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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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장군.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 참전했다.
2. 상세[편집]
아버지가 육군 장교여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을 동경하게 되었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였고 사관학교들은 졸업식을 조금 앞당겨 장교를 전장으로 보냈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장 계급으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는데 사실 처음부터 해당 전선을 지휘했던 게 아니라 도중에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옮겨가자 대타로 연합국 제15집단군 지휘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한때 몬테카시노 전투와 같은 격전을 치루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전선이 평온한 상태였는데, 이는 우선순위에 따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태평양보다 유럽 쪽에 우선순위가 가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전선은 2부 리그 취급. 그래서 물자와 병력이 노르망디에 비해 많이 뒤쳐져 적극적인 공세에 임하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연합국 내 높으신 분들조차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다. 이유야 어쨌건 책임자인 마크 클라크 장군이 덤탱이를 쓸 수 밖에. 그 외에도 로마에 가장 먼저 입성하기 위해 적군의 후퇴를 방치한다든지 해서 연합군 내에서 평판은 매우 좋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처칠이나 아이젠하워는 그를 신뢰했고 그는 1945년 3월 부로 미국 육군 대장에 임명되어 맥아더와 함께 미국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종전을 맞았다.
후에 6.25 전쟁에서 1952년 8월 15일 나토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B. 리지웨이를 대신해 3대 유엔군 총사령관을 맡아 전선을 지휘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당시 유엔군 대표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다만 클라크 또한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클라크는 휴전협정 막바지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대규모 공세를 위해 원산지역에 기습 상륙작전을 펴겠다고 건의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당시, 서울 동숭동 미8군 사령부에서 재차 상륙작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휴전협정에 조인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군인이었다.
3. 저서[편집]
-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4. 여담[편집]
- 6.25 전쟁 때 휴전 회담장에 가기 직전 클라크는 이승만을 예방했는데 이승만이 견장에 달린 별 4개 계급장을 보면서 "이건 적에게 항복하라고 달아준 거냐?"며 비꼬았다고 한다.[1]
- 김영옥이 이탈리아 전선에 있었을 때 당시 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는 로마 점령 이후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데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김영옥은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클라크가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고 한다.
불란서 츤데레 황제 폐하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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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승만은 휴전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