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야네치포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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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주(Хмельни́цька о́бласть)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약 10만 명이다.
2. 언어별 표기[편집]
3. 역사[편집]
다키아인들이 이 자리에 마을을 세운 것이 시초로 여겨진다. 11세기경에는 키예프 공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붕괴된 후 14세기 무렵에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폴란드 왕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되어 강성해지면서 이곳은 타타르인과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는 요충지로 성장하여 거대 요새가 세워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귀족 공화정처럼 운영될 때에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바르샤바, 크라쿠프, 포즈난, 그단스크, 토룬, 르부프, 빌노 등과 함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72년,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체결한 부차치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신설한 카마니체 에얄레트(Eyalet-i Kamaniçe)에 속하게 되었다.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활약하여 오스만 제국을 몰아붙인 결과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편입되었다. 1791년, 제2차 폴란드 분할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하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은 동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이 도시를 대신 차지해야 할 독일 제국은 여력이 다해 이곳을 통치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이 도시를 차지하기도 했고, 폴란드 제2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이 도시를 두고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에 체결된 리가 조약에 따라 이 도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 성립 이후 우크라이나 SSR의 관할이 되었다. 그 뒤로 부농들은 모두 땅을 빼앗겼으며, 그 땅은 집단농장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많았지만, 폴란드인과 아르메니아인, 유대인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은 이 도시의 소수민족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은 카미야네치포딜스키를 점령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1944년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의 포위에서 탈출한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이 있기도 했다. 결국 소련은 독일군을 몰아내고 카미야네치포딜스키를 다시 차지했으며, 폴란드인을 모조리 폴란드로 쫓아냈다. 또한 나치가 들어섰을 때 잠시 득세했던 민족주의 세력들 역시 시베리아로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4. 관광[편집]
14세기에 지어진 성(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а фортеця)[2] 이 있는 곳으로, 루테니아인이 세운 성채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해외 매체에서 우크라이나 베스트 여행지를 소개할 때 꼭 들어가는 곳으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이 지역만의 스타일로 지어진 성이기에 굳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 가볼 만 하다.
![파일:KP.jpg](http://obj-sg.the1.wiki/d/73/19/09d63dbf10eb3c006dde27a49b71852e40e77c06b7582db394b9127986d99207.jpg)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성 자체도 아름답지만 푸른 녹음과 어우러진 전원적인 우크라이나 시골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