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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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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동북권 벨트 지역인 강북구에서도 특히 민주당계 정당의 세가 막강한 지역으로[1] , 북서울 꿈의 숲과 미아뉴타운을 관할하는 지역구이다. 현 국회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박용진 의원이다.
이 지역구는 신설된 이래 단 한 번도 보수정당이 이긴 적이 없으며, 중선거구제를 포함하더라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1985년)가 마지막이었다. 소선거구제만 포함하면 무려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가 마지막이다.
즉,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민주당계 정당이 전승해 온, 서울에서 단 둘 뿐인 선거구라는 얘기[2] .
이 지역구 현역 국회의원인 박용진이 총선에 데뷔한 무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역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의원이었으나, 열린우리당 창당을 반대하고 새천년민주당 대표로서 탄핵을 주도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역주의도 타파한다는 명분 하에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겠다며 간 상황이었다.
조순형 의원의 빈자리에 새천년민주당의 순천 지역 의원인 김경재 의원이 이 지역에 출마했다. 김경재 의원은 미국 망명 당시 김형욱 전 정보부장의 회고록을 집필한 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평소 소신을 굽히거나 당적을 이동한 전력이 없는 우수한 상품성"을 강점으로 인물론을 내세웠고, 정동영 의장의 노인펌하 발언으로 지역 노년층 표가 민주당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의 최규식 논설위원이 출마했다. 정동영 의장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한 정치신인으로, 인지도는 낮지만 참신성, 개혁성, 정당 경쟁력으로 승부하고자 했다. 언론사 편집국장을 지내면서도 골프를 모르는 서민적인 인물로 영입인사인만큼 전문성도 인정받았다는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또, 유대운 전 서울시의원이 경선에서 탈락한 뒤에도 선대본부장을 맡아 적극 지원해주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검사출신의 변호사 안홍렬 후보가 나왔다. 보령서천 지역구에서 지역구를 옮긴 이후 무료 변론으로 주민접촉이 많아 당선을 기대했다. 그러나 검사 재직 당시 마약밀매조직을 수사하면서 압수된 피의자 통장에서 2500만원을 빌려 함정수사를 벌였다가 실패하자 온라인으로 돈을 도로 입금시켜줬다는 것이 사유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대상에 올랐다.
강북구 지역은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린 곳인만큼, 탄핵 정국에 힘입어 열린우리당 초강세 양상으로 나타났고, 결국 최규식 후보가 42.46%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현역인 통합민주당 최규식 의원은 당선 이후 정동영 의장 언론특보, 비서실장을 지내며 대선 종합상황본부장을 맡는 등, 정동영 의장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도전했다. 최규식 후보는 "강북 발전은 당이 아니라 인물이 중요하다. 이미 검증된 최규식을 압도적으로 선택해 달라"며, 미아뉴타운 추가 지정 등을 공약했다.
한나라당은 변호사 출신인 이수희 후보를 공천했다. 이수희 후보는 "대통령도 정권교체로 바꿨으니 지역을 대표할 의원도 참신한 새 얼굴로 바꿔 달라"며 "북한산 고도제한 등 각종 규제 철폐와 재건축 추진을 통해 주민 재산권을 지키겠다"고 밝혔다.[10]
진보신당에서는 박용진 전 민주노동당 대변인이 출마했다. 박용진 후보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민주노동당을 창당해 진보정당활동을 하며 16대 총선에서 만 29세의 나이로 도전해 13.3%라는 높은 득표율을 보여주었던 경쟁력 있는 후보로 평가받았다.[11]
선거 상황은 이수희 후보가 막판까지 따라가 접전을 벌였지만, 5.67% 차이로 최규식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다.
현역 민주통합당 최규식 의원이 일명 '청목회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으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최규식 의원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당의 위기 극복과 쇄신을 위해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노무현 재단 기획의원 출신인 유대운 후보가 출마했다. 유대운 후보의 이력이 특이한데, 충남 서산의 부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중국집 배달부나 건설회사 인부로 일하다가 임금을 떼이며 열악한 노동환경에 눈을 뜨고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강북 서민주택진위원회 위원장과 번동철거보상대책위원회 위원장등을 맡으며 지역기반을 다지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다가, 잠시 정계를 떠났지만 노무현재단 기획위원을 맡으며 복귀했다. 이런 이력에 언론에서는 그를 브라질 대통령 룰라에 비교하기도 했다. 유대운 후보는 "강남북간 교육·복지·지역개발 격차의 원인은 재산세 불균형으로 인한 세수 차이"라며 "국회에 등원하면 현재 50%인 재산세 공동과세 비율을 100%로 올려 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17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검사, 변호사 출신의 안홍렬 후보가 다시 나섰지만 유대운 후보에게 11.63% 차이로 패했다. 유대운 후보는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해 국회의원에 당선돼 성공 스토리를 이어갔다.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유대운 의원과 박용진 더민주 정책위 부의장이 경선을 벌였는데, 32.8%의 압도적인 차이로 박용진 부의장이 현역 유대운 의원을 꺾었다. 박용진 부의장은 민주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16대, 18대 총선에 이 지역에서 출마해 1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렸던 인물이다. 진보정당 활동을 하며 야권통합을 했다. 시민통합당 창당에 함께했다가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입당했다. 당 대변인과 홍보위원장을 거쳐 정책위 상근 부의장이 되었고, 종편 등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동북권 벨트 지역인 강북구에서도 특히 민주당계 정당의 세가 막강한 지역으로[1] , 북서울 꿈의 숲과 미아뉴타운을 관할하는 지역구이다. 현 국회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박용진 의원이다.
이 지역구는 신설된 이래 단 한 번도 보수정당이 이긴 적이 없으며, 중선거구제를 포함하더라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1985년)가 마지막이었다. 소선거구제만 포함하면 무려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가 마지막이다.
즉,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민주당계 정당이 전승해 온, 서울에서 단 둘 뿐인 선거구라는 얘기[2] .
2. 역대 국회의원 목록[편집]
- 편의상 성북구가 신설(1949년)된 이후의 국회의원부터 서술한다.
3. 역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편집]
3.1. 제13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3.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3.3. 제15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3.4. 제16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이 지역구 현역 국회의원인 박용진이 총선에 데뷔한 무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5. 제17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현역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의원이었으나, 열린우리당 창당을 반대하고 새천년민주당 대표로서 탄핵을 주도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역주의도 타파한다는 명분 하에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겠다며 간 상황이었다.
조순형 의원의 빈자리에 새천년민주당의 순천 지역 의원인 김경재 의원이 이 지역에 출마했다. 김경재 의원은 미국 망명 당시 김형욱 전 정보부장의 회고록을 집필한 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평소 소신을 굽히거나 당적을 이동한 전력이 없는 우수한 상품성"을 강점으로 인물론을 내세웠고, 정동영 의장의 노인펌하 발언으로 지역 노년층 표가 민주당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의 최규식 논설위원이 출마했다. 정동영 의장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한 정치신인으로, 인지도는 낮지만 참신성, 개혁성, 정당 경쟁력으로 승부하고자 했다. 언론사 편집국장을 지내면서도 골프를 모르는 서민적인 인물로 영입인사인만큼 전문성도 인정받았다는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또, 유대운 전 서울시의원이 경선에서 탈락한 뒤에도 선대본부장을 맡아 적극 지원해주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검사출신의 변호사 안홍렬 후보가 나왔다. 보령서천 지역구에서 지역구를 옮긴 이후 무료 변론으로 주민접촉이 많아 당선을 기대했다. 그러나 검사 재직 당시 마약밀매조직을 수사하면서 압수된 피의자 통장에서 2500만원을 빌려 함정수사를 벌였다가 실패하자 온라인으로 돈을 도로 입금시켜줬다는 것이 사유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대상에 올랐다.
강북구 지역은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린 곳인만큼, 탄핵 정국에 힘입어 열린우리당 초강세 양상으로 나타났고, 결국 최규식 후보가 42.46%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3.6.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현역인 통합민주당 최규식 의원은 당선 이후 정동영 의장 언론특보, 비서실장을 지내며 대선 종합상황본부장을 맡는 등, 정동영 의장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도전했다. 최규식 후보는 "강북 발전은 당이 아니라 인물이 중요하다. 이미 검증된 최규식을 압도적으로 선택해 달라"며, 미아뉴타운 추가 지정 등을 공약했다.
한나라당은 변호사 출신인 이수희 후보를 공천했다. 이수희 후보는 "대통령도 정권교체로 바꿨으니 지역을 대표할 의원도 참신한 새 얼굴로 바꿔 달라"며 "북한산 고도제한 등 각종 규제 철폐와 재건축 추진을 통해 주민 재산권을 지키겠다"고 밝혔다.[10]
진보신당에서는 박용진 전 민주노동당 대변인이 출마했다. 박용진 후보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민주노동당을 창당해 진보정당활동을 하며 16대 총선에서 만 29세의 나이로 도전해 13.3%라는 높은 득표율을 보여주었던 경쟁력 있는 후보로 평가받았다.[11]
선거 상황은 이수희 후보가 막판까지 따라가 접전을 벌였지만, 5.67% 차이로 최규식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다.
3.7. 제19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현역 민주통합당 최규식 의원이 일명 '청목회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으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최규식 의원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당의 위기 극복과 쇄신을 위해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노무현 재단 기획의원 출신인 유대운 후보가 출마했다. 유대운 후보의 이력이 특이한데, 충남 서산의 부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중국집 배달부나 건설회사 인부로 일하다가 임금을 떼이며 열악한 노동환경에 눈을 뜨고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강북 서민주택진위원회 위원장과 번동철거보상대책위원회 위원장등을 맡으며 지역기반을 다지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다가, 잠시 정계를 떠났지만 노무현재단 기획위원을 맡으며 복귀했다. 이런 이력에 언론에서는 그를 브라질 대통령 룰라에 비교하기도 했다. 유대운 후보는 "강남북간 교육·복지·지역개발 격차의 원인은 재산세 불균형으로 인한 세수 차이"라며 "국회에 등원하면 현재 50%인 재산세 공동과세 비율을 100%로 올려 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17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검사, 변호사 출신의 안홍렬 후보가 다시 나섰지만 유대운 후보에게 11.63% 차이로 패했다. 유대운 후보는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해 국회의원에 당선돼 성공 스토리를 이어갔다.
3.8. 제20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유대운 의원과 박용진 더민주 정책위 부의장이 경선을 벌였는데, 32.8%의 압도적인 차이로 박용진 부의장이 현역 유대운 의원을 꺾었다. 박용진 부의장은 민주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16대, 18대 총선에 이 지역에서 출마해 1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렸던 인물이다. 진보정당 활동을 하며 야권통합을 했다. 시민통합당 창당에 함께했다가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입당했다. 당 대변인과 홍보위원장을 거쳐 정책위 상근 부의장이 되었고, 종편 등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3.9. 제21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위에 서술했듯이 이 지역은 원래부터 아파트 지역을 감안하더라도, 진보세가 강하고 유치원 3법으로 몸값을 올린 박용진 후보가 지난 총선 국민의당 후보가 받은 표를 산술적으로 완전히 흡수하며 64.45% 라는 매우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2] 전 지역 모든 투표소에서 이겼으며, 삼각산동에서는 무려 5,233표차이로 안홍렬 후보를 크게 앞질렀다.
3.10. 제22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1] 17대 총선부터 21대 총선까지 민주당계 정당이 총선에서 내리 5연승한, 서울에서 광진구 을, 동작구 갑, 구로구 을, 은평구 갑과 함께 단 5곳 뿐인 지역구이다. 호남계 이주민이 많다 보니 호남 지역과 유사한 투표 양상을 보이며, 가끔씩은 전라도보다 더한 지지율이 나오기도 한다.[2] 나머지 하나는 바로 광진구 을이다. 상술한 각주에 열거한 지역구들 중 동작구 갑은 15, 16대에서, 구로구 을은 15대와 2001년 하반기 재보궐에서, 은평구 갑은 16대에서 보수정당에게 의석을 내줬었다.[3] 현재의 강북구 지역(당시 고양군 숭인면)은 1949년 서울로 재편입되면서 신설 성북구 관할로 들어갔다.[4] 강조된 부분이 현 강북구 갑 지역(번3동은 강북구 을)이다.[5] 1973년 7월 1일부로, 미아동, 번동, 수유동, 우이동, 창동, 월계동, 쌍문동, 상계동, 중계동, 도봉동, 방학동, 공릉동, 하계동이 도봉구로 분구되어, 국회의원 선거구도 이에 맞게 종전의 성북구 선거구에서 도봉구 선거구로 분구되었다.[6] 1980년 8월 27일에 사직하였다.[7] 기존의 도봉구 갑은 창1~5동을 받는 대신 쌍문1동과 쌍문3동을 제외한 쌍문2동, 쌍문4동과 방학1~3동, 도봉1·2동을 도봉구 을로 이관했다. 사실상 도봉구 을 선거구를 새로 분구한 셈.[8] 지금의 강북구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9] 당연히 그 이기택과는 동명이인이다.[10] 이수희는 이후 아예 강동구로 기반을 옮겼으며 강동구청장에 당선된다.[11] 박용진은 이후 민주당에 입당해 재선 의원을 지낸다.[12] 21대 총선 서울 지역 중 두 번째로 높은,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