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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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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소장에 대한 내용은 윤기중(군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이자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의 부친이다. 윤봉길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
2. 생애[편집]
1931년 12월 19일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죽림리에서 윤호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사헌을 지낸 윤문거[5] 의 직계 후손으로,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이다. 공주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공주농업고등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1956년에 졸업하였고 1958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석사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 후 시간강사를 거쳐 1961년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전임강사(조교수)에 임용되어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재직했다.
한일수교 직후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되어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학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6]
귀국 후 1968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의 창립 멤버 교수가 되었다. 1991~1993년 연세대 상경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97년 정년 퇴임하였고 퇴임 후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또한 1976년 한국통계학회 회장, 1992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1년 경제학 분야 학술 발전에 현저한 공이 있다고 인정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2022년 3월 코로나 오미크론이 유행할 당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입원 치료를 받았다.
2022년 5월, 아들 윤석열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되면서 1992년 당시 대통령 김영삼의 부친 김홍조 이후 두 번째이자 약 30년 만에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가 생존한 경우가 되었다.
2.1. 사망[편집]
2023년 8월 15일 오후 12시, 91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역대 두 번째 현직 대통령의 부모상[7] 이며 부친상으로는 처음이다. 아들 윤석열은 78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마치고 부인 김건희와 함께 병원을 찾아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고,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도착한 지 20분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서 가족장으로 엄수할 예정이며 조문과 조화는 사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여당인 국민의힘에서는 김기현 대표를 비롯해서 당 4역만 조문하기로 했고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당 4역만 조문하기로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기일인 8월 15일 조화를 보냈고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에 전화를 걸어 조의를 표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니 슬픔이 클 것 같다"며 "너무 상심이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이 외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김진표 국회의장, 이낙연 전 국무총리,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오세훈 서울시장, 추경호 부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김문수 경사노위원장, 이동관 방통위원장 후보, 이주호 부총리, 최재해 감사원장, 대한염증협회 회장,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등 각계 거물 인사들이 조문하였고, 박근혜 전 대통령[8] 과 문재인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도 조화를 보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2023년 한미일정상회담 일정 중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도착 시간에 맞춰 윤석열 대통령 숙소에 조화를 보냈다. #
가수 노사연도 빈소를 찾았다. 4개월 전에 이모인 현미가 사망했을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장례식장에 조화를 보냈으니, 노사연은 답례하기 위해 조문한 것이다.
하관식에서는 윤 교수의 저서 '한국 경제의 불평등 분석'과 역서 '페티의 경제학'이 봉헌됐다. #
3. 일화[편집]
“윤 교수님이 임용될 때엔 석사 학위만으로도 교수를 할 수 있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 구제 박사(논문 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간단한 논문을 쓰면 학위를 주는 식[9]
이었죠. 너 나 할 것 없이 이를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윤 교수님은 거부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학위를 받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거였죠. 이런 기질을 아들(윤석열)이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김인규 (한림대학교 교수), 출처
개인적으로도 원리원칙적이고 가정적으로도 매우 엄격한 성격이라 이와 관련된 일화들이 많다.
- 윤기중의 제자나 아들 윤석열의 친구들은 젊은 시절 윤기중의 집에 가면 그의 원칙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처럼 집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 아들 윤석열(당시 대통령 후보 신분)은 KBS 2TV 퀴즈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한 인터뷰에서 대학생 때까지 아버지에게 고무 호스로 맞으면서 자랐다고 회고했다.[10] #
- 아들 윤석열이 검사가 되자 '부정한 돈 받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으며 잠깐 검사직을 그만두고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근무하던 윤석열이 변호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검찰로 들어갔을 때 가장 반긴 이가 바로 윤기중이다.
- 아들 윤석열에게 "너는 검사 때려치우면 변호사 하지 말고 식당 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11]
- 제자들에게는 따뜻한 성격으로 연말연시에는 제자들에게 연하장을 보냈고, 학위를 받고 온 제자들에게는 꼭 식사 자리를 마련해 줬다. 제자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식사를 대접해도 윤기중은 늘 식대를 직접 계산했다. 윤기중 본인은 이런 모습에 대해 "젊을 때 제자들은 챙겼으면서 집사람 건강은 잘 챙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고 회고했다.
- 윤석열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자 아들과 아들 친구들을 자택 지하실로 데리고 가 술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윤기중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이웃 호수 주민이 현관문 앞에 축하 화환과 현수막을 걸어두고 갔다. 그러자 윤기중은
따뜻한 마음 감사드려요. 가까이에 저희를 아껴주시는 이웃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어요.
라는 문자 메시지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 자녀들이 결혼하든 결혼하지 않든 크게 연연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결혼하라고 적극적으로 닦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윤석열은 52세에 결혼하였고 자녀가 없어서 윤기중은 친손자녀를 한 명도 못 보고 사망했다.
4. 논란[편집]
- 뉴라이트 연합이 개최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국선언에 서명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12] 다만 고 윤기중 교수는 항일운동의 대명사 윤봉길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할 만큼 윤봉길을 가장 존경한다고 한 바 있다.
5. 여담[편집]
- 캠프 데이비드 2023년 한미일정상회담을 앞두고 8월 16일 에 열린 미국 씽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가 개최한 외교정책 프로그램에서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전략국장은 “고인은 1967년 교환학생으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및 일본 국민들과 사랑에 빠졌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은 공존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했고, 이런 부친의 경험이 윤 대통령의 교육과 세계관 등에 영향을 줬고, 한일관계 개선에 나서도록 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13]
- 생전에 본인의 자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부모는 총 여섯 사람이다. 윤보선의 어머니 이범숙(1876~1969)과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1999)과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문재인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그리고 윤석열의 부모 윤기중과 최성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범위를 넓히면 참여정부 시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으로 권한대행을 맡은 고건의 아버지 고형곤[14] 도 포함된다.
- 또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부모 두 사람이 모두 생존한 최초의 경우다. 이 때문에 유튜브로 KBS 사극 명성황후를 실시간 무료 스트리밍할 당시 윤기중은 연세대 명예교수 직함을 본따 '연세대원군' 혹은 대통령 집무실 위치를 딴 '용산대원군', 부인 최성자는 '연세부대부인' 또는 '용산부대부인'이라는 별칭이 추가되었다. 대통령 아버지 한정으로 차이점은 김홍조는 아들 김영삼의 대통령 퇴임까지 지켜보고 10년을 더 살았지만 윤기중은 아들의 임기 중 사망했다.
6. 작성 논문[편집]
-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경제학계 동향(연세경제연구 제4권 2호) - 한국경제학보(11997.9)
7. 저서[편집]
- 1986. 통계학 개론
- 1986. 수리통계학
- 1987. SPSS를 이용한 통계자료 분석
- 1996. 통계학
- 1997. 한국경제의 불평등분석
8. 가족 관계[편집]
조상 호칭은 해당 문서 상구대의 명칭을 따랐다.
- 선조들
- 본인과 자손
- 친척
- 형 윤우중 (1915년 ~ 1966년)
- 조카 윤석구 (1942년 ~ 2009년)
- 형 윤좌중
- 누나 또는 여동생 4명
- 형 윤우중 (1915년 ~ 1966년)
9. 참고 자료[편집]
10. 둘러보기[편집]
[1] 아들 윤석열과 생일이 하루차, 즉 아들을 생일 전날 보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확하게 10년 차이가 난다. 아들이 태어난 다음 날 29세(세는나이 30살) 생일을 맞이했다. 다만 음력 생일일 경우 양력으로는 1932년 1월 26일 생이고, 족보상에는 음력 5월 29일(양력 1931년 7월 14일)#으로 올라가 있다.[2] 음력 1931년 11월 11일[3] 이 부근은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세거하던 곳으로, 윤선거, 윤증, 윤문거 등이 모두 이 곳에서 태어났다.[4] 상호공파 34세손 ◯중(重) 항렬이다.[5] 소론의 종장 윤증의 백부.[6] 박사 '과정 수료'일 뿐 박사 '학위'는 없다. 1991년 이전까지 일본 대학의 문과계 대학원에서는 뚜렷한 학문적 업적이 없는 이상 박사 학위를 수여하지 않는 관행이 존재했다. 일례로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는 1990년까지 박사 학위 수여건수가 매해 0명~2명에 불과했다는 통계가 있다. 대부분의 박사 과정 수료자들은 박사과정 단위취득만기퇴학(単位取得満期退学)이라는 타이틀로 학계에서 활동했고 일본에서는 문제되지 않았으나 글로벌화에 따른 해외 교류 및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장애가 된다는 비판에 따라 일본 정부가 개입하여 1991년부터 이전에 비해 적극적인 학위 수여 풍조가 정착되었다. 사실 윤기중 세대만 하더라도 석사 학위 보유자도 흔치 않아서 석사 학위만 가지고도 충분히 교수가 될 수 있었다.[7] 최초 사례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이다. 이쪽도 윤기중과 똑같이 향년 91세였다.[8] 공교롭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친이자 영부인이었던 육영수의 기일과 겹친다. 윤기중의 기일은 육영수가 사망한 지 정확히 49년 되는 날이다. 여담으로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했다고 한다.[9] 상부상조하여 교수들끼리 논문을 심사하고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 제도는 1975년에 종료되었다.[10] 당시에는 체벌이 아동 학대라는 인식이 없었다.[11] 집사부일체에서도 나왔듯 윤석열의 요리 실력은 가히 전문가 수준이다.[12] 서명자 명단에 검색하면 나온다.[13] "선친의 일본 사랑이 윤 대통령 일본관에 영향"...백악관 색다른 평가[14] 어머니 장정자는 권한대행을 맡기 3년 전 사망했다.[15] 대한민국 20대 대통령.[16] 연세대학교 명예교수[17] 이화여자대학교 교수[18] 출처: 《강릉최씨족보》 최성자편.[19] 출처: 《파평윤씨족보》 윤기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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