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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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세 고려 왕조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에 대하여 다룬다.
1.1. 종합[편집]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족)와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을 막아내며 훗날 요송과 더불어 균형적인 삼강 체제를 이룰만큼 국력과 위세를 뽐내며 120여년간의 황금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다 중기에 들어서며 내부적으론 문벌귀족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요와 북송을 차례로 쓰러트린 금나라(여진족)가 금이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이후 몽골 제국과 30년간의 기나긴 전쟁 끝에 결국 입조하여 원의 제후국이 된다.
다만 금과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몽골 제국에 쓸려나가는 동안, 고려는 비록 조정은 강화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 정규군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을 하게 된다. 몽골군 초기 침입군의 총사령관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살리타이인데, 이 사람은 무칼리가 이끌던 잘라이르부 출신으로 이 부족은 당시 최강대국이자 몽골족 최대의 원수 금나라와 여러 차례 정면으로 충돌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스님인 김윤후에게 죽었다고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살리타이 본인도 금나라와의 전면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였던 초기 몽골에서 능력이 없었으면 그 정도 지위까지 가지도 못했을 테고. 이후에는 원정 병력의 정예도가 좀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걸 보면 전쟁 후반부에도 몽골 수뇌부는 베트남 쩐흥다오를 포함하여 고려가 끈질기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하지만 실제 전과 기록을 보면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무신정권의 방치 속에서 일어난 일방적인 초토화였는지 논란이 많다.
쿠빌라이의 해당 발언 또한 당시 쿠빌라이는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전이었고, 대칸의 자리를 두고 아릭 부케와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은 아릭 부케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전임자였던 뭉케 칸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릭 부케를 찍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쿠빌라이는 비몽골족 출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한화정책을 추진한 이면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외국의 사신이, 그것도 외국의 태자가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 사건이였기 때문에 쿠빌라이로서는 기뻐하는게 당연했다. 한마디로, 쿠빌라이의 저 말은 고려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거나 우대해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고려 태자에 대한 기특함에서 나온 거창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당시 고려는 적절한 외교술을 벌인 것으로 평가받는데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이 그러하다. 하지만 여몽전쟁 당시 고려가 정말로 제대로된 외교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의견 또한 많다. 임용한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당시 고려 조정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와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를 참조.
결과적으로 고려가 비록 큰 피해는 입었지만 나라의 멸망은 피하였고, 이후 몽골제국에 신속하여 속국·속령이 되었다. 원 간섭기 고려와 몽골의 종속 관계를 두고, 독립국으로 유지되는 한편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이중적인 현상 때문에 당시 고려의 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몽관계를 전통적 한중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조공책봉관계론'이 있으며, 김호동과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제국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여 각각 대몽골 울루스의 외연적 속국·카안 울루스의 내포적 속령으로 규정하거나 '투하령(고려왕부)'으로서 재래왕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으나 그 강역 자체를 고려국왕이 배타적으로 점유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견해는 학계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한편 샤오지칭(蕭啓慶)은 당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하에 놓인 보호국에 준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蕭啓慶(1983),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
이후 고려 후기 원이 쇠퇴하자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면서 기존의 몽골-고려의 종속적인 지배 구조를 재편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렸기 때문에,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
공민왕 이후 제대로 된 독립국으로 회귀한 뒤에도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시해, 권신 이인임의 전횡, 홍건적과 왜구의 대규모 침공 등으로 내우외환이 이어지다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원정군 사령관으로 보냈던 장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원정군 병력으로 개경을 함락하고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면서 사실상 실세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왕실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1392년에 이성계 본인이 국왕에 등극하면서 왕씨 왕조는 멸망을 맞이했고 고려로 남아있었던 국호도 1393년에 조선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호인 고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을 실천하여 초기부터 거란에게 강경책을 구사하는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존속기간 내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요나라와의 총력전을 마다하지 않고 고구려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자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을 과감히 단행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무신들을 차별대우하며 문신들을 우대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도 많이 일어났었고, 국가 역시 무신정변 이후로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고려는 초기때 부터 문신들을 우대하고 무신들을 반대로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현종 시절 당시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었다. 거란의 제3차 침입을 대비하던 도중에 일어났던 이 반란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을 빨게 만들어버렸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침임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3년차 1012년으로 그러니까 반란 2년 전이었다.
이때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에 이미 거란과 산발적으로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년 ~ 1011년, 3차는 1018년 ~ 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7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는 피해를 입었지만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거란 또한 고려의 땅을 빼앗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조치는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뿔난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을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모두 들어줬다. 그러나 몇 달 안가 현종이 이자림[1] 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서경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하면서 의외로 싱겁게 끝나게 된다. 이는 한 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운몽 연회의 고사를 차용한 것이었다. 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 비중이 적은 사건이다. 단 비중이 적을 수 밖에 없는게 이 당시 군주는 무신정변때의 암군들이 아니라 고려 최고의 명군 중 하나인 현종이었으며 현종은 사건을 단숨에 처리함과 동시에 이후에 일어날 수 있을만한 건덕지를 마련하지 않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며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기때문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는 종교적으로는 통일신라의 대를 이어서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한반도의 전통문화와 현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치관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은 적다고 사료되지만. 한국 불교의 많은 의례들이 사실상 고려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불교 신자들의 수가 전체 인구중에 20%가 넘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영향력이 적다고도 할 수 없겠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교 즉, 성리학 또한 안향에 의해 고려 중기 때 도입된 사상이니 이 또한 고려의 영향력이 후세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고려라는 이름은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로는 고려인삼, 고려은단, 고려아연이나 자영업으로는 전국의 그 수많은 고려 삼계탕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에서 명실상부 백제, 신라, 조선과 함께 기업체나 가게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국명이다. 고려대학교, 북한의 고려항공과 고려호텔 역시 유명하다. 이것은 고려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체성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일명 '고려청자'라고 불리는 고려 시대 상감청자는 지금도 제작하는 도공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표 공예 장식품 중 하나로서 대접받고 있다.
2. 최초의 자력 통일[편집]
고려는 신라와 달리 외세의 개입 없이 통일을 이루어냈다. 순수하게 한국사 토착 세력들이 본인들의 힘만으로 이룬 통일이기 때문에 고려 왕조는 한국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신라의 경우 엄연히 발해라는 한국사 국가의 존재로 인해 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도 아니다. 실제로 신라의 불완전 통일 이후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지칭한다는 점은 통일신라와 비교해서 고려의 통일에 보다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2]
물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외세를 끌어들인 걸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외세를 신라보다 먼저 불러온 게 백제다. 백제는 이미 6세기부터 수나라를 불러들여 고구려와의 싸움에 견제할려다 실패했고, 5세기에는 개로왕이 남조의 유송에 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다. 오히려 신라는 7세기 중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지형적 리스크와 위축된 국력을 타개하기 위해 외세와 동맹을 맺은 것도 엄연한 전략이자 외교술의 산물이며 당대 삼국이 서로 으르렁대는 적국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신라는 당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아야 했고, 두 나라를 무너뜨린 뒤에도 한 차례 대규모 전쟁을 치른 후에야 겨우 당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후에도 이전 삼국의 터줏대감 세력들을 혼자의 힘만으로는 완전히 찍어누르기 힘들어 이들은 후삼국시대에 유민의식을 여전히 갖고 호족세력으로 발흥하게 된다. 게다가 신라의 통일 당위성에 대한 의문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3]
반면, 왕건의 고려는 한국사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가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달리 외세와 손을 잡을 의지가 없었고 국제정세상 손 잡을 세력조차 없었다.[4][5] 게다가 당시 국제정세도 한반도 주변 세력들이 모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에, 고려에게 비교적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반도와 지정학적으로 밀접한 당나라는 후삼국에 버금가는 난세에 처해 있었고, 만주의 경우 멸망 직전의 발해가 요나라에 맞서 힘겨운 항전 중이었으며, 해양 세력인 일본도 헤이안 시대 들어 천황 권력의 약화와 견당사 파견 중단 등에다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인한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고려보다 후백제는 외교에 꽤나 공을 들였다. 후백제는 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삼면에서 고려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후백제에 도움을 줄만한 세력들이 제앞가림하기도 바빴기 때문에 의미있는 외교적 협력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항해 중 풍랑에 몰살당했다.
3. 단일 국가관 정착[편집]
고려는 한민족으로서의 의식적인 통합을 이루고 단일한 국가관을 정착시켰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이라는 의식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국사에서 고려의 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고려 이전 신라의 삼국통일의 결과는 남북국시대가 되었으며, 그나마도 신라 내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의식까지 통합해내진 못했다.
신라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물론 신라가 유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특별히 박해했던 건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삼한일통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고, 지방민 차별이라는 것도 통일 이전 기존 신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던 골품제를 비롯한 여러 신분제와 차등 대우들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기존 신라인들보다 더 큰 박탈감을 주었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신라가 쇠약해질 때까지 200여 년의 시간이 지날 동안 통일신라 백성들의 통합된 국가관이 생성되지 못했고, 결국 시간이 지나 신라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는, 중국 최초 통일왕조 진나라가 통일 후 겪은 부작용 및 재분열 이유와 비슷했다. 진나라 역시 통일 이전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늘 하던 대로 통일 후에도 전국에 엄격한 법가적 통치를 적용했던 거였으나, 원 진나라 영토의 백성들과 달리 통일로 새로 얻은 나머지 6국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전통과 맞지 않는 법가적 통치에 반발심이 있었고 진나라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법치든 신라의 골품제든 기존의 사회 제도 내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축적해 온 기존의 신라인/진나라인들에 비해 피정복민으로써 새로 이 사회에 편입된 백제인/고구려인 및 육국인들에게는 그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 자체가 일종의 차별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복국 입장에서는 새로 편입한 영토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당연히 요충지에 지방관을 파견해야 하고, 당장 직전까지 전쟁하던 피정복국 귀족들에게는 반란의 위험성 때문에 보좌나 바지사장이나 낮은 자리 정도면 모를까 요직을 주진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귀족 대우를 거진 박탈하는 지경까진 잘 가지 않는다. 전후에 인구 증가 및 개발로 인해 증설되는 지방행정단위에 기존 기득권층인 중앙귀족만 쑤셔박으면, 기존 백제, 고구려 지배층의 유민일 수밖에 없는 호족들은 아예 그냥 국정 자체에 참여하지 말란 얘기밖엔 안 된다. 고려가 통일하면서 새로운 기득권층이 된 패서호족들은 어디 신라 진골처럼 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렇게 하면 지방반란으로 인한 망국 외엔 길이 없는 걸 아니까 못했던 거였다. 이런 식으로 피지배국의 옛 유력자 출신들의 역량이 전후복구 등으로 인해 성장하는 것에 비해 차별이 존재해 파이는 모자란 상황에서 기후 등의 문제로 기근이라도 들어 맬서스 트랩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불안한 정국이 발생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 완성되는데, 결국 그걸 고치거나 방지하는 걸 끝끝내 막아버린 것에서 신라 진골층의 어리석음은 변명할 길이 없다.
이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만큼 신라 귀족 집단이 피지배층은 물론이고 타 삼국의 지배층들에 대한 동질감마저도 낮았을 만큼 배타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신라는 삼국시대 삼국 중에서도 유독 지배층의 배타성이 짙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었다. 물론 신라 왕실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6] , 혜공왕이 피살된 후에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심지어 6두품까지 배제하게 된 진골의 독점으로 급격히 추가 기울게 된다.
그래도 무열왕계가 왕위를 계승하던 신라 중대에는 경덕왕의 사례처럼 구 백제 지역을 특별히 신경썼지만, 무열왕계가 어째서 그렇게도 옛 백제 지역을 신경쓰고 나름 우대했는지 그 문제의식을 이해하지 못한 원성왕계는 직접 지배 제체가 그래도 잘 돌아가는 옛 백제 지역에는 거의 잘 신경쓰지 않은 것 같고, 엉뚱하게도 정작 신라 왕실에게 별 악감정은 없었던 패서 지역에 의혹을 품고 경계했다.[7] 또한 그전 눌지계 신라 왕실과 습보계(=무열왕계) 신라 왕실은 대백제전, 대고구려전, 나당전쟁에서의 잦은,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로 얻은 큰 권위를 통해 진골들을 다소 강압적으로 다루면서 필요한 개혁은 어떻게든 하거나 해보려 했던 반면, 아무래도 그런 권위는 없었던 원성왕계는 진골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 급진적 개혁은 불가한 상태였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반면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자처하면서 발해의 유민들도 흡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도 이어받았고, 그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신화와 역사의식의 개변이 이루어졌다.[8] 패서 지역 기반 성인인 단군, 기자, 동명성왕[9] 은 삼국 이전부터 한민족의 시조였던 것으로 격상되었다.[10] 단군과 기자[11] 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 고려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였다. 이런 의식 개변 덕분에 마침내 한민족들이 단일 공동체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4. 고구려 계승[편집]
옛 신라가 구층탑을 만들어 일통지업을 달성했으니, 지금 개경에 칠층탑을, 서경에 구층탑을 만들 것이다.
그 현공을 빌려 군추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은 날 위해 소를 지어달라.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백성(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중 발췌.
이제현이 찬하여 말하길: "충선왕께서 늘 이르셨다: '...(생략)...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 김부가 아직 방문하지 않고 견훤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북방을 친히 순시하시니, 그 뜻은 동명구양(東明舊壤)[12] 을 오가청모(吾家靑氈)[13] 로 여기시어 반드시 석권하시려 함이었다. 닭을 다루고 오리를 잡는데에 멈추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14]
...(생략)...
- 고려사 태조 세가 논평 중 발췌.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이 입었다.'
...(중략)...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생략) 태종(太宗)이 만국(萬國)을 신하로 만들어 천하를 지배하려하니 장군(將軍)에게 장수들을 통제하게 해 우리 고려(我高麗)를 침범했소. 장군은 불행히도 이겨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나라(我國)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생략)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 중 발췌.[15]
고려의 국가 정체성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국호부터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명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서 썼고,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의 본기에 고구려를 포함시켰으며, 잊혀질 뻔했던 동명성왕을 국조로 공인해[16]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민족적으로도 스스로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왕건을 포함한 개국 세력부터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17]
하지만 고려의 계승의식은 꽤나 복합적이어서 삼국 중 단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고려 중기에 편찬된 관찬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옛 삼국은 동등했고, 그 중 신라가 삼국을 처음으로 통일하였으나 나중에 그 신라를 흡수한 고려가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식의 관념이 드러난다. 삼국 역대 임금 모두를 '본기'에 넣었다는 점에서 그 부분은 분명해진다.[18] 즉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이다. 이는 고려 초기에 비해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일통 의식이 고구려 계승 의식만큼이나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의 대립설에 대해 정작 고려 당대에는 그걸로 구체적인 파당이나 학파를 이루거나 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19] 즉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은 모순없이 함께 계승되어 왔을 개연성이 큰데 그렇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왕조가 중심이 되어 삼한일통에 성공해 삼국 모두를 계승하는 데까지도 성공했다는 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고려의 통일과정을 보면 태조 왕건은 경순왕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태봉의 군주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어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건국하고 국왕이 된 뒤 어디까지나 항복의 형식으로 신라라는 외국을 흡수하는 형식을 취했고[20] 그런 이유로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게는 정통성에 위협되는 존재로 취급되지 않았는지 이후 신라의 별칭에 해당하는 낙랑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아 군왕(郡王)의 대우까지 받게 되는데 이는 '신라국'은 고려가 접수했지만 신라왕위는 그대로 보전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로 고려 왕실이 '신라왕'이라는 자리를 계승하는 것에서 정통성을 찾았거나 탐냈다면 있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21][22] 이는 고려 왕조가 신라의 삼한일통을 계승하는 것에서 정통성을 찾았던 게 아닌 고려의 삼한일통만을 진정한 통합으로 보고 그 자체에서 정통성을 찾는 독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시작하였고[23] 그 후에 후백제와 신라까지 모두 포섭하여 삼한일통에도 성공하였다는 식으로 보면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은 서로 크게 모순될 게 없게 되는 것이다.[24] 물론 고려 왕조가 백제와 신라 또한 본기로 넣어 정통으로 대우해준 건 비록 고려인이 중심이 되어 통일왕조 성립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백제인과 신라인을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진 않겠다는 강력한 포용의지의 표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고려 왕조는 다양한 출신의 호족들을 포용하는 데 성공했으니 괜히 고려 왕조가 고구려 계승 외의 삼한일통이란 업적에서도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던 것.[25]
결국 이런 배경이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가 분명 좀 더 특별한 위치에 있게 된 이유였던 걸로 보인다. 관찬사서에서는 명목상 차등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와중에도 고구려에 대한 배타적인 계승의식 또한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려시대에 동명성왕은 백제나 신라의 시조와는 달리 고려의 시조로서 더 특별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다.[26] 특정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삼국을 그나마 대등하게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는데 이는 조선이 삼국 중 하나가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대과거에서 나라 이름을 가져오면서 삼국을 초월한 정체성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선 왕조조차도 역대 한국계 왕조의 시조 및 주요 군주들을 모신 팔전(八殿) 중 고구려와 백제에는 하나씩만 할당한 반면 신라에는 세 곳이나 할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대에는 삼국에 대한 균등한 계승의식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27][28]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 고려, 조선 모두 각자의 이유로 계승 인식 내 나라 간 차등을 두었고 가장 삼한 계승을 균등히 한 국가는 국호를 삼한을 계승한 대한으로 하고 교과서에서도 균등하게 분량을 배분하는 현대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다.[29]
참고로 단군의 경우 조선 대에 들어 단순히 한 국가의 시조나 성인이 아닌 한반도 전 역사의 시조이자 근원으로 떠받들어졌기에 삼국의 시조들과는 달리 전국적으로 숭배되기 시작해 원래 단군 신화와 관련이 깊었던 구월산의 삼성사 외에도 신화와 전혀 관련없는 남부 지방인 하동군 청학동에도 삼성궁이 세워지고 환인, 환웅과 함께 모셔지는 등 격이 다른 엄청난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강화도의 참성단 또한 단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팔전 중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았던 건 조선의 직계 부모 국가라 할 수 있는 고려의 사당으로 고려 왕조의 사당인 숭의전에는 가장 많은 군주들이 배향되었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 고려사의 공민왕 대 기록. 요동을 고토로 보던 당시 고려 조정의 인식은 물론 그걸 당대의 상식처럼 알고 있던 원나라 변방무장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와 영토를 계승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고토였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꾸준히 주장했으며 이를 수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병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비롯해 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 차례나 북방원정이 추진되었다. 고려는 영토 수복에 대한 근거로 자국이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대외적으로 강력히 주장했다. 요나라의 1차 침공에서는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런 고려의 노력 덕분에 고려는 당대에 국제적으로도 고구려의 적자로서 인정받았다. 고려의 주적이었던 요나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는 고려사 문종 세가 11년 3월조에 있는 요흥종의 고려 문종에 대한 책봉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요나라는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30] '라고 불렀으며, 고려 숙종을 언급할때 삼한(三韓), 오부(五部)[31] 의 주인으로 불렸다
몽골 제국의 경우 그냥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나라로 보았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가 항복 사절단을 보내왔을 때 당태종도 무너뜨리지 못한 나라를 자신이 굴복시켰다고 말하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가 아예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진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수도 개경의 동신사(東神祠)라는 사당에선 유화부인에 대한 숭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시각은 발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통일신라라는 또 다른 왕조가 존재했었고, 무엇보다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에 비해 협소했기 때문이다. '만주를 정벌했던 강대국 고구려의 계승국이 소국인 고려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인 것이다. 단순히 만주를 영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발해를 고구려의 정통 후신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고구려 계승에 있어서 고려의 정통성과 역사적 성과를 엄청나게 폄하한 것이다. 또한 영토의 넓이와 별개로 영토의 질과 생산력은 중부와 삼남을 안정적으로 영유한 고려가 그렇지 못한 고구려를 압도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32] 게다가 영토적 유산으로 봐도, 그것을 고려는 발해 이상으로 잘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고토는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와 패서 지역이었고, 그곳들을 차지한 고려는 발해에 비해 고구려의 알짜배기 지역들을 더 많이 차지한 셈이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도 발해보다 훨씬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영유했던 것은 고려 스스로도 고구려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그래서 고려는 평양을 영유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제2수도인 서경으로 삼아 화려하게 재건했다.[33] 이런 정통성과 강력한 계승의식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데 상당한 당위성을 더했다. 그래서 당대에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으로서 훨씬 널리 인정받은 것도 발해가 아닌 고려였다.[34]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토의 크기와 만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지나치게 만주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이유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견해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대중이 그렇게 좋아하는 만주가 아니라 한반도 북부 지역인 평양성 일대를 포함한 패서였다.[35] 요동 일대는 분명 군사적 방어선이자 농업 요충지였지만 고구려의 중심지는 아니었다.[36] 현대 한국에서 군사 지역인 강원도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요충지라고는 해도 중심지라고는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고려의 지정학적 조건도 신라보다는 고구려와 유사했다. 신라는 통일 전쟁 이후에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유리되어 장보고의 청해진 등으로 대표되는 해양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켰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 같은 제국들이 이민족들로부터 통일신라의 완충지대가 되어주기도 했고 신라의 수도 금성(서라벌) 또한 북방과는 먼 반면 한중일 삼국의 해로를 잇는 남해안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신라와 달리 해양국가적 속성은 줄고[37] 고구려처럼 대륙세력과의 역학관계가 부각되었다. 이는 발해의 멸망으로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의 강력한 기마민족들과 완충지대 없이 인접하게 되었고 고려의 중심 권역 역시 보다 대륙과 가까운 패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중요한 해상 교류 국가였던 일본은 동시기에 고립을 선택하면서 덩달아 고려의 해양 교류 빈도도 크게 줄었다. 그로 인해 고려사는 해양세력과의 교류보다는 대륙세력과의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백제 모두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수했는데, 이 영역들은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던 시절에도 나제 동맹에 막혀 끝내 정복에 실패했던 영역들이었다. 고려는 통일신라에 대해 지방민들이 가졌던 두 가지의 불만에서 태어난 나라였다. 호족들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중앙정치 참여를 부정한 점, 삼한일통의 대의를 표방했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명분 측면에서만 그친 점. 하지만 고려는 바로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초기에는 전국에 통일신라처럼 체계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관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전국의 호족들에게서 돌아올 강력한 비판은 '고려가 대체 신라와 다를 게 뭐냐?'일 게 뻔했기 때문.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호족들의 군사력을 연합시켜 강력한 군사력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삼국을 정복할 수 있었건 것이었기 때문에[38][39] 호족들에 대한 물리적 탄압이 가장 극심했던 광종마저도 호족들의 자치권을 모조리 회수해버리는 행태는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고려사 내내 계속 이런 건 아니었고 고려 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 중앙귀족인 문벌귀족 중심의 시스템이 완성된다. 문벌귀족이 대거 몰락한 무신정변 이후로도 여몽전쟁기에 강도로 수도를 옮긴 상태에서도 조운제도가 계속 운영되고 지방관이 파견될 정도였다.[40]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지배로 왕실의 존속까지 위태로워질 정도로 제도가 흔들리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다시 중앙집권제를 완비하게 된 것은 공민왕 시기부터였다.[41]
세계사적 관점에서 고구려-고려 관계와 가장 비슷한 관계로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관계에 비유해볼 수 있다. 사산 왕조를 건국한 페르시아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후 친척 민족이지만 국가정체성은 공유하지 않았던 파르니족의 파르티아에게 지배받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기치로 건국 후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레반트 지역 및 발칸 반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흥지인 파르스 지역에서 건국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거울상처럼 뒤집힌 공통점과 정반대의 차이도 발생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기존 지배층을 두 측면에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후진적인 봉건제를 채택한 점, 그리고 페르시아와 무관한데 자격없이 옛 이란 지역을 지배한 점. 그래서 정국이 안정되자 캐치 프레이즈대로 중앙집권적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고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보다 우세했다. 사산 왕조는 그 최전성기에도 예멘 일대 외엔 그 영역 전체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던 영역이었으나, 고려는 고구려가 정복에 실패했던 한반도 중남부를 모두 제패했다. 또한 사산 왕조는 끝내 이슬람 제국에게 버티지 못하고 망했지만, 고려는 비록 부마국이 되었을지언정 몽골 제국에게도 망하지 않고 국체를 지켜냈다. 덧붙여 그 지위를 이용해 몽골 제국의 황위 다툼에 개입했을 정도였다.
특이사항으로는 고려 왕조가 들어서고서부터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묘제의 고분벽화로 유명한 사신도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점령한 뒤 한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려지게 됐는데 후에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에도 영향을 끼쳐 백제와 신라에서도 고구려처럼 고분벽화를 그리게 되었고 특히 백제의 경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분벽화에서 사신도가 등장하기도 했다.[42] # 신라에는 고분벽화에 사신도를 그려넣는 풍습이 없어 삼국통일 후 사신도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고려가 들어서면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다양한 작품이나 장식물에 사용되었고 선조(조선)의 왕릉인 목릉(穆陵)의 고분벽화에 그려지기도 했다.
5. 무장(武將)의 나라[편집]
고려시대에는 걸출한 무인들이 많이 활약했다. 이는 고려가 전쟁을 통해 건국된 데다 존속 기간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군인의 수요가 컸고, 조선시대에 비해 문관과 무관의 구분도 상대적으로 약했다.[43] 군대가 비대하다보니 격구나 수박과 같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나 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들어 출세했다. 물론, 역으로 보자면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되어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무인과 영웅들의 활약만 기록되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민중들은 참으로 고생했을 것이다.
고려의 역사를 관통하는 전쟁만 꼽아도 엄청나게 많다. 건국기엔 후삼국 통일전쟁, 성종~현종대까지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 왕조의 최고 전성기인 현종 중기~인종 시기에는 여진 정벌, 인종 시기에는 1년 이싱 지속된 서경 반란(묘청의 난)이 있었다. 이후 고려의 암흑기였던 무신 정변의 발생부터 조위총의 난과 몽골의 침공, 말기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까지 내란과 외침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수백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과 대조적이다.[44]
고려의 무인들이 어떤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수조지인 군인전을 기반으로 한 군반씨족설과 면세 혜택을 준 농민병들을 활용하는 부병제설로 나뉘었다. 이는 고려 시기 군제에 대한 소략한 기록이 두 가지에 모두 걸쳐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경외군 혼성제설이라 하여 두 가지가 병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개국공신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역전시키는 용장이었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 전쟁기에 직접 활약한 무인이었다. 그는 호위 무사 없이 맨주먹으로 자객을 때려잡기도 했다.
- 2차 여요전쟁 때 양규는 맹활약을 벌인 장군이었다. 그는 1천여 명의 병력으로 6천 명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 단, 이는 거란군의 규모가 과장되었거나 성 안에 고려 잔존 병력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대단한 전공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거란군을 끊임없이 기습하여 3만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 3차 여요전쟁 당시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 10만명을 휘하의 20만 고려군으로 대파하였다. 이는 훗날에 귀주 대첩이라 불리우게 된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활약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 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격퇴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 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그들을 쫓아냈다. 이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에 기록되어 있다.
- 여진전쟁 때 활약한 척준경은 한국사 최강의 무력을 지닌 맹장이었다. 그의 명성과 활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과 두경승은 당대 최강의 무장들이었다. 둘 모두 수박의 고수였다.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는 방법을 썼다. 조위총을 토벌할 때는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대로 적진으로 돌격해 적을 무찔렀다.
- 경대승은 무신정권기에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는 약관(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해서 경주에 은거할 정도였다.
- 김경손은 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았다.
- 승려 김윤후는 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활로 저격해 사살했다. 그런데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쏘지 않았고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 합단적이 침입할 때는 원충갑이라는 장군이 활약했다. 합단적은 강원도의 치악(지금의 원주)까지 내려왔다. 이때 합단적의 지휘관인 카다안은 원주에 도착해 노략질을 해서 전쟁 물자를 얻으려 했다. 그 중 기병 50명은 치악산을 순찰하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은 보병 6명으로 기병 50명을 무찌른 후, 말 8필을 도로 빼앗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원충갑은 치악성(원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7명의 궁병으로 기병 400명을 모두 죽였다.
- 원충갑과 더불어 흥원창판관 조신이라는 장수도 활약했다. 기록에는 '단지 공을 세우려고 성 밖에 나가 적군 1명을 베었고, 화살이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는 북을 치며 성 밖에서 항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합단적은 사기가 떨어져 물러갔다고 한다. 이때 조신은 합단적의 장수인 도라도의 머리에 칼을 꽂아 그의 목을 장창에 꽂았다. 이에 적은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유명했다. 그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죽였다. 그 후, 그는 장창에 적장의 목을 걸었다고 한다. 이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참고.
- 최영은 고려 말기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힌다. 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적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다. 고려에서는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싸워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 이성계는 신궁이자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유명했다. 여러 외적을 격퇴한 전적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이외에 원사, 일본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제1차 요동정벌과 황산 대첩에서의 맹활약들이 특히 유명한 편이다. 그외 여러 기록에서는 이성계의 지휘 능력만이 아니라 활 솜씨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를 보면, 다소 과장이 있다하더라도 활을 잘 쏘긴 어지간히 잘 쏜 모양이다. 심지어 본인 뿐만 아니라 본인의 후손들 중에서도 명궁이 많이 나왔다.[45]
5.1. 무신 차별과 무장(武將)들의 정변[편집]
고려는 이후 조선시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장들에 대한 차별이 컸으며 그 탓인지 무장들의 정변이 유독 많은 왕조였다.[46] 고려 초기부터 이미 강조의 정변[47] 과 김훈·최질의 난 그리고 중기에는 무신정변과 말기에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까지 터지는 등 수 많은 무장들이 정변을 일으켰고 이중 무신정변은 결국 100년간의 무신정권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은 아예 고려라는 왕조를 멸망시켰을 정도였다.
무신들의 정변 이유로는 주로 문관들에 비해서 푸대접을 받던 무신들이 대우에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킨 경우들이 많았으며 대표적으로 고려 초기의 김훈·최질의 난과 고려 중기때의 무신정변은 무신 차별로 인하여 발생한 정변들이었다. 구체적으로 고려 초기 김훈·최질의 난은 문관들이 무신들의 월급이라 할 수 있는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벌인것에 대한 불만으로 터진 사건이었고 고려 중기의 무신정변은 어려도 한참 어린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일등 여러 무신차별들이 누적되다가 결국 폭발하여 일어난 정변이었는데 공통적으로 문신들과 무신들의 대립 그리고 무신차별에 대한 무관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들이 존재한다.[48]
당연하지만 이러한 무신들의 정변들이 자주 일어나자 고려의 국왕들은 무신들을 잘 믿지 못하고 강하게 경계하게 되었으며 대표적으로 공민왕 같은 경우에는 홍건적의 침공으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다가 다시 개경을 수복하자 이때 공을 세운 무장들을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으로 책봉해주었는데 이후 경성수복공신들이 고려 군부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커지자 훗날 공민왕은 신돈을 앞세워 경성수복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나섰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으니 사실상 왕조내내 무신들의 정변에 시달리다가 왕조가 멸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6. 한국사 발전[편집]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얼마 남지 않은 사료를 찾아내고 책으로 정리했으며, 이 사서들은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한 한국사 연구 자료이다. 특히 고려가 편찬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고대 한국사의 기록은 매우 부실해질 수 밖에 없으며, 상고사와 다를 바 없이 거의 전적으로 중국 사료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7. 다른 한민족 왕조들과의 비교[편집]
7.1. 이전 국가와의 비교[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려/이전 국가들과의 비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2. 조선과의 비교[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려/조선과의 비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