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바르디아 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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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랑고바르드 왕국과 중세 이탈리아 왕국을 상징하는 왕관이자 가톨릭의 성유물이다. 은으로 된 띠 주위에 금을 두르고 보석으로 장식한 형태이지만, 예수의 몸에 박혔던 실제 못인 성정을 두들겨 펴 발라서 철이 들어가 있다고 전해져 '철관'으로 불린다. 현재는 몬차 대성당에 보관되어있다.
2. 역사[편집]
랑고바르드 왕국은 다른 게르만족 왕국이 그랬듯이 그 당시 기술력 부족과 전통적 요소로 철로 만든 왕관을 썼다. 전승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철관을 제작할 때 예수의 몸에 박혔던 실제 못인 성정 중 하나를 펴 발려서 붙였다고 한다.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한 뒤 그는 이탈리아 군주로서 이 철관으로 대관식을 받았으며, 이후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들 역시 이 철관을 왕관으로 삼으면서 롬바르디아 철관은 이탈리아의 왕권을 상징하게 되었다. 거기에 성정 중 하나가 붙어 있으니 종교적 권위도 높았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뒤로 로마왕들은 먼저 이탈리아의 국왕으로서 롬바르디아 철관으로 대관식을 치른 다음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신성 로마 황제로서 대관을 받았다.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은 전통적으로는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에서 치렀지만, 콘라트 2세 이후에는 밀라노에서도 대관하게 되었고, 카를 5세는 볼로냐에서 이탈리아 국왕 대관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동시에 받았다. 카를 5세를 마지막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이 더는 교황의 대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1] 이탈리아 국왕 대관 역시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롬바르디아 철관은 대관식 없이 한동안 보관되다가 나폴레옹 전쟁 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서 이 철관으로 대관식을 치렀다.[2]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롬바르디아 지역과 베네토 지역은 빈 회의에 의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군연합이 되었고, 롬바르디아 철관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이 철관으로 대관식을 치른 마지막 군주는 페르디난트 1세였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발발하고 사르데냐 왕국이 롬바르디아 지역을 합병하자 롬바르디아 철관은 빈에 보내졌다가 이탈리아로 반환되어 몬차 대성당에 보관되었다. 그 뒤 롬바르디아 철관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상징이 되었다.[3]
3. 국가[편집]
4. 기타[편집]
-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서 언급된다. 선장 에이해브는 술을 마음껏 마시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에 술을 퍼마시며 술주정을 하는 도중 자기 머리 위에 이 관이 씌워져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에이해브의 폭군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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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는 카를 5세의 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교황의 대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선제후의 투표만으로 황제로 선출될 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카를 5세의 대관식은 교황을 꺾었다는 정치적 세레머니이자 요식행위에 불과했을 뿐이다.[2]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트가는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정착한 랑고바르드족에게서 기원했다.[3] 정작 사르데냐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 가문인 사보이아 가문의 군주들은 초대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왕도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심지어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도 사르데냐 국왕이 아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시칠리아를 얻었을때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