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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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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정치인. 제3대 한국 통감, 초대 조선 총독, 다이쇼 시대 제18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조선에 억압적인 헌병 경찰 통치를 펼쳐 악명높았으며 총리 재임 기간 중에도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는 등 강경파였다.
2. 생애[편집]
2.1. 군문에 들다[편집]
1852년 일본 야마구치현[2] 일본 하급 사무라이 가문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우타다 마사다케(宇多田正毅)[3] 였으나 외가에 양자(養子)로 입적하면서 자신의 씨(氏)도 어머니의 혼인 전 씨인 데라우치(寺內)로 바꿨다.
1865년 초슈번 제대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유신 직후 보신전쟁이 발발하자 종군했다. 187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877년 사이고 타카모리가 세이난 전쟁를 일으키자 참전하였으나 타바루자카 전투에서 오른손에 총탄이 명중하여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세이난 전쟁 이후에는 전방의 야전부대보다는 군정과 군교육의 길을 걸었다. 1882년부터 1886년까지 프랑스에 군사유학을 다녀왔으며 덕분에 이미지와는 다르게 프랑스어가 유창해서 훗날 야마가타의 외교사절을 맡기도 했다. 돌아온 후 초슈벌의 지지를 받아 승진가도를 거쳤다. 188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으며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병참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1898년, 교육총감, 육군대학 교장, 참모본부 차장을 거쳐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자 일본측 대표로 연합국 회의에 출석하여 의화단 진압에 참여했다.
1902년 제1차 카츠라 타로 내각에서 육군대신 겸 교육총감에 임명되어 오랫동안 재임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1906년 육군대장으로 승진했으며 러일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육군대신으로 재직하며 초슈벌의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후 만주 침탈을 위한 공공기관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위원을 맡았다. 1908년 제2차 카츠라 내각이 들어서자, 데라우치는 육군대신과 잠깐 외무대신이 되었다.[4] 데라우치는 여러 전쟁으로 다져진 인물이었고, 정치적인 야심은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1910년 5월, 한국통감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었다.
2.2. 초대 조선 총독[편집]
헌병경찰통치로 조선인을 억압했다.
1910년 7월 2대 한국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5] 가 물러나면서[6] , 메이지 덴노의 임명으로 한양으로 입성하여 3대 한국 통감에 부임하였다. 통감 임기 시작일은 5월 30일이었으나 한일합병 조약문을 소지한 상태로 7월 23일에야 왔다. 사실상 한일합병 조약을 하러 부임한 셈.
한일병합 착수를 위해 동년 8월 16일 매국노 이완용과 농상공 대신[7] 조중응 등 친일파 대신을 통감 관저로 비밀리에 불러들여 병합조약을 밀의(密議)하고 22일 이완용을 내세워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거치게 한 뒤 비밀리에 총독 관저에서 이완용과 양자간 첫 한일병합에 관한 조인식을 가졌다. 이레 뒤 황제의 도장을 강탈한 끝에 병합조약을 29일 공식 발표하였다.
이렇게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경술국치)을 하면서 메이지 덴노에게 총독직을 임명받아 일본 육군대신을 겸직하여 초대 조선총독으로 격상 부임하여 조선을 지배하였다. 10월 1일에야 총독으로 취임하였는데, 총독 취임 하루 전날 이재명 의사를 사형시켰다.
총독이 되기 직전부터 자신의 통치를 반기지 않거나 반항하는 한국인들을 억압하러 부임 초기부터 무단통치 및 헌병의 경찰직무 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 주차 헌병 조례'(1910년 9월 12일자)'를 발표하여 육군 헌병을 증원하고 경찰 업무를 맡도록 조치했다. 육군 헌병에서 장교 30명, 하사관 600명, 상등졸 3,000여 명을 충원받아 각 지역에 헌병대 분견소를 세우고 조선을 총칼로 억눌렀다.
총독이 된 그는 조선을 일본의 속령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집회 취체령'을 공포하여 모든 사회 단체를 해산[8] 시켰으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또, 조선의 애국가 등을 불온 선동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교육상에서 조선인들을 황국신민화하고자 친일(親日) 성향 학교를 세웠다.
토지사업에서도 그는 조선 농민들의 농토(農土)의 상당수를 총독부 사유지로 지정하여 침탈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친일파, 매국노들에게 이를 매각하여 넘기기도 하였다. 이 탓에 조선의 지주와 농민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물론 빚더미까지 안았고, 농토를 강제로 빼앗겨서 농사도 못 짓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9] 또한 조선 회사령을 실시하여 '산업보호'를 명목으로 회사들을 등록제가 아닌 허가제로 운영하였다.[10]
또한 식민 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부군면 통폐합을 했다. 1911년, 데라우치는 조선의 남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1911년 조선병합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위를 수여받았다.
2.3. 내각총리대신 시절[편집]
1916년,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찍힌 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뇌물 사건으로 총사퇴하면서 원로들은 데라우치를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으로 낙점하였다. 이에 데라우치는 6년간의 조선 총독직에서 사임하고 10월, 일본 도쿄도로 건너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거국일치 내각을 수립했다. 조선 총독 → 총리로 승진한 첫 사례. 여기에 원수 칭호를 받고 대장대신과 외무대신까지 겸임했으니 말 그대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이때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분위기가 발흥하면서 정당정치와 보통선거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으나 데라우치는 연립내각 조각을 철저히 거부하고 미즈노 렌타로, 고다마 히데오 등 총독 시절의 인맥을 중심으로 거국일치 내각을 조각하였다. 하지만 데라우치도 막무가내만은 아니라서 하라 다카시와 정우회를 중용하여 정우회가 데라우치 내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외 정책에서는 전임 오쿠마 시게노부가 하던 제1차 세계 대전을 이어받은 전시 내각으로서 독일과 전쟁을 이었고, 총리 재직 중에도 조선과 대만, 특히 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세가와야 그의 부하였을 뿐이니(…). 중국에서 황제병에 빠져 있던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대권을 잡자 그에게 니시하라 차관을 제공하여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중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계기로 38식 소총을 비롯하여 많은 무기와 참전차관을 제공하였다. 다만 그 대가로 중국의 의화단 사건 배상금 지불을 5년 유예하고 중국군이 톈진의 독일, 오스트리아 조계지로 진주하는 것을 허용하는 한편 중국의 관세 인상을 인정했다. 이후 호법전쟁에도 개입하여 북양정부가 남방의 혁명세력을 진압하는 것을 돕는 등 중국에 대한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가 적백내전의 혼란에 빠지자, 육군참모총장 우에하라 유사쿠, 참모차장 다나카 기이치,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아키 등이 적극적으로 출병 개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하라 다카시, 마키노 노부아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모두 신중론을 주장하였고, 이에 데라우치도 사태를 관망하다가 1918년 들어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체코 군단의 구출을 이유로 공동출병 제의를 받은 후에야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바로 시베리아 출병이다. 하지만 7,000명의 병력만 파견하기로 한 것을 12,000명으로 뻥튀기시켰다가 다시 40,000명으로 늘렸다가 곧 70,000명으로 늘려버렸고 중의원이 발칵 뒤집혔다. 나중에 후임인 하라 타카시가 이어받아 원만하게 매듭지었다.
1916년부터 이런 군인스러운 막장 체제를 2년 동안 줄곧 유지한 바람에 1918년에 이르러서는 전쟁으로 인플레가 나타나 경제가 개판이었으며, 식량 분배에 차질이 나자 결국 그 유명한 '쌀 소동'으로 이어졌다. 데라우치 입장에선 좀 재수가 없기도 한 것이, 당시 데라우치의 건강 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고 데라우치는 4월에 이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사임을 요청했으나 씹힌 상태였다. 결국 개판이 된 몸을 이끌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10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강경하게 진압하는 한편, 정부 소유의 백미와 외국에서 급히 구해온 쌀을 시중에 저렴하게 풀고 황실과 대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이것으로 빈민구제 사업을 하는 등 강온양면책으로 민심을 달래보려 했지만 이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정당내각이 아니면 사태 수습이 안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일본 사회의 혼란이 심각할 정도라서 결국 사임하고 1년 뒤인 1919년에 죽었다. 향년 67세.[11]
결국 1918년 9월 29일 데라우치 내각은 붕괴되고 다수당 대표인 하라 다카시를 중심으로 정당내각인 정우회내각이 조직된다. 이 같은 정권 교체는 1차 대전 결과 형성된 전제군주정에 대한 민주주의 체제의 우위가 세계적 대세가 된 시대상 속에 과거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번벌세력의 정치적 후퇴와 함께 정당세력이 부상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이어지는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1919년에 진행된 조선총독부 관제개혁 중에는 "데라우치는 관제 개혁을 훼방놓을 것이 뻔하다". 당시 실무자인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 총리대신 하라 타카시 등이 이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었다.
3. 기타[편집]
- 조선인을 미개하다 평가 했으며 조선인 하인이 수만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
- 평소 성격조차 엄격하며 강경했는지라 같은 일본인 부하들에게도 꽤나 피곤한 상사였다. 일례로 부하가 올린 결재(決裁) 문서를 검토할 때 그가 펜으로 고친 곳이 많았다. 또한 자신의 부임지와 관련해 생산한 물건은 품질에 관계없이 반드시 썼다. 예를 들면 조선 총독 시절 한반도에서 만든 물건이나 재배한 작물들은 꼭 식탁에 올리거나 쓰거나 했다. 일 중독자 맞는 듯.
- 모리 오가이가 비타민 부족으로 생긴 각기병으로 일본 육군이 고생할 때에 과학적 증명이 어쩌고 하면서 비타민이 풍부한 보리밥을 금지하여 2개 사단 병력인 2만 8천 명을 저 세상으로 보낼 때, 의학진을 무시하고 쌀밥을 혼식으로 변경하여 더 이상 병으로 죽는 걸 막기도 했다.
- 첫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왕실용으로 새로 어차를 들여왔는데[12]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과 다임러[13] 와 오버랜드[14] 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울즐리 차를 타고 다녔다. 그 외 데라우치를 도와 매국에 앞장선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 대작들도 뷰익, 포드, 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15]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었을 정도다.
- 취미로 칼과 불상의 수집을 즐겼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불상과 석탑의 유출을 막는 조치를 폈다고 한다. 의외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실은 1910년 강제합병 이전에는 일본인들 기준으로 '남의 나라'인 조선 문화재 무단 반출 사건이 종종 있던 것을 합병 이후에는 조선도 '일본 땅'이 됐기 때문에 '일본 땅의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16] 의도는 어찌됐든 데라우치의 이 조치로 한반도에 그대로 남은 유물이 꽤 된다고 한다.
- 광산재벌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에게서 중앙아시아에서 일제가 약탈한 유물들을 받아 총독부박물관에 전시했다. 해방 후로 일본인들은 미처 그 많은 유물들을 일본에 가져가지 못해서 유물들은 한국에 그대로 남았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오타니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그가 대만과 조선 등지에서 수집한 서적들은 현재, 데라우치 문고라는 이름으로 현립 야마구치 여대에 있다. 1996년 1월 24일 경남대학교로 데라우치 문고가 일부 양도되었다(98종 135책). 경남대학교 데라우치 기증 고서화 일괄 문서 참조. 이것도 경남대학교와 야마구치 여대가 자매결연을 맺고 학술교류를 하면서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데라우치 문고는 실체 파악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양이 어마어마하고, 밝혀진 것만 1만 8천여 권 정도라고 한다.(...) 데라우치의 수집 서적 중에는 퇴계문집, 고려사, 여사제강.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 다양한 고서적과 희귀본 등이 었었다
- 기자를 싫어한 역대 일본 총리 3인 중 한 사람이다.(데라우치 마사타케, 가토 다카아키, 사토 에이사쿠)
- 장남은 데라우치 히사이치로,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등장하는 일본군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태평양 전쟁 중 남방 총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일본군 희대의 참변인 임팔 전투 당시 책임자 중 한 명이다. 히사이치가 전범으로 기소되어 수용소에서 병사한 뒤 데라우치 가문은 급속히 몰락해서 파산까지 신청했고, 이 과정에서 소유권이 이전된 소장품들 중 일부가 데라우치 문고다. 또한 히사이치는 후생노동성의 전신인 후생성을 만들었고 이는 후생노동성까지 극우적 행보를 청산하지 않는 데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조선총독의 물망에 오르는 등 부자총독의 기록을 세울 뻔했으나 미나미 지로가 퇴임한 후에는 남방총군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이미륵의 소설 어머니에서 일본에 병탄된 직후의 조선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의외로 그리 악랄하게 나오진 않고 묘한 인상으로 나온다.
- 1971년 개봉한 영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서는 배우 김순철이 연기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미 사망한지라 언급만 된다. 제30화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조선의 승려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만공 스님이 미나미 총독 면전에서 "죽어 무간지옥에 떨어진 데라우치를 위해 금강경을 외우고 있다."라며 대놓고 고인드립을 친다. 그러나 만공의 명성이 너무 높아서 미나미 총독도 함부로 만공을 건드리지 못하고 여행을 제안하는 등의 회유책을 써야 했다.
이는 1937년 3월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8도 도지사 및 31본사 주지들이 몰린 31본 회의에서 만공스님이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청정 비구 하나를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지신다고 하셨거늘, 조선승려 7천명을 파계시킨 데라우치 전임 총독은 과연 지금 어디에 가 있겠는가?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라고 조선불교에 육식 허용, 대처승 제도, 양복 착용, 유발 풍조 등을 들여와 일본화하려 하는 총독부 정책을 거세게 비판한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 2006년 KBS 드라마 <서울1945>에서는 배우 이보희가 데라우치 총독의 수양딸 데라우치 아메카오리(寺内雨香)를 연기했다. 극중에서 그녀는 데라우치에게 입양된 조선인 딸로 종종 자신의 오빠는 남방군 사령관 데라우치 하사이치라고 말하고 다닌다. 물론 아메카오리는 허구의 인물이다.
- 2006년 일본 후지TV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에서는 일본 배우 아카보시 쇼이치로가 연기했다.
- 2007년 KBS <한국사 전>에서는 배우가 미상이다.
5. 관련 문서[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묘하게도 고종과 생몰년이 같다.[2] 야마구치현과 가고시마현은 전통적인 보수 성향 지역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는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 보수 우익 성향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의미가 달라지는데,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것이 사츠마 번(가고시마)와 조슈 번(야마구치). 당시로서는 지금과 반대의 의미를 가졌다는 뜻.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은 조슈 번 출신이 독점하고, 일본 해군은 사츠마번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데라우치도 조슈번 출신의 육군 파벌이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참조) 사실 처음에는 일본 육군 초대 원수를 사쓰마번의 정신적 지주인 사이고 타카모리가 차지하는 등 육군에서 사쓰마 출신의 지분이 상당히 높았으나, 세이난 전쟁 이후로 세이난 전쟁에서 정부군을 총지휘한 조슈번 출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육군을 장악하고 사쓰마 출신들이 세이난 전쟁 전후로 육군을 떠나면서 조슈 출신이 육군을 주도하게 된다.[3] 일본의 유명 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그 우타다(宇多田) 맞다. 우타다라는 씨(氏)는 조슈 번 하급 무사 가문에서 유래하여 현재 일본에 100명 정도만 있는 희귀한 씨이다. 우타다 씨끼리는 다들 먼 친척 관계이며 우타다 히카루는 그의 친형의 증손녀이다.[4] 하야시 다다스의 후임자가 없어 1개월 정도 역임하였다.[5]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보좌한 부통감. (1849년 ~ 1910년)[6] 물러난 지 4달 만인 9월 13일에 죽어서 지병 사임설도 있고 경질이 죽음을 불렀다는 설도 있다.[7] 지금의 농림축산식품부 및 산업통상자원부 장관[8] 친일 단체인 일진회도 싸잡아 해산시켰다.(…)[9] 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사유화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2.6%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값싸게 매각하거나 불하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3%인 일본인 지주가 전체 농지의 50% 가량을 소유하는 전형적인 식민지식 착취형 지주제로 완성되었으며, 조선인들에게 도로 매각하거나 불하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10] 헌데 이것은 한참 뒤 등록제로 바뀌는데, 일본 내지의 회사들이 "조선 회사령 때문에 조선 진출이 힘들다."는 까닭이었다고.[11] 여담으로 이 해에 바로 3.1 운동이 일어났다.[12] 이 때의 어차가 한국 최초의 어차는 아니다. 이미 몇 년 전 고종의 칭경 예식을 위해 시범 용도로 왕실에 들여온 포드 A형 차량이 최초였는데, 생긴 게 지금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초기의 자동차인지라 진동이나 소음이 심해 고종도 당시엔 한두 번만 타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영사관에서 쓰던 르노 자동차를 왕실에서 들여 운행하기도 했다.[13] 현행 재규어의 고급 브랜드로 다임러 AG와는 이름만 같을뿐 연관은 없다. 2000년대 동그란 눈의 재규어 XJ 때만 해도 8기통 모델 중 다임러라는 최고급 에디션이 있었다. 당시엔 벤츠 S600 급은 되는 최고급 차량이었다고.[14] 현행 크라이슬러에게 인수된 브랜드. 크라이슬러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스페셜 버전 중 하나도 이름이 오버랜드다.[15]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 대중차 / 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이마저도 조선 국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16] 비슷한 이유로 합병 직후 조선 전국의 문화재 현황을 조사해 사진을 찍고 구조를 조사해 조선고적도보를 편찬하였다. 이 조선고적도보의 흑백 유리건판 문화재 사진들은 지금까지 남은 가장 오래된 문화재 사진자료인 것이 많아서 필수 참고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