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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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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6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식민제국을 가리킨다. 이 명칭은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쓴 명칭은 아니며 식민지로 세워진 이때의 시기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용어라고 봄이 옳다. 프랑스는 캐나다 퀘벡주 가스페(Gaspé) 만에 프랑스 깃발을 꽂은 1534년을 프랑스 식민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대영제국과 함께 양대 제국주의 열강이었다.[11]
왕정 시절에는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인도, 세네갈 등 여러 지역에 손을 뻗었지만, 7년 전쟁으로 영국에게 인도와 캐나다를 내주고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에게 양도하여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나폴레옹 시절에 루이지애나를 되찾긴 하였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미국에게 매각했고 가장 알짜배기 식민지였던 아이티도 독립해 나가면서 왕정 복고 시에는 카리브 해의 몇몇 섬과 기아나, 세네갈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를 '1차 식민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는 식민제국 건설을 위한 식민지 확보에 다시 나섰다. 프랑스는 일부 해안 거점 외에는 유럽 국가들이 발을 들이지 못한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왕정 복고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 제2제국, 제3공화국 모두 적극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섰다. 그 결과 1830년 알제리 정복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마그레브 지역)과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인도차이나 반도), 남태평양 일대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를 '2차 식민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프랑스와 독립 전쟁을 치른 끝에 독립할 수 있었으며, 이때 점령한 지역 중 아직까지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는 곳도 있다. 프랑스령 기아나나 누벨칼레도니, 생피에르 미클롱, 마요트, 레위니옹 등이 대표적.
현재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등에서 프랑스어는 극소수만 쓰이지만, 벨기에 식민제국과 더불어 프랑스 식민제국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및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아직까지도 프랑스어가 폭넓게 쓰이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나 퀘벡에 비해 동남아 지역이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곧잘 영국의 라이벌처럼 여겨지지만 식민 제국의 규모에서 격차가 컸다. 반면에 영국의 유럽대륙 내에서의 영향력은 대륙국가인 프랑스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경쟁했으나 큰 무력충돌은 없었고 오히려 이해관계에 따라 러시아와 독일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연합하기도 했다. 한편 두 식민제국 모두 본토의 생산력은 열강 중에서도 월등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1871년 독일 통일 후 독일 본토의 생산력 대비에 비하자면 영국은 70%, 프랑스는 50%에 불과했다.
2. 프랑스 제1식민제국(1534년 ~ 1803년)[편집]
프랑스가 확보했던 북미 식민지. 면적- 대략 8,100,000Km²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한 것은 1604년의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였다. 누벨 프랑스는 동쪽으로는 뉴펀들랜드, 서쪽으로는 로키 산맥, 남쪽으로는 멕시코 만, 북쪽으로는 허드슨만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으며 이밖에도 프랑스령 기아나(1624),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1635), 아이티(1665), 인도 해안 일부(17세기 후반), 세네갈(18세기 후반) 등을 정복하며 프랑스는 거의 영국과 맞먹는 판도를 지녔다.
식민지인들의 자치가 허용되었던 영국 식민지와는 달리 프랑스 식민지는 프랑스 군주의 관할에 있었고 설탕 플랜테이션 및 모피 무역을 토대로 세워졌다. 또한 프랑스 본국에서 선택한 정착민들만 이주가 가능했기에 인구 수는 영국 식민지보다 비교적 적었다.[12][13] 물론 프랑스의 본토 인구는 1500년에 이미 15,000,000명이었고 1685년에 21,500,000명이나 되어서 본토 인구와 별개로 식민지 개척도 순위권에 들어가는 국가였지만 어디까지나 프랑스 정도 되는 규모에 비해서 그렇기는 하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1600년에 이미 220,000명이었고 1685년에 510,000명이어서 국력을 집중해서 해외에 투입하기도 충분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결과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허드슨 만과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를 영국에 넘겨주면서 세력이 위축되더니 7년 전쟁에서 패배, 영국에게 퀘벡, 아카디아, 미시시피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스페인에게는 루이지애나를 넘겨주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날려 먹었다.
프랑스 혁명은 두 가지 의미에서 결정타였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 및 국내의 혼란으로 프랑스가 정신이 없는 사이 영국이 7년 전쟁 시즌 2를 찍으면서 그나마 남은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들을 마음놓고 털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대단히 아이러니한데, 프랑스의 식민지에도 전파된 자유와 평등 사상이 식민제국을 더 빨리 허물어트렸다.(...) 가장 알짜배기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흑백평등을 내세운 흑인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1804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가를 세운 것이다!(아이티 혁명)[14]
또한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으로부터 돌려받기는 했으나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중근동 일대의 정복을 노리던 이집트 원정도 실패로 돌아가자, 나폴레옹은 그 즉시 식민지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본토인 프랑스에 더 신경을 썼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의 광대한 땅을 돌려받은지 3년 만에 미국에게 팔아넘긴 것도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미국에게 안 팔고 그대로 가졌어도 나폴레옹 본인의 몰락으로 그 땅은 영국이나 스페인에게 넘어갔을 것이 확실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게 남은 식민지는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를 위시로 한 카리브 해의 섬 몇개, 기아나와 세네갈밖에 없었다.
3. 프랑스 제2식민제국(1830년 ~ 1980년)[편집]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는 다시 한 번 식민지 확장에 나섰다. 1830년 샤를 10세의 알제리 침략과 선교사 보호를 명분삼은 베트남 개입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3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남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와 폴리네시아를 확보하고(1853)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를 확보하였다(1862). 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에 개입한 것도, 병인양요(1866)도 이때의 일이다.
본격적인 시작이 나폴레옹 3세 때였다면 가장 왕성한 확장은 제3공화국 때였다. 당시 프랑스의 본토 인구는 1870년에 38,400,000명이었고 1910년에 41,500,000명이었기 때문에 개척에 나서기에도 충분했고 원래부터 해외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유럽 열강들이 지들 딴에는 신세계인 아프리카로 달려들 때 프랑스도 역시 달려들었으며 1884년 베를린 회담을 기점으로 아프리카 내륙을 향해 쭉쭉 뻗어나갔고 코친차이나를 넘어서 메콩 강 동쪽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전체를 확보하였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그렇게 프랑스는 다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복귀했다.
다만 이때의 식민제국은 영국과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며 빈자리를 나눠먹는 게 특징이다. 또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식민지로의 대규모 인력투입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는데 이는 프랑스 본토의 인구증가가 정체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투입할 인력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서아프리카와 지부티에서 점차 파고들어간 횡단정책이 시행되었다. 이것이 영국의 종단정책과 부딪혀 1898년 오늘날의 남수단에서 벌어진 파쇼다 사건도 정치적 및 군사적 상황에서 불리했던 프랑스가 양보해 쉽게 해결되면서 영국의 종단정책을 인정하는 대신 서아프리카의 점유를 인정받았으며,(프랑스령 서아프리카) 태국은 영국령 미얀마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완충국이 되었으며,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크림전쟁과 의화단 운동, 수에즈 운하의 건설의 경우 함께 개입하였다.
중동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붕괴 뒤 영국과 함께 "사이크스-피코 조약(Sykes-Picot Agreement)"으로 대(大)시리아[15] 를 나눠먹어 레바논과 시리아를 차지했다.(시리아-레바논 위임통치령)[16]
결국 이런 프랑스의 제국주의도 제2차 세계 대전과 비시 프랑스의 성립과 함께 망해가기 시작했다. 식민지는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로 갈라졌고, 인도차이나는 일본 제국의 침략이 이뤄졌다. 전쟁을 끝낸 시점에서 인도차이나는 호치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세력이 장악하여 사실상 독립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큰 유혈사태 없이 1947년경부터 순순히 식민지를 포기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1950~60년대까지 식민지를 유지하려 발악을 했지만 2차대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한 프랑스에게 식민지를 유지할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마다가스카르와 알제리 그리고 인도차이나 등에서 식민지인들을 탄압 및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베트남에서는 월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강대국이라는 프랑스군이 월맹군에게 패전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며 세계적인 굴욕을 겪게 되었고, 알제리와의 전쟁에서도 부질없이 질질 끌면서 피해가 커지며 굴욕을 연속으로 겪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수에즈 운하의 권리를 둘러싸고 영국, 이스라엘과 합작해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영국과 힘을 합쳤음에도 미국과 소련의 압박에 꼬리를 내려, 결국 2차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헤게모니가 미국과 소련에게 넘어갔다는 사실만 재확인했을 뿐이었다.[17] 냉전 구도에서 프랑스는 더 이상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고, 이후 1960년대 샤를 드 골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면서 프랑스 식민제국은 1980년 바누아투의 독립을 마지막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후 독립하지 않고 프랑스에 잔류한 식민지들은 프랑스의 해외 영토가 되었다.
4. 평가[편집]
그러나 소위 인민의 봄은 유럽에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세기에 발생한 다른 많은 서양의 개념처럼 프랑스식 혁명도 금세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영국제국 전역, 실론, 기아나, 자메이카, 뉴사우스웨일스(오늘날의 캐나다 속 영국령 영토), 오렌지 리버 소버린티(과거 남아프리카 오렌지 강과 바알 강 사이의 작은 국가), 펀자브, 반디멘스랜드(오늘날의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매이니아 섬)까지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놀라운 사건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영국 식민지들과 달리 그곳에서는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가 대도시 혁명 정부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는 모두 프랑스 제국주의의 가장 독특한 특징, 바로 시들지 않는 혁명적 특성을 잘 나타내준다. 영국제국은 본래 보수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리자들은 각 지역의 특권층을 믿게 되었고, 꼭두각시 같은 족장과 마하라자를 통한 간접 통치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자유, 평등, 박애가 나폴레옹 법전과 나폴레옹의 또 다른 작품인 통조림과 함께 전 세계로 수출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모든 유럽제국처럼 프랑스도 노예제를 기반으로 해외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에 새로 확립된 공화정부가 서아프리카의 세네갈을 포함해 프랑스제국 전역에서 다시 한 번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영국은 이미 15년 전에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는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이 혁명의 1단계에 불과했다. 새로 자유인이 된 사람들은 투표권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도 선포되었다(이 점은 영국 식민지와 달랐다). 프랑스제국 전역에 보통 선거권이 도입되어 거의 모두가 아프리카인이나 메티스(원주민과 유럽인의 혼혈)였던 유권자(백인은 전체의 1퍼센트에 불과했다)들이 1848년 11월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고, 그 결과 프랑스 의회에 입성할 최초의 유색인이 선출되었다. 비록 파리로 대표를 파견할 권리는 1852년 나폴레옹 3세가 철회하여 1879년까지 회복되지 않았으나, 식민지 네 곳(생 루이, 고레, 뤼피스크, 다카르)의 지방 의회는 계속 보통 선거권 원칙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민주 의회는 당시 생 루이라는 식민지 수도에서 소집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알고 있었다. 생 루이를 방문한 영국인은 이렇게 썼다. "의회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흑인 의장이 유럽인 의원에게 시끄럽다며 정숙을 요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 흑인 의원들은 세네갈의 관리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영국 식민지라면 세네갈에서 원주민들이 유럽 관리들에게 가하는 공격 같은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18] 영국인의 시각에서는 영국 본토 사회처럼 제국에서도 계층 질서가 지켜져야만 했다. 가장 꼭대기에 여왕이자 여황제 빅토리아가 있었다. 4억 명에 이르는 그녀의 백성은 그녀 바로 아래부터 가장 천한 캘커타의 푼카 왈라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지위 사슬에 따라 각자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제국은 달랐다.
1848년 혁명가들 눈에 비친 식민지 백성들은 최대한 빨리 프랑스인으로 탈바꿈 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 표현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동화되어야' 했다. 동시에 프랑스인 관리와 아프리카 여성 사이의 결혼(메티사주)도 널리 장려되었다. 이렇게 진보적인 제국주의는 1854년 세네갈 총독이 된 전직 군인 루이 페데르브(Louis Faidherbe)로 상징된다고 할 수 있다. 페데르브는 생 루이에서 새로운 다리, 도로, 학교, 부두 건설 및 수도 공급 공사를 감독했고 강을 따라 움직이는 정기 연락선 도입을 주도했다. 세네갈 전역에 해방 노예들을 위한 '자유의 마을'이 세워졌다. 1857년 페데르브는 세네갈인으로 구성된 식민지 군대를 창립하여 아프리카 군인들을 계약 고용된 군사 노동자에서 제대로 된 보병으로 탈바꿈시켰다. 원주민 족장들의 아들들을 위한 학교도 세워졌다. 페데르브 본인도 15세 세네갈 소녀와 결혼했다.
총독 임기 말년, 페데르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의도는 순수하고 숭고하다. 그리고 우리 대의는 정당하다." 물론 그의 임무는 단순히 원주민들을 개화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1857년 그가 선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목표는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나라를 지배하고, 무역을 통해 최대한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19]
그는 내륙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카시아 나무 수액으로 만드는 아라비아고무와 땅콩 무역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세네갈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를 위해 페데르브가 쓴 전략은 펠루 폭포 아래 메딘에서 시작하여 세네갈 강을 따라 프랑스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내륙을 지배하던 권력자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와알로의 트라자 무어족, 남쪽의 카요르, 그리고 니제르 중부의 이슬람 통치자들이자 훗날 가까운 말리에 투쿨로르 왕국을 세운 엘 하지 우마르탈(El Hadj Umar Tall)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아프리카 경쟁자들은 점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857년 프랑스군이 레부공화국을 전복하고 수도 응다카루를 다카르(오늘날 세네갈의 수도)라는 새로운 식민 도시로 바꾸어버렸다. 오늘날 이 도시 중심에는 총독의 흰색 관저부터 넓은 페데르브대로까지, 그리고 신선하고 향기로운 바게트 빵을 파는 불랑제리부터 카페오레를 파는 파티세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식민 정책 비전을 기념하는 상징물들이 남아 있다. 프랑스화 과정을 공식화하기 위해 국가 전체가 아롱디스망(군), 세르클(군), 캉통(면)으로 나뉘었다. 1865년 페데르브가 임기를 마쳤을 때쯤엔 프랑스인이 생 루이 주변을 거닐면서 자기 국가가 이룩한 것을 뿌듯하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노예 시장이었던 곳은 자랑스러운 프랑스 문화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과거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사람들은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국가를 위해 무기를 들 의무를 지닌 시민으로 변모했다. 언론인 가브리엘 샤름(Gabriel Charmes)은 이렇게 표현했다.||종교적 맹신과 약탈만이 존재했던 이 거대한 땅에 프랑스가 평화와 무역, 관용을 가져왔다면 누가 이를 권력의 오용이라 비난할 수 있겠는가? ··· 수백만 명에게 문명과 자부심을 가르쳤으니 프랑스는 자부심으로 가득할 것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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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 『CIVILIZATON: The West and the Rest』 한국어판에서 인용
세간에서는 프랑스 식민제국이 다른 제국주의보다 유난히 악랄했다는 인식이 많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당연히 제국주의 본래의 윤리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동시대 식민제국보다 일방적으로 더 악랄했다거나 혹은 더 관용적이었다고 단순화할 것이 못된다.[21] 위에서 인용한 퍼거슨만 하더라도 지나친 영미 위주의 역사관과 자국 국뽕(영국뽕) 때문에 비판 받는 학자지만, 그러한 퍼거슨도 프랑스 식민제국이 영국과 비교할 때 마냥 가혹하다는 식의 평가는 하지 않았다.
일단 프랑스는 영국과 비교할 때, 식민지에 동화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펼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양날의 검이었는데, 프랑스 본토와 혁명의 긍정적인 성과물이 그 어떤 열강보다도 빠르게 식민지로 퍼져나가면서도, 동시에 현지의 전통과 관습과 문화를 가장 중대하게 위협하기도 했고, 여러 전통과 관습에 대한 프랑스 혁명의 적대감과 폭력성 역시도 식민지로 전파되었다.
한편으로 프랑스 2차 식민제국 역시 당시 프랑스와 라이벌 호각을 다투던 영국과 함께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쪼개 먹고 자국의 편의에 맞게 민족과 종교 등을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 등을 획정하고 식민지 시기 내내 통치에 용이하게 특정 현지 세력들을 지원하여 민족, 종교 간 분열들을 조장했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에 그들을 독립시킨 결과 내전과 전쟁 등 분쟁으로 이어졌다.
당장에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의 경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전 후 뒷처리도 제대로 안 한 채 급하게 철군했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을 미국이 이어 받았는데 이후 통킹만 사건의 조작을 시발점으로 베트남 전쟁 등이 벌어졌다. 아프리카의 경우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코트디부아르, 말리의 국경선을 프랑스가 민족, 종교 등 토착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획정하였기 때문에 독립 이후 내전이 발생했으며, 중동의 경우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 쿠르드족과 아랍족, 이슬람교 수니파와 알라위파 간의 이슬람 종파 대립을 키워 온 시리아는 시리아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지 60년 뒤에 이슬람 수니파와 알라위파가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폭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최악의 악마들이 강림하면서 21세기 중동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프랑스의 하류층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레바논 또한 프랑스의 인위적인 국경선 조정으로 독립 후에도 종교, 종파간 대립을 봉합하지 못하다가 내전이 일어났다.(레바논 내전) 그래도 그나마 레바논은 1990년에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기라도 했지, 시리아는 아직도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이 끝이 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피해를 많이 본 곳은 알제리로 2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22]
한편으로는 프랑스 문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친불 성향의 식민지인들을 중용하면서 유화책을 쓰기도 했다.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는 세계 최초의 서구권 비백인 사단장이었고, 펠릭스 에부에 같은 흑인 출신 총독도 존재했다. 19세기 말부터는 북아프리카부터 투표권을 지급하기도 했다. 1표가 아닌 0.7표. 0.4표긴 하지만. 노골적인 수탈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길게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나는 두 아이를 잃었는데, 당신들은 20명의 하인을 두고 있소."
--- 1882년, 프랑스 극우파 협회인 '애국자 연맹'의 회장 폴 데룰레드(Paul Déroulède)의 평가. '두 아이'는 알자스 로렌을, '20명의 하인'은 식민지들을 의미한다.
또한 프랑스 내부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1880년대 제국의 대확장은 당시 국무의장이자 사임 후 외무장관을 역임하는 쥘 페리가 강행하던 것이었는데, 프랑스 국민 감정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에 정말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식민지 건설을 10년 전 상실한 알자스 로렌 문제를 정부가 외면하는 증거라고 보았고, 실익에 비해 너무 많은 예산이 지출된다며 비판했다.
현재 프랑스는 형식상으로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때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들을 착취하지는 않지만 아프리카 식민지들 한정으로 지금도 경제,사회,문화적인 방법으로 자원과 이득이 되는 것을 흡수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 1인당 GDP가 4만달러가 넘는 부국인 이유가 이러한 착취 때문에 달성된 성과라는 것도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5. 제2식민제국 당시의 식민지[편집]
- 프랑스령 알제리(1830 ~ 1962) - 특이하게도 알제리는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취급되었는데 이는 알제리가 지리적으로 인접해 식민화가 유리했기 때문이다. 총독 관할인 대다수 식민지들과 달리 알제리에는 프랑스 본토의 행정이 적용되었다. 알제리를 아예 영구지배하기 위해 프랑스는 도시들을 아예 프랑스 스타일로 바꾸고 상당한 수의 프랑스인들을 이주시키고 스페인인과 이탈리아인 등 다른 유럽인 이민까지 장려하여 특별히 관리하였고 데파르트망까지 설정하는 등등 여기만큼은 죽어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때문에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 중 독립 과정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나라가 되었다. 이는 프랑스 정부는 물론 당시 프랑스 일반 국민들도 알제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고유의 영토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 프랑스령 모로코(1912 ~ 1956) - 보호령
- 튀니지(1881~1956) - 보호령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1895 ~ 1960)
- 프랑스령 기니(1895 ~ 1958)
- 니제르(1892 ~ 1960)
- 코트디부아르(1893 ~ 1960)
- 모리타니(1903 ~ 1960)
- 프랑스령 수단(1895 ~ 1960)
- 세네갈(1895 ~ 1960)
- 프랑스령 다호메이(1904 ~ 1960)
- 프랑스령 오트볼타(1896 ~ 1960)
- 프랑스령 토고(1919 ~ 1960) - 구 독일령 토고의 일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 포르사도스&바지보(1900 ~ 1927) - 1898년 프랑스령 니제르와 영국령 나이지리아와의 국경 획정 당시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조차한 나이지리아 내의 월경지이다. 조차 기한은 1900년부터 30년이었으며 조차 기간 만료 직전인 1927년 영국에 반환하였다.
-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1910 ~ 1960)
-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1897 ~ 1958)
- 프랑스령 인도(1668 ~ 1954)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7 ~ 1954)
-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레바논(1923 ~ 1946) - 구 오스만 제국의 일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 프랑스령 소말릴란드(1896 ~ 1977)[23]
- 뉴헤브리디스 제도(1906 ~ 1980) - 영국과의 공동 통치령
- 프랑스령 톈진(1860 ~ 1946)
6. 프랑스의 외부 영토[편집]
- 프랑스령 기아나 - 해외 레지옹.
-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 해외 레지옹.
- 인도양의 레위니옹, 마요트 - 해외 레지옹.
- 북아메리카의 생피에르 미클롱 - 해외 집합체.
- 카리브해의 생마르탱, 생바르텔레미 - 해외 집합체.
- 남태평양의 왈리스 퓌튀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 해외 집합체.
-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의 누벨칼레도니 - 특별 공동체.
- 클리퍼턴 섬 - 해외 영토.
-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 - 해외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