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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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노량 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낸 전투이자 이순신 생애 최대 최후의 해전이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지휘하는 조선-명나라 연합함대가, 철수하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함대를 구조하려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일본 함대를 속여 노량해협에 유인 후, 기습하여 관음포로 몰아넣어, 극소수 탈출을 제외한 대다수를 침몰, 나포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다.[19]
2. 배경[편집]
2.1. 명량대첩 이후 조선의 1차 공세[편집]
1597년 10월 17일(음력 9월 7일)의 직산 전투와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으로 육로와 수로에서 모두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을 맞이했다. 일본군 다이묘들은 가망이 없어진 전쟁에서 철수하고 싶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하였으므로, 남해안에 왜성들을 짓고 수비에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0]
- 1598년 1월 16일(음력 12월 6일), 조명연합군이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를 벌여 소폭 성과를 얻었다.
- 1598년 1월 29일(음력 12월 23일), 조명연합군이 울산성 전투를 벌였으나 공성에 실패했다.
- 1598년 1월 말, 명나라 5만이 부산포왜성을 공격했으나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방어에 공성에 실패했다.
2.2. 히데요시 사후 조선의 2차 공세[편집]
1598년 9월 18일(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정권을 위임받은 고다이로(五大老)와 고부교(五奉行)들은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의 공식 철수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조선은 절대로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실익적으로는 적의 전력을 온전히 보내줬다간 재침략의 불씨가 될 수도 있거니와, 감정적으로도 7년 동안 조선 곳곳을 잔악무도하게 유린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생각이었다.
조명연합군이 이 소식에 사로병진책을 세워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1][22]
- 159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시마즈 요시히로) 방면을 공략했으나(사천성 전투) 큰 성과를 보지 못 했다.
- 1598년 10월 19일(음력 9월 20일), 조명연합군이 순천왜성(고니시 유키나가) 방면을 공략했으나(왜교성 전투) 큰 성과를 보지 못 했다.
- 1598년 10월 21일(음력 9월 22일),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가토 기요마사) 방면을 2차 공략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 했다.
1598년 10월 28일(음력 9월 29일), 이순신이 이덕형, 선조, 명나라 왕사기와 편지로 작전을 주고 받았다. "솥을 치우고 소를 잡는 등 일본군이 대대적인 철수 준비", "그들을 몰아(세워), 소굴을 벗어나면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살해하면 가장 기묘한 책략", "먼저 왜교를 치고 나중에 남해를 도모" 등의 작전이 담겼는데, 이것이 한 달 뒤 실현되었다. #
2.3. 순천 포위망을 통과한 일본 연락선[편집]
1598년 12월 초(음력 11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퇴각까진 아니어도 연락선만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달라며[23] 뇌물을 보냈다. 이순신은 몹시 어이없어 하며 뇌물을 가져온 사신을 죽이려다 참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진린은 이를 수락해 연락선 1척의 통과를 허용했다.
1598년 12월 11일(음력 11월 14일) 무렵, 일본군 4명이 탄 고니시의 연락선이 진린 측 포위망을 통과했다. 이순신이 격노해 추격을 명했고, 추격군은 한산도까지 추격했으나 결국 연락선을 놓쳤다.[24] 연락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고니시의 사위), 부산의 테라자와 히로타카 등에게 남해 창선도로 소집령을 내린다. 이로서 순천의 일본군, 창선도의 일본군 사이에 조명연합군이 도리어 포위된 처지에 놓였다.
3. 전개[편집]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항복의 백사집(1629)이 주장한 이순신의 마지막 출정 전 맹세
3.1. 위장공격과 매복[편집]
159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늦은 오후
- 이순신은 진린을 찾았고, 함께 출전했다.[25]
- 진린과 등자룡은 이순신이 선물한 판옥선 2척에 나눠 타고 출전했다. 그 뒤를 사선-호선들이 뒤따랐다.
- 이순신은 함대를 셋으로 나눴다. 서쪽의 순천왜성을 위장공격하려는 극소수의 위장함대, 동쪽의 노량해협을 포위하려는 본함대/복병함대. 여수 좌수영에서 동쪽의 노량해협까지 노를 저어 하루 반절이 걸렸다.[26]
159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늦은 밤
- 해가 지고 한밤중, 이순신의 위장함대가 서쪽의 순천왜성을 무너뜨릴듯 포격하며 상륙할 것처럼 위장했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이 연락선이 나간걸 알자, 구원군이 오기 전에 순천왜성을 끝장내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절박해져 봉화 수준이 아니라 산을 불태우며 멀리 긴급함을 알렸다.
- 창선도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불길을 보고 '조선 수군이 노량 쪽을 막지 않고 순천 쪽으로 갔다'고 해석하고 노량해협을 신속히 통과하기로 결정했다.
3.2. 노량에서 관음포까지의 유도[편집]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0~2시
- 일본 함대가 노량에서 순천 방향으로 물의 흐름이 생겨날 때 창선도를 출발해 노량해협을 통과했다.
- 일본 함대가 '해협을 통과한 뒤' 조선 복병 함대가 기습 포격하며 해전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이 순천 쪽에 있으리라 생각한 일본 수군은 당황했다.
- 수 척의 일본 함선이 격침될 쯤에, 시마즈는 복병 함대의 수가 적음을 파악하고 이들을 포위하려 했다.[27]
- 그러자 죽도 부근에 매복하던 명나라 함대가 합류했다. 진린의 판옥선은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했다. 등자룡의 판옥선은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돌격했다.[28]
- 조선 복병 함대는 기습 외에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나라 수군을 호위하는 임무 또한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함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하였다.
- 시마즈는 이들과 전면전을 하며 시간을 소비하거나, 노량해협을 거슬러 되돌리기보단, 따돌리고 빨리 전진하기를 선택했다.[29]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2~4시
- 일본 함대가 관음포[30][31] 까지 전진했을 때(유인되었을 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 본 함대가 등장했다. 이로서 일본 함대는 3면이 포위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 조선 본 함대는 첨자찰진(삼각형의 돌격형)으로 경상우수사 이순신(무의공)을 선봉장으로 어린진(전방이 두터운 방어형)으로 전진하던 일본 수군의 옆면에 등장해 파고 들어 지휘부 쪽을 위협하자, 지휘부의 수호를 최우선하는 일본 함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32][33]
- 때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해, 조명연합군이 화공(불화살, 신기전, 불 붙은 짚섬)까지 가했다.[34][35]
- 순천왜성 쪽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위장함대에 속은 것을 알고 군영을 철수해 배를 출발시켰다.[36][37]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4~6시
- 일본의 선봉대가 불능에 빠졌을 무렵, 시마즈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포위망을 벗어나자고 총공세를 명령한다. 이에 아직 전력이 보존 된 중위-후위 병력들이 빠르게 돌진했다.[38]
- 때마침 등자룡의 판옥선이 명나라 아군이 잘못 쏜 포에 의해 불이 났다.[39] 일본 함대가 여기로 공격을 집중하자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린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 이 여세를 몰아 일본군은 진린의 판옥선에도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의 본 함대가 또 다시 진린을 구원하였다.
- 명나라 수군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의 본 함대는 일본 수군 중앙을 파고들던 첨자찰진에서 점차 포위진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근접한 일본 함대에 포격을 가하며 포위망을 조이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야간이었기에 전함식별 및 조준이 어려워 평소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화포발사를 해야 했고, 근접전/백병전도 자주 발생했다.[40]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6~8시
-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돌파가 무산된 상황에서, 바닷물의 방향이 바뀌었다. 야간이라 방향을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 수군은 바뀐 물의 방향을 따르면 다시 노량해협을 지나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만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일본 수군은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41]
- 조명연합군은 관음포 입구에 정렬해 입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포위섬멸하려 하고, 일본 수군 역시 죽기살기로 관음포를 다시 나가기 위해 최후의 발악으로 달려든다.[42]
-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해가 밝은 뒤 시마즈의 구원함대가 대패하는 것이 보이자 먼 바다로 도망쳤다.
3.3. 불타는 관음포와 이순신의 죽음[편집]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8~10시
- 일본 수군은 명나라+조선2군 방향이 아닌, 이번엔 조선1군 즉 이순신의 대장선 방향으로 탈출하려 한다.[43]
- 따라서 이순신의 대장선을 비롯 전라좌수영 군이 직접 돌파를 시도하는 선박들을 추격-포위한다. 일본군 선두의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장선(안택선)이 반파되어 작은 배로 옮겨타야 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위기에 처한다.[44]
- 일본군 후방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군이 관음포를 또 빠져나와 조선1군의 후방을 찌르고 들어오면서 난전이 발생했다. 이 덕에 시마즈 요시히로도 탈출에 성공했다.
- 이 난전으로 조선1군의 전라좌수영 다수 장수들이 전사했고, 최고지휘관 이순신 역시 전사했다.
이순신의 죽음
- 총탄을 맞은 경위
- 이덕형의 조선왕조실록 보고에 따르면 "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라고 주장했다.
- 류성룡의 '비망기입대통력-경자'에 따르면 "장군이 직접 화살을 쏘고 돌팔매를 하자,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고,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고 주장했다. #
- 총탄을 맞은 방향
- 류성룡의 징비록은 '총탄이 가슴을 관통해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 안방준의 은봉전서는 '총탄이 겨드랑이 아래(腋下)'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 이순신의 유언
- 1598년, 류성룡은 징비록으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45] "는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46]
- 1617년, 광해군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로 "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려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라"[47] 고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 1631년, 이원익은 인조에게 "(이순신이 흐느끼는 아들에게)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48] 고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
- 이순신의 죽음이 전투 중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순신의 전사를 듣고 분기탱천해 분전하다가 부상, 전사했다는 기록도 꽤 나온다. 대장선에 동승했던 송희립도 부상을 입었고, 유형은 탄환을 6발이나 맞고도 전투를 독려했고,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잔적을 소탕하다 전사했다.
- 지휘를 이어한 손문욱[50]
- 조선왕조실록에 이덕형은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 아들(이예)이 울려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손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고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다고 여겨 용기내어 공격했다"고 보고했다.
- 조선왕조실록에 권율은 "손문욱이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손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 인조는 선조수정실록에 그의 조카 이완이 대신 지휘했다고 기록을 변경했다.[49]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10~12시
- 바다는 왜선 2백여척이 부서지고 시체, 판자, 무기, 갑옷이 뒤덮여 물이 흐르지 못하고 붉었다.
- 일본군 50척 가량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성공해 외해로 도주했다.[51]
- 일본군 100척 가량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실패해 배를 버리고 남해도에 상륙, 도주했다.[52] 이는 이틀 뒤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이어진다.[53]
3.4. 결과[편집]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 조선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방덕룡, 고득장, 이영남, 이언량 / (호남절의록)[54] 이설, 정기수, 나대용의 종제 나치용, 오용운, 오극성, 남병, 나득룡, 김몽성, 이충실, 김덕방, 김예의, 김득효, 강극경, 이덕수, 김득룡, 이응춘, 신인수, 김두흥, 이덕경, 김말동, 김백운 / (용사일기) 안헌
- 명나라 - 등자룡(부총병), 도명재(진잠의 부장)
- 일본 - 오코히라 타카시게, 마치다 히사마사, 이케베 사다마사
조선 측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24일, 을사) #
- 1598년 12월 19일(선조 31년, 음력 11월 27일, 무신) # [55]
- 이덕형의 보고 - 사천-남해-고성의 왜적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 1백여 척은 남해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고니시(소서행장)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 사관의 논평 - 어느 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이순신이 진린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린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허락하였다. 조명연합군이 노를 저어 반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에 쓰러지니, 이순신의 아들(이예)이 울려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손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고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다고 여겨 용기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적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본 측 <정한록(征韓録)>은 일본 측의 피해는 이름 있는 자[56] 26명 및 다수가 사망했다고 했다. 일본 측의 전과는 명군 200명을 살해하고, 조선 배 4척, 명나라 배 2척을 포획했다고 주장했다.[57][58]
일본 측 <사천어재진기(泗川御在陣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조선 배 60척을 포획해 철수에 이용했다고 주장했다.[59]
시마즈 가문의 영지였던 가고시마의 무형 문화재인 상부연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들이 명복을 비는 것으로 그 배경은 다름 아닌 노량 해전이다.
4. 가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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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투 규모 추정 (조선-명)[편집]
<임진전란사>에서 정리한, 노량 해전에 참가한 조선군 장수들과 명나라군 장수들은 상단 도표와 같다.
조선 수군의 규모 추정
- 이순신 직속 7천명, 기타(협선 등) 0~2천명
- 바로 직전 왜교성 전투 당시 조선 수군은 7,328 ~ 10,000여명이었다.
- 노량 해전에 충청 수군은 합류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보다 조금 적을 수 있다.
- 판옥선 60척
- 판옥선 당 승선 인원이 대략 120명이므로 7,000명의 탑승에 대략 60척이 필요하다.
- 1600년 12월 24일, 선조실록에 나대용이 정유재란 직후 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판옥선 총 숫자가 60여척이라 했으므로 대략 이 전후 숫자가 추정된다.
- 충청 수군(충청수사 오응태)은 합류하지 않았다. 따라서 노량 해전에서 판옥선은 60척보다 적은 수였거나, 충청 수군이 판옥선이 전무했을 수 있다.
- 협선 90~180척
명나라 수군의 함대 규모 추정
- 진린 직속 5천명, 등자룡 직속 3천명, 기타 0~1만명
- 바로 직전 왜교성 전투 당시 투입된 명나라군은 5,000 ~ 19,400여명이었다.
- 1598년 3월 29일, 선조실록은 진린 휘하는 5,000명이었으나, 9월에 왕원주의 병력이 더해져 7,000명이 되었다고 했다.
- 1610년, 이분의 행록은 진린이 7월 16일 5,000명을 데리고 이순신에게 합류했다고 했다.
- 1630년, 신흠의 상촌집은 등자룡 휘하는 3,000명이고, 진린 휘하는 8,590명이었으나 9월에 왕원주의 병력이 더해져 10,590명이 되었다고 했다.
- 판옥선 2척
- 사선(대형) / 호선(소형) 300척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명나라 왕원주, 복승, 이천상의 배가 각 100척, 총 300척이라고 기록했다.
- 일본 측 우도궁고려귀진물어 역시 명나라 배를 300척이라고 기록했다.
- 1598년 10월 24이 선조실록에 큰 배(사선)에는 100명씩, 작은 배(호선)에는 30-40명씩 탑승했다고 했다.
일본 측 정한록, 조선정벌기는 명군 혹은 조명연합군 전선을 500척이라 했는데, 이는, 조선측 판옥선 60척 + 조선측 협선 100여척 + 명나라측 사선/호선 300척을 일컫는 것일 수 있다.
혹자는 기록에 남아 있는대로 명나라의 대장선(판옥선) 2척만 소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노량해전에 참전한 명나라 수군의 전력들이 다수 있거나 명나라 수군이 노량해전의 승리에 대하여 어떠한 식으로든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자료들도 있다. 무엇보다, 대장선만 참전하고 관망한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군법을 넘어 오늘날 기준으로도 다 사형감이다.
- 2006년 10월, 남해역사연구회의 책 '이순신과 노량해전' PDF
- 2008년 2월, 장학근의 책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 2013년 5월, 김연수의 책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 2014년 6월,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의 '임진왜란 시기 명 수장 이금의 군사 행적 고찰전' 이순신연구논총 발표 #
- 2018년 4월, 송은일 전남대 교수의 '정유재란기 명 수군의 참전과 예교성전투' 이순신학술세미나 발표 PDF
- 2018년 4월,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의 '명실록 중 노량해전 전적 기록에 대한 분석' 이순신학술세미나 발표 PDF
- 2018년 4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노량해전의 승리요인에 대한 몇 가지 관점' 이순신학술세미나 발표 PDF
- 2018년 4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노량해전에서 발휘한 이순신의 전술과 리더십' 한국해양안보포럼 발표 #
- 2018년 6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노량해전의 승리 요인과 역사적 평가' 이순신연구논총 발표 #
- 2018년 6월, 송은일 전남대 교수의 '명나라 시기 수군의 대외 참전과 활약' 중국학총론 KCI논문 #
- 2022년 2월,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의 '조선후기 청산도 진린도독비의 건립과 역사적 의미' 이순신연구논총 발표 #
- 2023년 3월, 이종화 건양대 교수, 윤헌식 이순신전략연구소 연구원의 '노량해전의 조명연합수군 규모' KCI논문 PDF
4.2. 전투 규모 추정 (일본)[편집]
- 1591년, 임진왜란에 시마즈 군은 15,000명을 동원했다.[60] 시마즈 군은 출병 이래 이렇다 할 손실은 없었다. 임진년(1592년) 태풍으로 격군-선원을 일부 잃었으나 미미한 수로 정유재란 시 복구되었다.
- 1598년 10월, 사천성 전투에서 시마즈 군은 7,000~8,000명이었다. 선조실록 1598년 9월 28일 추정으로, 같은 기록에 '어떤 이는 1만여 명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병기했다. 상식적으로 성밖에서 성안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 또한 시마즈 군은 사천성 전투의 성과를 부풀린 전적이 있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 1598년 12월, 노량 해전 참전 무장별 군역장에 따른 병력 추정은 다음과 같다.[65]
- 1600년 10월, 사쓰마(시마즈)의 세키가하라 전투 참여규모를 통한 추정
- 1609년 3월, 사쓰마(시마즈)의 류큐 왕국 침공규모를 통한 추정
- 시마즈는 3천명을 동원했다. 이를 두고 '이에야스 막부의 기습침공 방어를 위해 3천은 남겨야 했을 테니 전체 규모는 6천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 때는 막부가 시마즈에게 류큐 복속을 명령한 때라 오히려 가진 걸 쥐어짜 신속히 류큐를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따라서 이 3천만으로 시마즈 가의 군 규모를 알긴 어렵다. 또한 임진년/정유년에 잡병/포로 고용이 빈번했으며, 그간 성인이 되었을 장정도 있다.
4.3. 일본군 저격설과 반박[편집]
전근대 시대의 조악한 명중률의 화승총으로, 야간의 난전 속에서, 호버링하는 헬기보다 더 흔들리는 전근대 시대의 배에 탑승한 상태로 변변한 조준도구도 없이 사람을 온전히 저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전근대 시절 전쟁에서 장수가 눈먼 화살 등에 맞아 전사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일단 전쟁터 자체가 워낙 위험한 곳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에 장수라고 특별히 보호막이라도 있지 않는 한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 총알, 포탄이 장군만 피해가란 법은 없다. 실제 역사를 봐도 무수한 이름 난 장군들이 전쟁에서 그 명을 달리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지휘관이 직접 최전선에 섰기에 근현대 시대의 전쟁보다 지휘관급의 희생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국시대에 일본군이 조총수들을 경보병처럼 운용,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지휘관들을 노리고 쏘는 전술을 자주 했고 육상전에선 조선 장수들이 저격당한 것처럼 보이는 정황들이 기록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노량 해전은 배가 격하게 요동치는 상황에서 전근대적 화기를 발사하는 엄연한 해전이다. 조선 측 명나라 측 일본 측 어디에도 관련 기록은 없다.
하지만 앞뒤 정황만을 따져 볼 때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비록 해상전에서의 저격은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시마즈군은 분명 저격 전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며 수하에 정예 총병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시마즈군에는 가신인 타네가시마씨[70] 가 함께 종군했는데 이들은 당시의 최정예 총병대로 이름높았다. 또한 시마즈군에는 후퇴하며 자살적 후비대를 남겨두어 적장을 저격하는 전법인 '스테가마리'가 존재했는데, 저격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전술이 해상전에서 사용되지 말란 법이 없다.[71]
물론 해상전에서 전근대적 화약무기를 가지고는 저격이 거의 불가능[72] 하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적인 조준사격의 경우이며, 전근대적인 일제사격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순신과 비견되는 영국의 넬슨 역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군 전열함의 마스트에 있던 머스켓 사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바가 있다. 이들이 가장 고가치 표적인 대장선의 장대를 향하여 집중사격을 가했다면 피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관련된 사료가 없는 이상 증명이 불가능한 상상의 영역이지만, 퇴각전에서의 적장에 대한 기습적 저격 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정예 저격수 집단이 종군했던 시마즈군과 정면대결한 전투에서 하필 추격전을 벌이던 충무공이 전사했다는 것은 분명히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4.4. 이순신 자살설/은둔설과 반박[편집]
자살설/은둔설 주장 측은 이순신이 왜군을 추격하면서 갑옷을 벗고, 지휘관실에서 벗어나 적군의 사거리에 들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왜 이랬냐는 물음에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전란 후를 생각했을때 모두를 위해서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주 헛소리는 아닌 것이, 전쟁이 끝난 후에 큰 공을 세워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수가 집권층의 질투와 두려움을 사 토사구팽 당하는 예는 인류 역사에서 적지 않다. 게다가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이순신을 증오하여 전쟁 중에도 대놓고 그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등 이순신을 제거하려 한 전적도 있었으니 충분히 합리적 추측이다. 또한 이순신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나며 공적이 알려지면 인기는 더욱 늘 것이고, 그를 억압한 조정에 대한 반감은 급증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군주인 선조의 의심병적인 성질로 미루어 볼 때 노량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후에 못볼 꼴을 당하지 않게 하였고, 그의 명예를 위해서 가장 잘 된 일이라고 생각들을 하곤 한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 도독직을 받았다고 보는 측에서는 특히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자살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해당 논란에 관해서는 이순신/의문점 항목 참조.
이순신 자살설은 비단 현대뿐만이 아닌 조선 후기에도 심각하게 논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 때의 영의정 이여는 "충무공이 총탄에 맞기를 자처했다"라고 말하고, 신료인 이민서도 "당쟁으로 김덕령 장군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김덕령의 죽음을 논하면서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이순신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73] 또한 이후의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도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이명은 "공이 아무리 앞에 다가올 화를 걱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겼겠는가?"라며 자살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74]
사실 이순신 자살설이 수면에 오른 건 남천우 박사가 역사 비평에서 간행한[75] 이순신 전기에서 다시 들고 나왔다. 문제는 남천우 박사가 자살설을 지지하는 게 아니고 자살설이 있으나 강하게 부인하면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죽은 게 아니라 부하들과 짜고 변복해 숨어 소실집이나 본가의 다른 방에 은거하다가 20년 후에 진짜로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76] 꽤 많은 사람들을 낚았으나 이는 근거가 전혀 없다. 남천우 박사는 이순신의 자서전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그 자서전이라는 게 이분의 충무공 행록이다. 원래 숨어살면서 "나는..."이라고 쓴 자서전을 이분이 3인칭으로 바꾸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니 낚이지 말자.
사실 이러한 자살설이 불거진 큰 이유는,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과 노량 해전의 처절함이 어쩐지 자살하기에 딱 좋은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인 맥락을 조금만 안다면 노량 해전은 생각 만큼 (조선 입장에서는) 처절한 전투도 아니었고, 이순신이 처한 상황 또한 자살하기에는 택도 없는 상황이었다, 는 주장도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노량 해전의 경우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작전에 말려들어 두들겨 맞기는 했으나 여전히 명군과 합세하더라도 150대 500척의 군사적 차이가 있었고 관음포로 도망간 상태에서 입구가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수진을 쳤던 당시 일본군의 상황은 이제 이순신에게 겁먹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이곳을 뚫고가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살설이 이순신 장군의 군인 정신을 한편으로는 폄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노량 해전은 이순신 스스로 그토록 원하던 전투였다. 이순신 본인이 일본군에게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라 전투에 큰 심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도 이순신은 조선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투 현장에서 전 수군을 지휘하고 명군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명령을 중재하고 더 나아가 이의제기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막중한 권한과 임무를 짊어진 것을 알면서,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에게 빌며 원했던 해전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살하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남긴 공적과 군인 정신을 폄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순신 입장에서 이 노량 해전은 최후의 전투도 아니었다. 시마즈는 고니시 군을 구원하러 온 것이었기에 격파했을 뿐, 이순신의 가장 큰 목표는 시마즈가 아니라 고니시였다.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자가 뒤에서 살아남아버렸는데 그 책임감 강한 이순신 장군이 과연 자살을 하려 했을까? 만약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살아남았다면 곧바로 고니시를 부산까지 추격했을 것이며, 아예 부산 근처에 돗자리 펴 놓고 왜군이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제2차 부산포 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77] 노량 해전 이후 조명연합군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군사력이 격렬하게 소모된 것도 있지만 이순신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게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에 노량 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다.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순신 자살설 및 생존설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다가 문중의 항의로 내용을 바꾸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이를 명량이 흥행했을 때 MBN 프로그램인 아궁이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가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 즉 위대한 영웅인 이순신이 적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 한 것이라 평했다.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4.5. 노량해전 무용론과 반박[편집]
산케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적을 기어코 추격하다 전사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순신을 떠받드냐고 비판한 바 있다.
반론하자면 노량 해전 무용론은 당시 사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 멀쩡히 잘 지내고 있던 조선을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안 빌려줬다는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침공한 것이 일본이다.[78]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국력상 보복하러 쳐들어 갈 수도 없으니 이들을 섬멸하는 것만이 7년 전란에 대한 일본을 징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79]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종전과 퇴각은 엄연히 다르다. 노량해전 당시 그 뒤 일본이 조선 땅을 완전히 떠난 후에도 몇 년간 조선, 일본, 명나라의 정부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아직 끝난 전쟁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쟁을 포기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당장 조선 측이 알 리 없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으면 전대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재개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내전에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임자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후대의 눈으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그에게 조선과의 전쟁을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의 누가 그런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정식으로 끝난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정식으로 종전을 위한 국서가 오고 협상한 뒤인 광해군 1년인 1609년 기유약조를 맺은 후이고, 그 사이 약 1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휴전조차 아닌 대치 상태에 가까웠다. 철군 약속은 명나라 장수들이 뇌물이나 개인적 이유로 불법 합의해준 거지 조선이나 명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은 사로병진책이라는 초대형 포위섬멸 작전을 진행해 일본군을 섬멸시키는 중이었고 노량해전도 이 작전의 한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대해 일절 침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골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빠돌이인지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을 경우 진짜 큰일날 수도 있었다. 주인님이 해보지 못한 것을 이뤄 드리려고 도전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80] 설령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끝내 재침공에 실패했다 해도 조선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건 그로부터 더욱 먼 미래에나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이 조선과 명을 압박해 오기 시작하는데, 만일 왜군이 노량 해전을 치르지 않고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으로 퇴각했다면 조선으로서는 자칫 북으로는 만주족, 남으로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야 하는 골때리는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선 측 입장에서 일본의 철군은 종전 이후 철군이 아닌 전략적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었다. 구로다 가쓰히로의 말대로 후퇴하는 적을 고이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들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현대전을 포함해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고 퇴각이나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문제될 거 없다. 현대에 와서도 노량 해전처럼 후퇴하는 적을 얼마나 잘 섬멸시키는지, 반대로 후퇴하는 측은 얼마나 적은 피해로 잘 후퇴하는지의 여부가 전쟁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괜히 전쟁 전술에 추격전술과 퇴각전술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송양공의 사례처럼 고이 보내주는 게 호구짓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명연합수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어 향후 전쟁 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노량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군이 입는 피해의 정도와 무관하게 단순히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게 목표였던 이전 전투와 달리 왜군을 최대한 섬멸하는 게 목표였을 것이고, 야간전이라 평소보다 근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81]
결론적으로 보면 이는 일본군은 전략적 후퇴가 아닌 완전 철군을 했고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가문이 망한 뒤 흥한 도쿠가와 가문은 다시 재전쟁을 할 마음이 없었고 그리고 진짜 그랬다는 것을 아는 현대인 관점에서나 노량 해전이 불필요했다 평가할 수 있는 것이지, 당대에는 노량 해전은 필수불가결적이었다. 더군다나 일본군 측은 항복/강화/철군과 관련된 그 어떤 공식 문서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조명연합군 측은 일본군을 믿고 싶었다 한들 일본군을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군은 그럴 보증이 하나도 없었고 보증 없이 믿었다고 뒷통수 당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노량해전이 없었더라면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장병들이 더이상 죽진 않았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사실 임진왜란 문서에 적혀 있는 일본의 내부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내 유력 다이묘들은 조선 침략에 소극적이었으며, 어쨌든 당시 일본 1인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으니 형식적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가 얼마 안 돼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가 대다수였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일본의 상황을 보면, 나라가 한 번 뒤집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과는 달리 일본 측은 전력을 소모하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임진왜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손쉽게 재건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에도 막부의 쇼군이 됐으니 가능했던 것이지, 만약 노량 해전에서 친 도요토미 세력을 대량으로 섬멸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도요토미파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더 강성한 상태였다면 일본 내 세력 구도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8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이 처절하게 갈려버린 노량 해전, 더 나아가 임진왜란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5.1. 드라마[편집]
5.1.1. 조선왕조 오백년[편집]
마지막 회를 빛내는 전투로 유명하다.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하늘에 기도하는 이순신을 연기한 김무생의 연기는 전율할 정도. 김무생은 그해 연기 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순신의 최후도 적의 구원군[83] 이 온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나가다 총에 맞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유언은 유언대로 하고 방패로 가렸을 뿐 아니라 지휘를 하는 것처럼 앉아서 서서히 사망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부하들도 마지막에야 장군이 사망한 것으로 알게 된다. 진린은 이전부터 찌질이로 나오는데, 진린을 연기한 배우(국정환 씨)가 초반에 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한 명나라 장수 조승훈을 연기한 배우와 같다. 다른 작과 달리 왜군이 진린이 탄 함선에까지 도선해와서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이 연출되며 이를 본 이순신이 진린을 구하는 충실한 고증이 여기에서는 나온다.
5.1.2. 불멸의 이순신[편집]
노량 해전(1598년 11월)
세상의 끝에 선 투쟁
스스로 피흘려 부르는 희망
불멸의 승리를 향해
오라,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전문]
7년 전쟁의 끝
노량해전
이겨서 지켜내리라
내 칼의 마지막 울음
칼날 사이로 열리는 세상
불멸의 역사가 온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4회 ~ 5회 초반, 마지막회(104회)에서 나왔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치열한 전투신, 김명민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4회는 칼의 노래를 많이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설정으로 비난이 많았던 부분, 도자기 운운하는 도자기 덕후 왜군 일당,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동귀어진하는 이영남[85] , 고질적인 파열탄 등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회(104회)는 4회와는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으나 4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4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4회와는 달리 역사상의 전투 기록과 대부분 비슷하게 나왔으며 파열탄, 동귀어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등자룡이 전사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86]천지신명이시여, 이기게 해 주소서.
적을 무찌른다면 저 노을을 따라 오늘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들의 피로 물들였던 바다일세.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진린을 설득하여 고니시를 구원하러 오는 일본군 지원군에 맞서기 위해 출전을 한다. 매복을 하고 있다가 사거리 내에 왜군이 접어들자 시원하게 포를 쏘는 것으로 전투의 서막을 알린다. 야간전투인 것을 제외하면 여느 이순신의 해전처럼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다. 불멸의 이순신 자체가 마지막에 전사+자살설을 절충한 거라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스스로 벗어[87] 전사한 이영남에게 덮어준 후 직접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한다. 붉은 철릭 차림에 조총 사거리 내에 대장선이 들어섰고 결국 조총에 맞게 된다.[88]
이순신이 총탄에 맞자 역사대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한 후, 송희립이 울부짖음과 더불어 독전고를 두들기면서 돌격하라고 소리치며 이완 역시 돌격을 명령하게 되자 명나라 측의 진린과 모든 조선 장수[89] 들이 칼과 활을 빼들어 공격하는 모습과 이순신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참다가 송희립의 승전 보고를 듣자 마침내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고, 주변에 있던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우는 장면은 드라마의 마지막편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의 최후를 그린 전투답게 비장한 OST와 배우들의 연기가 어울려져 많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통제사 이순신, 그와 함께 우리는 왜적을 맞아 23번을 싸워 23번을 이겼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 이긴 것은 비단 왜적만이 아니었다.
ㅡ장수들의 회상 전 권준의 독백
"우리는 지난 200년간, 조선 사회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수많은 관행, 그리고 구습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ㅡ무의공 이순신
"또한 우리는 무기력하고 나태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
ㅡ김완
"우리는 수많은 불가능에 도전하고 또 도전했으며 마침내 승리했다."
ㅡ나대용
"패전의 뼈아픈 치욕과 싸워 승전고를 울렸다."
ㅡ우치적
"깊은 절망과 싸워 이겼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영웅이라 이름하기에도 너무나 큰 인간, 이순신.
우리는 그를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 묻는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왜적을 맞아 전승을 기록한 위대한 군인으로만 그를 기억코자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원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용기가 있을 때, 백성을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90]
ㅡ 불멸의 이순신 노량 해전 마지막 권준의 내레이션,[91]
KBS
5.1.3. 징비록[편집]
50화에서 묘사된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는 장면이 발 CG인 것,[92] 또한 불멸의 이순신의 칠천량 전투씬 장면 일부를 재활용해 뜬금없이 거북선이 등장하거나 판옥선이 포격을 맞는 장면이 나온 것, 그리고 실제로 전투에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93] , 타치바나 무네시게, 테라자와 히로타카 대신 노량 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으며 노량 해전이 발발하기도 전에 일본으로 퇴각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나온 것이 흠이다.[94]
그래도 마지막 전투이자 드라마의 마지막 화인만큼 치열한 전투의 분위기는 잘 살린 편.
5.1.4. 임진왜란 1592[편집]
5회에 나온다. 예산상의 문제로 대부분 징비록, 불멸의 이순신 장면을 재활용하였다. 그래서 전투 장면의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못 받으나 이전의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들과는 달리 노량 해전의 고증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는 역사 왜곡을 저지른 이전 사극과는 다르게 고증대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조명 연합군의 주적으로 나오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아예 노량 해전 장면에 나오지도 않는다.
5.2. 영화[편집]
5.2.1. 성웅 이순신[편집]
김진규가 주연 및 감독을 맡은[95] 성웅 이순신에서는 대낮[96] 에 전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조선 수군과 이순신에 호의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명장 진린[97] 이 나오는 것이나, 일본 측 장수로 고니시 유키나가[98] 만 나온다.[99]
5.2.2. 노량: 죽음의 바다[편집]
자세한 내용은 노량: 죽음의 바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다큐[편집]
5.3.1.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편집]
1992년에 제작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4부작.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당해 왜성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그동안 조선에서 노략질한 금은보화를 탈탈 털어서 뇌물로 주고 자신들을 몰래 빼내달라고 사신을 보내 협상하지만 이순신이 엄청나게 빡돌아서 "우리 조선을 이 지경까지 망가뜨린 놈들은 절대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게 된 탓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열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들이 잡아두고 있던 명나라 병졸 포로 중 2명의 손목을 잘라서 진린에게 그 4개의 손을 보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러 왔고 이순신은 이런 시마즈 요시히로를 완전히 박살냈다. 특히 이순신은 휘하 병력들에게 그동안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자제하고 있었던 백병전까지 허락해가면서 왜군을 모조리 도륙할 것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한밤 중에 해변에서는 조선군들과 왜군들이 각자의 군함을 옆에 두고 패싸움을 벌이게 된다. 무기를 든 병력도 있고 주먹질로 싸우는 병력도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가 제대로 묘사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조하러 가는 왜군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조하지 못하게 막는 조선군 간의 현피였다. 결국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구조한 병력보다 전사한 병력이 훨씬 많았다.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으로 여러 가설을 제기했다. 뭐가 옳다고 딱 잘라 주장한 것은 아니고 그냥 여러가지 가설을 내놓았을 뿐이다. "진두지휘하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 전투엔 갑옷이 아닌 구군복을 입고 참전해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조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전사했다", "전사하지 않았다. 15년 뒤 아무 이유 없이 이순신의 무덤이 800m 이장했다"
엔딩은 해가 뜰 무렵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들과 같이 뛰어서 도망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식량이 다 바닥나서 군마를 도축해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맨 마지막에 허리와 다리에 큰 중상을 입고 엎드려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두 팔로 기어서라도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왜병의 모습이 보인다.
5.3.2. 기타 방송국의 다큐들[편집]
- 2008년 5월, KBS 한국사전(3부)에서 불멸의 이순신 전투장면을 편집 및 활용하여 방송하였다. 이순신 자살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기도.... 3부
- 2016년 5월,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도올이 강의했다. 예고편
- 2021년 5월, 국방TV(국방홍보원)에서 노량해전 해설 다큐를 만들었다. #
- 2022년 7월,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했다. 방송분
- 2022년 12월, SBS 비디오머그가 이순신 은둔설을 다루었다. #
5.4. 소설[편집]
5.4.1. 칼의 노래[편집]
2001년 김훈의 소설. 서문 마지막 문장은 노량 해전을 앞둔 이순신의 독백이다.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다. 뇌물을 받고 싸움 직전 퇴각하는 일본군을 그대로 놓아준데다, 대놓고 싸우기 싫어하는 진린을 바라보며 충무공은 '이 자식 죽일까'라고 독백한다.[100] 전투에 앞서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라고 독백하며 면사첩을 불태우는 충무공의 모습은 비장미의 절정이다. 이순신이 총탄을 맞고 서서히 숨이 끊어지며 되뇌는 독백도 진국인데,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것은 자연사와도 같다며, 자신의 죽음에 오히려 안도하는 모습은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동시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 난중에 죽은 여인 여진과 아들 이면의 냄새를 떠올리는 묘사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면모도 눈물겹다.
5.4.2. 타임슬립 쓰시마 해전[편집]
1994년 영 챔프 창간준비호에 실렸던 단편으로 글, 그림은 김은기. 1994년 당시 남해에서 해상훈련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함정 2척이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16세기 말로 타임슬립을 하게 되는데,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노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군 함정 지휘관은 역사에 개입할 수 없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노량에서 빠져 나가는 시마즈군의 잔존 함대는 20세기 무기들로 전멸을 시켜버리고 다시 원래 시간대로 귀환한다는 이야기.
5.5. 게임[편집]
5.5.1. 임진록 시리즈[편집]
1997년 게임 임진록과, 2000년 게임 임진록 2에선 조선 진영의 마지막 캠페인으로 등장하고, 2001년 임진록 2의 확장팩 조선의 반격에선 첫번째 미션으로 등장한다. 차이라면 조선의 반격에서는 이순신이 죽지 않고 부상당했으며 이후 시나리오에서 전장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5.5.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편집]
1999년 게임. 단편 캠페인 모음인 "역사적인 전투"에 포함되어 있다. 실제 역사와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게 단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캠페인 공략/역사적인 전투 항목 참조. 여담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의 캠페인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간대의 미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