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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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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號 / Kwan Kwang Ho[1]
파일:観光号11-46-42.jpg
월간 한국철도 1969년 2월호에 나온 관광호. 출처
1. 개요[편집]
1969년 2월 10일(시운전은 1969년 2월 8일)에 운행을 개시한 대한민국의 최상위 열차 등급.[2]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 관광호는 현재 ITX-새마을 따위와는 급이 전혀 다른, 레일크루즈 해랑에 필적하는 초호화 열차였다.[3]
최고속도는 1969년 기준 90km/h, 1973년 이후 120km/h로 당대 열차등급들 중 가장 빨랐으며 5시간 45분 (1969년 6월 10일부터 운행시간이 4시간 50분으로 단축) 만에 경부선 서울[4] - 대전 - 동대구[5] - 부산[6] 만 정차하며 운행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전설의 '서대동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라는 노래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2. 구성[편집]
2.1. 기관차[편집]
열차 등급처럼 1964년 등장하여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지금도 철도 교통 역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신칸센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흔히 신칸센 기관차라고 하는 위 사진 속 7507호[7] 가 등장했는데, 저런 모습은 할 게 없어서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객차를 전부 일본에서 들여오면서 기관차도 열차 이미지에 어울리도록 신칸센 0계 전동차 선두차와 유사한 외형으로 개조했기 때문이다. 이 기관차는 한동안 전용 견인기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가거나[8] 화물도색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있던 당시에도 일반 특대형 기관차가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신칸센 기관차는 소수, 그것도 초창기에 좀 운행하다가 사라졌고[9] 실제로 관광호와 1986년 이전까지 새마을호 대부분은 EMD GT26CW가 기관차로 사용되었다. 이후 1971년에 7100호대 기관차가 들어오고, 일부 기관차에 흰색+파랑색으로 도색하고 전용기로 운용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2.2. 객차[편집]
속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신칸센에 견줄 수 있도록 최고급으로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오로지 수송이라는 측면에만 집중해왔던 한국 철도청이 처음으로 승객들의 쾌적한 여행이라는 개념을 실현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열차였다. 당시에는 오로지 일반열차(통일호급)만 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당시 저런 호화 열차가 등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최상급"을 추구했기 때문에 전부 일본산(히타치 제작소, 일본차량제조)이었다. 구입할 때 들었던 돈은 정부가 보유한 외환이었다. 차축 발전기로 선풍기 돌리고 간신히 전등이나 켜던 시절에 전용 발전차를 달아놓고 에어컨까지 설치했다. 1970년대에 에어컨이라고 하면 부의 상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굉장한 사치품이었고 대중화는 1990년대 초반에야 이루어졌다.[10] 에어컨이란 물건 자체가 가정에 거의 보급되지 않던 1960 ~ 70년대 대한민국 경제수준을 감안하자면 말 그대로 상위 1%만을 위한 열차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11] 이 당시에 국내에 에어컨이 달린 곳이라면 온도에 민감한 몇몇 연구소, 대형병원 특실, 외국계 특급호텔, 극장, 경주 석굴암[12] , 관광호, 여객기(정확히는 여압장치) 정도뿐이었고 청와대조차도 없었다.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금수저인 시절이었다. 고속버스도 그 당시에 에어컨이 있다보니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즉 초호화 교통수단이었고 경쟁 대상이었다.[13]
또한 유선/장대형 새마을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전용 컴파트먼트[14] 좌석까지 있었는데 집안에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있으면 잘사는 집안 취급받던 시절에 서민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사치였다.
대차도 당대 최첨단이었던 NT-21 대차를 사용하면서 쾌적한 승차감은 물론 대차의 설계최고속도가 150km/h에 달했다.[15] 1969년 당시에는 선형의 한계로 90km/h까지밖에 내지 못했으나 이후 140~150km/h로 상향되었다.
그렇기에 이 열차를 타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재벌이나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같은 금수저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보면 될 정도로 고급 열차였다.
좀 더 자세한 내부모습과 당시 상황에 대해 잘 나온 선데이 서울의 기사가 있다.
2월 8일 하오 1시 20분 -「관광호」가 시험운행을 시작함으로써 24년 만에 우리나라에 1등 객차가 부활되었다. 「살롱·카」 「비즈니스·룸」 등 「딜럭스」 시설을 갖춘 이 「달리는 응접실」은 오는 4월부터 경부(京釜)간을 4시간 45분에 달려 「꿈의 초특급」 구실을 할 예정.
엷은 「오린지」빛 바탕에 하늘색 띠를 두른 이 「딜럭스」 열차는 특1등 1량, 1등 8량,「살롱·카」1량, 발전차 1량 모두 11량으로 편성된 호화판 객차로 우선 그 내부시설을 살펴보면 -
◇ 특1등 = 푸른 「카페트」가 깔려 있고 전기「히터」32개와「쿨러」(냉방시설) 6개가 달려 있어 자동온도조절. 좌석마다 안내원을 불러낼 수 있는 초인종이 달려있고 베개[16]
, 휴지통, 간이탁자 등이 있다. 뒤에 마련된 3석의 「비즈니스·룸」에선 사무를 볼 수 있는 탁자와 칸막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변소는 양식(洋式).◇ 1등 = 종래 1량에 72좌석이던 2등에 비해 좌석 56개로 좌석 간격이 넓어서 좋다. 모든 시설이 특1등과 같으나 초인종, 「비즈니스·룸」, 베개가 없으며 변소는 재래식.[17]
◇ 발전차 = 종래의 객차발전은 객차마다 직류전원이 달려 있었으나 「관광호」엔 따로 발전차량을 달아 4백kW의 발전량으로 전력 공급. 이 전력은 2천 세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18]
이 「관광호」의 모든 객차, 발전차는 새로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총 236량)「관광호」의 도입값을 따져보면, 특1등 1량 2,250만원, 1등 8량(1량 2천만원) 1억 6천만원, 발전차 1량 3,598만원,「살롱·카」1량 2,520만원으로 총 2억 4,368만원이 된다. 가위 시설뿐만 아니라 가격면에서도「수퍼·딜럭스」열차.
철도청은 관광「시즌」에 대비, 외국인 국내관광객이 단체로 이용할 때에는 전세 운행도 할 방침. 한편 이「관광호」의 운행에 앞서 철도청은 12만 7천 입방m의 도상(道床)자갈을 보강하고 경부간만 약 12만개의 PC침목을 바꾸어 끼어 침목의 84%를 PC화 했다. 또 앞으로 1등 객차엔 그 시끄럽던 이동판매원을 타지 못하게 할 방침이라고.
8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떠난 「관광호」의 행운의 첫 시승(試乘)기관사는, 서울은 경력 15년에 32만여km를 무사고로 달린 김교원씨(서울기관차사무소소속), 부산에선 경력 16년에 70만km를 무사고로 달린 이동진씨(부산기관차사무소소속)[19]
가 몰았다.시승 당일 철도청은 국내외 귀빈들을 초청, 시승케 하고 여행용 「백」, 기념「메달」, 맥주, 「토스트」, 「코피」[20]
, 「카라멜」, 신탄진 담배[21] , 과자 등 푸짐한 선물. 여기에 든 비용만 6백만원이란 얘기다.[22]운행 도중 시승권 추첨놀이를 하여 가수 김「세레나」양이 추첨결과 1등 1377번의 이한용씨가 당첨, 3개월간 전선(全線)무임승차권[23]
을 받고 2등은 1258번, 3등엔 1053번 등이 각각 당첨.최연소 시승객은 L국회의원 아드님인 6살짜리 꼬마.[24]
이 꼬마귀빈은 수원역을 지나자 그만 잠에 골아 떨어져 「카라멜」을 손에 쥔 채 특1등객차 2좌석을 점령하고 단잠에 녹아 떨어졌다.한편 철도병원에서 나온 의무반(의사 1명, 간호원 2명)에 첫 신세를 진 사람은 17세인 소하물(小荷物)운반원 서(徐)모군.[25]
서군은 물건을 나르다 왼손 식지 끝을 다쳐 응급처치를 받았다.김기형 과기처장관, 이훈섭(李勳燮) 철도청장, 김「세레나」양이 한편에서 한담을 나누는가 하면 가수 최희준,「디자이너」「조세핀」조(趙), 김비함씨 등이 모여 앉아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지만 경부간 특1등 4,700원, 1등 4,200원으로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 이 엄청난 운행요금은 서민(庶民)들에겐 아직 그림의 떡.
경향신문이 이 호화열차를 비판한 바 있다. 1969년 5월 1일 철길을 횡단하던 농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으려고 급정차하다가 탈선한 사고를 예를 들며 선로개량 등 조치없이 운행속도를 높이는 것은 모험이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3등석이나 2등석을 폐지한 것은 서민들에게 철도 이용을 어렵게 하며 소외감을 준다고 지적했고 초특급 열차 운행중지와 3등석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2.3. 객차등급[편집]
특1등칸과 1등칸이라는 사치스러운 구성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서울 - 부산 간 운임은 특1등칸이 4700원, 1등칸이 4200원이었다. 참고로 위 기사에서 비교 대상인 비행기값이 4800원. 당연하지만 이걸 탈 돈이 있으면 웬만하면 돈 조금 더 내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게 더 나았다.
지금과는 경제구조가 여러모로 다른 시대였기 때문에, 이 금액이 지금 물가로 환산해서 어느 정도가 되는지 일률적으로 계산하기는 쉽지 않다. 소비자물가지수로 계산하면 1969년 특1등칸 운임인 4,700원은 2020년 환산하면 117,218원 정도라고 계산이 되고, 당시 언론기사에 따르면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다고 했는데 현재 보리쌀 80kg 가격이 12~13만원 정도 한다. 결국 관광호 운임은 현재 KTX 일반실의 두 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서민들이 체감으로는 이보다 훨씬 부담스러웠다. 1973년 석유 파동 직전 평균 생계비가 3만 원 정도였고, 공장직이나 안내양같은 저임금 직종은 월급이 1만 몇천원 정도 받는 수준이었고 중위 공무원 월급이 2~3만 원대였으니 9급 공무원 초봉이 편도(...)운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가전제품 하나씩 사들고 온다는 월남전 파병 병사 월급이 1.5만 원 정도였으니 얼마나 비싼건지 감이 올 듯. 위의 보리쌀 한 가마 값 운운하는 것도, 먹을것이 지천에 흔한 오늘날에는 별 감흥이 없겠지만 이 때만 해도 매우 귀중한 식량이었으니 그 가치를 동등하게 보기도 어렵다[26] .
대략 서민들이 느끼는 2022년 현재의 물가로 환산해 본다면 서울 - 부산간 왕복 운임이 40만~50만원 까지 나간다고 볼 수도 있다. 위 기사의 시내버스 요금 10원과 현재 서울 시내버스 요금 1,200원으로 비교하면 실제로 50만원 정도 나온다. 그 시절에 서울-부산 여행은 지금 해외 여행과 비견될 정도로 먼 거리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편도 운임만으로도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녀올 수 있고, 왕복 운임이면 괌, 사이판까지도 갈 수 있는 수준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운행하는 열차 중에서는 레일크루즈 해랑이 관광호와 비슷한 포지션이라 할 수 있겠다.[27] 해랑 가격을 나누어보면 3일 일정 기준으로 하루에 100만원, 4인 기준이니 25만 원으로 관광호보다는 훨씬 싸다. 게다가 해랑은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300만원이지만 관광호는 편도가 40만 원이니 은근 비싼 셈이다. 2인실이 290만 원이며 계산해보면 1인당 약 48만 원, 이것도 하루 머물러 있는 거다. 가격만 봐도 관광호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열차였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이 당시에도 공무원과 대기업 종사자들 가운데서 타 본 사람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자기 월급으로 타기는 부담스러우니 회사 업무비로 탔을 것이다.(...)
3. 왜 도입되었는가?[편집]
말 그대로 관광용 호화 열차인데, 정확히는 외국인들(+ 국내 부유층)을 위한 특급이었다. 이 내용을 알려면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이 1964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쟁으로 파괴된 낙후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불과 20년 만에 벗어던진 것도 그렇거니와, 하이테크 기업으로 무장했으면서도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아시아의 신비스러운 나라이자 세계적인 경제대국이라는 이미지메이킹을 하기 시작하자 한국인들도 이에 자극을 받았던 것인데, 특히 관광 자원을 서구에 팔아먹는다는 데서 그러했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일본이란 "5천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한국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역사를 가진 나라", 좀 거칠게 말하면 "한국 역사 짝퉁"[28] 에 불과했기 때문에 → "어라 그렇다면 우리도 하면 되는 것 아냐?"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29] 특히 관광산업의 경우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면 그것이 곧 외화벌이가 된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 초반 한국관광공사가 설립되었고 본격적인 관광자원 개발을 시작하였다. 당연히 한국에도 역사적으로 자연풍경을 관광한다는 개념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팔도를 유람하며 남긴 수많은 시와 서화들이 그 증거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도 금강산선이 부설되어 관광객을 실어나르기도 했다. 비록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 경복궁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적지와 사적이 파괴되었다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유적지와 사적들을 개보수하고 파괴된 유적지들을 복원하는 작업도 병행하면서 관광지를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30] 그러나 문제점은 철도와 도로를 비롯한 현대적인 인프라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는것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에서 개발 가능한 가장 큰 관광단지였던 경주는 서울에서 접근하기 매우 불편했다.[31] 따라서 철도로는 서울과 국내 제2의 도시 부산을 연결하는 겸하여 관광호가, 버스로는 경부고속도로가 경주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지어지게 된 것이다.[32]
이런 목적의 관광열차는 사실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더 사례를 흔하게 찾을 수 있다. 당장 관광호의 모티브가 된 신칸센 0계 전동차가 하필 1964년에 개통된 신칸센이란 점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올림픽은 도쿄에서 열리는데 왜 신칸센이냐 하면 도쿄에 관람 오는 지방 관객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쿄 하네다로 입국한 외국 관광객들을 교토로 실어나르는 가장 빠르고 편리한 수단이 신칸센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때에는 소치까지 고속열차가 들어갔고,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때는 장자커우까지 고속철이 들어갔다. 유럽의 명산들마다 설치되어 있는 저속의 '푸니쿨라' 궤도들까지 포함하면 이런 예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사실 이런 관광용 장거리 열차의 정수는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일 것이지만...
4. 새마을호 개편 후[편집]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편되고 객차와 기관차들이 그대로 인수인계되었으며, 관광호와 동일한 객차는 1982년까지 꾸준히 도입되었다. 1986년에 유선형 새마을호 객차와 1987년에 DHC 디젤동차가 도입된 이후에도 대부분 새마을호로 운행했다. 1992년에 무궁화호 특실 객차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내구연한이 도래해서 퇴역된다. 관광호 객차는 1990년대 초중반에 이미 퇴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한 량은 곡성 기차마을에 가면 볼 수 있다. 이야기에 의하면 그중 한 량이 시험차로 무궁화호 도색에 99xxx호를 부여받고 끝까지 살아남았었다고도 한다. 이를 추적한 어느 철덕에 의하면 1968년에 일반실로 도입된 11060호가 1976년에 시험차로 전환된 뒤 1980년에 99311호로, 1997년에 99991호로 차량번호가 변경되었다.# 2005년에 차적에서 삭제됐다.[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