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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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Londonderry, Derry
아일랜드어: Doire
1. 개요[편집]
데리/런던데리는 영국의 도시다. 북아일랜드에서는 벨파스트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아일랜드 섬 전체에서는 4번째이다. 별명은 처녀의 도시(Maiden city).
데리는 옛날 아일랜드어로 '떡갈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흔히들(심지어 개신교 연합주의자들마저도 일상적으로는) '데리'라고 부르며 공적인 때만 '런던데리'로 표현한다. 포일 강을 사이에 두고 도시가 양분돼 있는데, 서쪽에는 과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침입을 막고자 건설된 성채도시가 남아있다. 포일 강에는 두 개의 교량과 한 개의 인도교가 놓여있다. 2001년 인구 조사에서 83,652명이었고 인근 도시지역까지 합하면 인구는 90,736명이다.
데리는 독립국 아일랜드의 도니골 카운티와 경계를 맞대는데, 도니골 카운티를 비롯한 아일랜드의 북서부 3개 카운티는 북아일랜드의 6개 카운티와 함께 전통적인 지역 구분 상 얼스터를 이룬다. 아일랜드 자유국의 독립으로 졸지에 다른 나라가 됐지만 지금까지도 오랜 세월 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6세기 도니골 출신의 콜룸바를 수호성인으로 받들며 신성시한다. 2010년 정부주관의 영국 문화의 도시로 선정돼 2013년은 '데리 방문의 해'가 되었다.
철도교통은 북아일랜드 철도의 종점 중 하나인 런던데리역이 포일강 동쪽 워터사이드(Waterside)에 있으며, 이걸로 벨파스트까지 갈 수 있다. 노면전차도 있었으나 1919년에 폐선.
2. 데리/런던데리 명칭 분쟁[편집]
'런던데리'의 어원은 1613년 제임스 1세시절 당시의 데리가 런던 길드의 자금을 통해 런던의 식민시가 된 것에서 유래한다.
당연하지만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런던데리라는 표현을 매우 싫어하여 그냥 데리(Derry)라고 부른다. 민족주의자들이 런던데리가 적힌 표지판에 '런던'이라는 글자를 지우는 일도 있었다. 런던데리(Londonderry)의 런던(London)은 영국에서 가장 긴 묵음이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 한 나라 안에서 명칭 분쟁이 있는 셈. 이게 아예 북아일랜드의 두 진영을 구분짓는 십볼렛으로 쓰이고 있다. 분쟁을 피하려고
3. 역사[편집]
앞서 명칭에서 언급한 대로 1613년 제임스 1세시절 당시의 런던의 식민시가 되었고 영국계 신교도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명예 혁명으로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반격을 위해 아일랜드에 상륙한 제임스 2세의 군대에 의해 1688년 12월부터 도시가 포위되었으나, 주민 3만 명 중 4분의 1이 아사하는 희생 끝에 이듬해 7월 윌리엄 3세가 보낸 영국 해군 지원군이 도착하여 포위가 풀렸으며, 이 때부터 적에게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다는 뜻인 '처녀의 도시'라 불리게 되었다.[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송선단을 호위하는 미합중국 해군 함정들이 이곳 항구를 빌려 썼다.
한때 종교적 대립이 심각했으며 영국의 지배에 대한 아일랜드 주민의 반발이 얽혀 있어 양자의 충돌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급기야 1972년 영국 정부군과 시민 사이에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 이른다. 이 도시는 인구의 75%가 가톨릭 교도인 도시이며, 지금은 과거처럼 테러가 빈번하진 않지만 아직도 영국에 대한 반감이 높다.
4. 관련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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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 나온 "항복은 없다!(No Surrender!)"는 구호는 이후 20세기 후반의 종교갈등 때 신교도들이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