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자량
덤프버전 :
李資諒
(? ~ 1123)
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
초명은 이자훈(李資訓)이다. 이자연의 아들 이호와 김정준의 딸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 김씨[1] 의 차남이다. 사촌형 이자의, 형 이자겸의 당파에 모두 속한 전적이 있다.
2. 생애[편집]
외척으로서 음서로 좌우위녹사 참군사(左右衛錄事 叅軍事)에 임명된다. 헌종 원년인 1095년에 종7품의 지후(祗侯) 관직에 있었는데, 외척인 사촌형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여 계림공에게 제거된다. 이자량(당시 이자훈)은 이자의의 당파로 분류된 평장사 이자위 이하 50여명에 포함되어 남부 지방으로 유배된다. 숙종 6년인 1101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반란에 연좌된 자들의 감형(개경 근처로 옮겨 유배 → 귀경 허락)이 있었는데, 이자량도 얼마 되지 않아 개경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예종 초에 윤관의 여진 정벌에 따라가 공을 세워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된다.
예종 11년인 1116년 이영(李永)과 북송에 사신으로 가는데, 이자량은 송휘종에게 시를 지어 올리고 칭찬을 받는다. 다음번에는 여진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휘종에게 이자량은 "여진은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가졌고,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욕심 많고 추악하니 상국과는 통하는 것이 불가합니다."[2] 라고 거부한다. 이자량 등은 권적(權適), 조석(趙奭), 김단(金端) 등 빈공과 급제자들과 함께 이듬해에 고려로 돌아온다. 예종 12년인 1117년 형부시랑 지주사(刑部侍郞 知奏事) 겸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에 임명된다. 예종 17년인 1122년 추밀원부사 태자빈객(樞密院使 太子賓客)에 오르고,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는 형부상서 추밀원사(刑部尙書 樞密院使)로 승진한다.
이자량은 공적과 명성을 자랑하기를 좋아해 권세 높은 형 이자겸에게 의지하고 적극 협조했다. 예종 15년인 1120년 12월 순덕왕후의 상(喪)이 끝나자 평장사(平章事) 이자겸과 둘이서 예종에게 불려가 술자리를 즐긴 일화는 당시 이자량의 지위를 가늠케 한다.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자량 아래에 한안인(韓安仁), 문공미 등이 같이 추밀원에서 관직을 지냈는데, 이들은 이자겸 파벌 견제를 위해 예종이 꽂아넣은 인물들로 이자겸·이자량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후 추밀원사 이자량에게 '한안인과 문공미 이 둘이 무리를 지으면 이영공(이자겸)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참소(讒訴)가 들어왔고, 이는 곧바로 이자겸에게 전해져 관련자들이 죽거나 유배된다.
이후 이자량의 병이 깊어지자 인종은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시키지만, 형인 이자겸이 실각하기 3년 전인 인종 원년인 1123년 1월 23일(음력) 병으로 사망한다.
3. 가족관계[편집]
사촌형인 이자인의 차녀, 즉 5촌 조카(종질)를 아내로 맞아 아들 없이 딸 둘을 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10:22:11에 나무위키 이자량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