪽 경계인 재령강에서 시내로 가는 운하가 있다.
서울에서 직선으로 약 150km, 철도로는 200km 거리에 있다.
6. 문화[편집]
문화시설로 사리원민속촌, 경암호, 경암루, 사리원청년경기장(2009년 준공, 2016년 재건축 / 2만 2천 명 수용), 사리원체육관(2021년 준공 / 1천 명 수용), 황해북도예술극장(2009년 준공 / 1천 명 수용), 사리원청년야외극장(2020년 준공)이 있다.
7. 남북통일 이후 전망[편집]
통일이 되고 안정이 되면 고양시급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대전과 지정학적 위치가 상당히 비슷하고.
이렇게 보면 통일 되면 말짱 꽝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별다른 산업 시설이 없는 것은 광적으로 이동거리 단축에 집착하는 북한 특유의 중앙집권식 계획경제체제 때문이고[16] , 통일 후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사리원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도로·철도 간선축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넓은 개발 부지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이점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17] 일제강점기 황해도청 소재지는 해주였지만, 이미 1923년부터 도내 각계각층에서 사리원으로의 도청 이전 요구가 빗발칠 정도로 사리원은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던 도시였다. 만약 해주에 철도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공주시가 그랬듯 사리원에 속절없이 도청을 뺏겼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 통일 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 프랜차이즈 점포가 입점하는 건 시간 문제이다. 그야말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물류의 중간 기착점이란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요식업과 숙박업이 강세를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 역시 관련 업종에 종사하거나 자영업 형태로 일할 수도 있으므로 경제 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남한식으로 개편된다면 역사성이나 행정구역 특성상 봉산군과 도농통합할 가능성도 높다. 이 경우 익산시(이리), 아산시(온양), 문경시(점촌), 보령시(대천), 정읍시(정주), 거제시(장승포), 통영시(충무), 남양주시(미금)[18] , 연기시(조치원)[19] 가 그랬던 것처럼 사리원은 역사적 지명이나 동 이름으로만 남고 봉산시가 될 가능성이 있다.[20] 혹은 반대로 사리원의 지명도가 비교적 높다는 이유로 구미시와 포항시처럼 봉산이 사라지고 사리원시로 통합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