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영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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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경복궁의 서문(西門). 주로 문무백관들이 이용했다.
고종 중건 당시 현판 글씨는 허계#(許棨, 1798 ~ 1866)가, 현재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金忠顯. 1921 ~ 2006)이# 썼다.
2. 이름[편집]
‘영추’는 ‘가을(秋)을 맞아(迎) 서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나타내므로, 경복궁의 서쪽 문에 ‘가을 추(秋)’ 자를 넣은 것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연추문(延秋門)'으로도 불렸다. 송강 정철은 가사 《관동별곡》에서 '연추문'으로 적었다.#
3. 역사[편집]
1395년(태조 4년)에 조선 정부에서 경복궁을 창건할 때 건립했으며# 1427년(세종 9년) 6월에 수리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영추문 바로 앞에 전차 선로를 부설했다. 선로 위를 오가는 전차의 진동 때문에 1926년 4월 27일에 석축이 무너졌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전체가 헐렸다.
광복 이후 한동안 철거된 자리에 예전처럼 성문이 아닌 3칸짜리 평대문이 놓여있었다.
이후 1975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다만, 당시 경복궁에 주둔해있던 군부대를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50m 이전했고, 목조가 아닌 1968년에 복원한 광화문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다.[2] 이후 다시 원래대로 경복궁 2차 복원 공사 3단계(2026~2034)에 복원될 예정이다.#
4. 구조[편집]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를 달았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문루 내부를 전부 한 공간으로 텄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했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 아치형 문은 겉에만 아치를 구성하고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반자에는 백호를 그려놓았다. 그러나 고종 때에는 기린 2마리를 그려두었다고 한다.# 문짝은 붉은색 나무판이며 문짝 위에는 문둔테를 두었다.#
5. 여담[편집]
-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고종 31년) 7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물론 다른 문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일본군은 특히 침전과 가까운 영추문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자세한 것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서 참조.
-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때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을 빠져나갔다.[3]
복원 후 정부에서는 한동안 닫아놓았다가 2018년 12월 6일에 일반에 개방했다. 그래서 영추문으로 관람객의 출입이 가능하다. 경복궁에서 서촌으로, 또는 그 반대로 가려면 영추문을 이용하면 훨씬 가깝게 갈 수 있으니 참조하자.
- 중건 당시의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석축이 무너진 영추문을 해체할 당시 문루로 통하는 작은 벽돌문이 경복궁 자경전의 동쪽 담장으로 이전되어 보존되어 왔음이 밝혀졌다.로드뷰 문화재청은 영추문 소문(小門)이 행방불명됐고 영추문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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