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히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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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초대 아리마 기념 우승마다.
2. 혈통[편집]
아비인 쿠모하타는 1939년 일본 더비마이자 1952년~1957년 일본 리딩 사이어였다. 부자 현창마 중 가장 오래된 경우다.[8]
모마 시라하타는 현역 30전 8승을 기록했고 시라하타의 전형제 동생으로 1949년 후쿠시마 기념, 1952년 마이니치 왕관 우승마 뉴 모어 나(ニユーモアナ)와 1953년 킷카상, 1954년 천황상(봄) 우승마로 1954년 연도대표마에 오른 하쿠료(ハクリヨウ)가 있다. 모계 5대모는 코이와이 농장의 기초 수입 번식 암말 중 하나인 뷰티풀 드리머(Beautiful Dreamer,1904)다.
3. 생애[편집]
아명은 이와하타였지만 닛타 건설의 사장인 닛타 신사쿠가 구매하면서 이름을 자신이 경영하던 극장 메이지자에서 따온 메이지 히카리로 변경했다. 마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혈통에 걸맞지 않게 땅딸막했지만, 조교를 받으면서 균형잡힌 마체가 완성되어 데뷔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3.1. 1954년 (현 2세)[편집]
데뷔전에서 5마신차로 압승한 것을 시작으로 2차전에선 기대주였던 케곤을 꺾고, 3차전에선 토키츠카제[9] 의 산구인 오토키츠를 꺾으며 3연승을 거뒀다. 연말엔 관동 3세(현재 2세) 최강전인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까지 승리하여 클래식 최유력 주자로 거듭났다. 그해 생긴 시상식인 케이슈샤상에서 초대 최우수 3세 수말로 선정되었다.
3.2. 1955년 (현 3세)[편집]
이듬해에도 2승을 더 올리며 6연승을 기록했지만, 사츠키상 전초전인 스프링 컵에서 실속하여 5착을 하고 말았다. 처음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츠키상 3일 전에야 오른쪽 뒷다리 부상으로 판명났다. 닛타는 그래도 사츠키상 출전을 강행하려 했지만 경마 담당 비서였던 오오카와 케이지로의 설득으로 결국 취소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메이지 히카리는 시즈오카현의 온천에서 3개월간 요양했다.[10] 휴식하는 동안 사츠키상은 메이지 히카리가 3전 3승한 케곤이, 더비는 메이지 히카리가 2전 2승한 오토키츠가 우승했다.
반년간의 휴양 끝에 복귀한 오픈전에선 작년 오카상마 칸세이에 이은 2번 인기로 출전했지만, 1600m 코스 레코드를 달성하며 승리를 따냈다. 마이니치 왕관에선 도주하는 사스케하나를 잡지 못하고 2착을 거뒀고, 올커머에선 사츠키상마 케곤과 암말 2관마 야마이치를 꺾고 승리했다. 킷카상 2주 전에는 교토의 오픈전을 승리하며 킷카상에 나섰다.
킷카상에서는 더비 이후 6연승을 달리던 오토키츠에 이은 2번 인기를 받았다. 하지만 메이지 히카리는 최종 코너에서부터 뛰쳐나가며 2착한 오토키츠를 10마신 차이로 벌리고 타이 레코드까지 기록했다.
이후 오픈전에서 1승을 추가하며 4연승을 달성했지만, 연말의 특별 경주에선 허리 부상으로 6착을 하고 말았다. 그해 케이슈샤상에선 오토키츠가 연도대표마에, 메이지 히카리는 최우수 4세 수말에 선정되었다.[11]
3.3. 1956년 (현 4세)[편집]
첫 경주로 교토의 전초전을 우승하고 천황상에서도 2착마와 5마신 차이로 벌려 킷카상에 이은 타이 레코드로 우승을 차지했다. 다음 핸디캡에선 64kg의 근량 때문에 3착으로 밀렸다. 그 다음달엔 닛타가 죽고 그 부인인 닛타 마츠에에게 명의가 넘어간다. 여름 휴양 후 복귀한 메이지 히카리는 오픈전에서 승리하고 올 커머에선 2착한다. 그 다음 경기에선 다시 승리를 챙겼다.
연말에는 그해 처음으로 생긴 그랑프리 대회 나카야마 그랑프리에 출전했다.[12] 팬 투표에선 그해 킷카상마 키타노 오에 이은 2위로 선출됐고, 경주 당일에는 1번 인기를 받았다. 출전마 12마리 중 7마리가 팔대경주 우승마[13] 라는 초호화 멤버 사이에서 출전한 메이지 히카리는 키타노 오를 3마신 차이로 따돌리고 2600m 일본 레코드를 기록했다.
조교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해외 원정까지 생각했으나, 마츠에의 강력한 희망으로 그대로 은퇴했다. 그해 케이슈샤상에선 만장일치로 최우수 5세 이상 수말 및 연도대표마에 선출되었다.[14] 이후 나카야마 경마장에서 일본 경마 역사상 최초로 은퇴식이 열렸다.
3.4. 은퇴 후[편집]
은퇴 후 씨수말이 되었으나 그당시 일본 경마계는 일본산마 종마를 냉대했기 때문에 8대경주 승리마를 내놓진 못했고, 그나마 중상 승리마를 5마리 내면서 선방했다. 그중 오샤치[15] 가 1974년 카부토야마 기념을 우승한 아이언 하트를 배출하며 4대 연속으로 중상을 승리한 일본산마라는 기록을 세웠다. 외손녀 중에는 1971년 천황상 가을과 아리마 기념을 이긴 암말 토메이가 있다.
1980년에 죽었지만, 그당시엔 과거의 명마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일자나 사인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에 현창마로 선출되며 아비인 쿠모하타와 함께 부자 현창마가 되었다.
4. 기타[편집]
- 주전 기수인 에비나 타케고로는 메이지 히카리의 날카로운 순발력을 일본도에 비유했다. 약간 허약한 점도 있었지만 도주도 추입도 자유자재인 최고의 말이라고도 평했다.
5. 경주 성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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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기준으로 29세.[A] 현 아리마 기념[2] 아리마 기념이 아닌 나카야마 그랑프리일 때 유일하게 우승한 말이기도 하다. 바로 다음해 1월 9일 아리마 요리야스 이사장이 사망하며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나카야마 그랑프리에서 아리마 기념으로 명칭이 바뀌었기 때문.[3] 현 JRA상 최우수 2세 수말.[4] 현 JRA상 최우수 3세 수말.[5] 현 JRA상 최우수 4세 이상 수말.[6] 중상마만 서술.[7] 1962년 나루오 기념 우승마. 현역 32전 10승[8] 선출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토쇼 보이와 미스터 시비가 먼저다.[9] 암말로 1947년 사츠키상과 오크스를 승리한 변칙 2관마. 오토키츠를 포함한 뛰어난 산구를 여럿 배출하며 현창마에도 선출되었다.[10] 조교사 후지모토 토미요시는 이후 경주마 종합연구소에 온천이 개설된 것을 보고 자기에게 선구안이 있었던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11] 현재는 규정이 바뀌어서 연도대표마는 각 부분 수상마 중에서만 뽑을 수 있다. 상을 못 받은 경주마에게 아무것도 안 주고 넘어가기 아쉬운 경우에는 대신 특별상을 수여한다.[12] 이듬해에 명칭을 아리마 기념으로 바꾼다.[13] 메이지 히카리 외에도 1956년 사츠키상마 헤키라쿠, 1956년 더비마 하쿠치카라, 1956년 킷카상마 키타노 오, 1956년 오크스마 페어 만나, 1954년 2관마이자 1955년 가을 천황상마 다이나나 호슈, 1956년 가을 천황상마 미드팜 등이 출전했다.[14] 한 경주마가 3년 연속으로 2세, 3세, 4세 이상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메이지 히카리가 최초이며, 두번째는 11년 차이나는 암말인 야마핏이다. 수말로만 한정하면 65년 차이의 콘트레일. 오르페브르도 3년 연속으로 최우수상을 받긴 했지만 최우수 2세 수말은 그랑프리 보스에 밀려 받지 못했고 4세 이상 수말을 2년 연속으로 받았다.[15] 1965년 도쿄 대상전 우승마.[레코드] [16] 이 당시엔 아리마 기념이 생기기 전이라 팔대경주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