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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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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兆基
(? ~ 1157)
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 경서, 사서를 섭렵하고 오언시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2. 생애[편집]
탐라 출신으로 고려에 임용된 1세대인 우복야 고유의 아들이다. 초명은 고당유(高唐愈). 예종 초에 남쪽 고을(南州)의 수령으로 임명돼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본다.
인종 8년(1130) 4월 이주연, 임원준, 황보양, 문공원 등과 왕에게 서경 세력에 힘을 실어주던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부분이 묵살된다. 한편 4년 전 축출된 이자겸의 당파였으나 환관과 결탁해 별도의 처벌 없이 복직한 지수주사 봉우(奉佑)를 면직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고조기는 혼자서 두세번 상소를 올렸으나 같은 해 7월 시어사에서 공부원외랑으로 좌천된다. 인종 9년(1131) 예부낭중으로 금나라에 사절로 가서 인종의 생일을 축하해준 것에 사례한다. 인종 13년(1135)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을 보좌한다.
고조기가 다시 대관(臺官)이 된 뒤에도 이자겸 당여로 죄를 면한 이들을 내쳐야 한다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다. 고조기는 "비록 성상께서 관대하시어 그 허물을 덮어주려 하시지만, (이자겸 일파가) 어느 면목이 있어 조정에 서 일월을 보겠습니까?"[1] 라며 강경 대응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종 입장에서는 인천 이씨가 유력 문벌인 만큼 혼인 관계로 맺어진 문벌귀족도 많았기에, 고조기의 주장을 수용해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고조기는 예부낭중에 발탁되면서 대관 자리를 잃는다.
의종 2년(1148) 3월 정당문학, 12월 참지정사 판병부사에 오른다. 이듬해 의종 3년(1149)에는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되고 판이부사를 겸한다. 의종 초에는 김존중과 환관 정함이 권세를 얻었는데, 고조기는 이들에게 영합한다. 젊어서는 정의심에 넘쳐 이자겸 일파를 탄핵했던 대관이 나이가 들며 권신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에 여론의 비난을 듣는다. 의종 4년(1150) 간관이 고조기를 탄핵하기에 이르러 상서좌복야로 좌천된다. 그러나 김존중의 도움으로 곧 판병부사를 겸하고 이듬해 중군병마판사 겸서북면병마판사가 되며 중서시랑평장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관직에서 물러나고 의종 11년(1157) 죽으니, 왕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시호를 내린다.
3. 문장[편집]
고조기가 지은 오언율시 두 수가 『동문선』에 남아있다.
- 안성역(安城驛)
山雨留行客 산 비가 여행객을 머무르게 하니
郵亭薄暮時 역마을에 땅꺼미가 진다
春風無好惡 봄바람은 좋고 싫음이 없으나
物性有參差 사물의 성질은 참치[2]
함이 있다柳眼已開嫰 버들눈(새싹)은 이미 곱게 피었고
花唇欲吐奇 꽃봉오리는 그 기이함을 드러내려는데
如何雙鬢上 어찌하여 내 구레나룻은
不改去年絲 지난해 흰 머리가 바뀌지 않을까
- 진도 강정(珍島江亭)
行盡林中路 숲 속 길을 모두 다녔으니
時回浦口船 때로는 포구의 배로 돌아온다
水環千里地 천리 땅을 물이 두르고
山礙一涯天 하늘 끝을 산이 가로막았으니
白日孤査客 대낮에 외로이 뗏목을 탄 손님은
青雲上界仙 푸른 구름 속 천상계의 신선인가
歸來多感物 돌아오니 만물에 감동하여
醉墨灑江煙 취한 채 시를 적고 강의 안개처럼 흩뿌린다
4. 가족관계[편집]
- 부: 고유
- 본인: 고조기
- 아들: 고정호
- 아들: 고정익
- 손자: 고적
- 본인: 고조기
고정익이 원종 시기에 은퇴한 것이라면 부친 고조기가 죽은 100년도 더 뒤가 되니, 고말로 이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사이에 몇 세대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子廷琥。職綴三品。與其誠明。俱早歿。唯廷益。元王癸巳春。乞退還鄕。
(고조기의) 아들 정호는 관직이 3품에 올랐고, 정성스럽고 총명했으나 일찍 죽었다. 다만 정익은 원왕(원종, 재위 1259~1274) 계사년[3]
봄에 퇴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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