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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클랩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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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록, 블루스 음악가이다. 별명은 "기타의 신", "Mr Slowhand".
2. 설명[편집]
최고의 음악적 성취를 거둔 기타리스트를 꼽을 때 항상 거론되며[3] , 동시에 영국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또한 1960년대 말 이후 록 음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록 음악 역대 최고의 아티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래미 어워드를 18번 수상하였고[4] ,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3회 헌액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이어져오던 정통 블루스를 현대의 록 음악과 결합하여 독특한 장르인 블루스 록을 개척했다는 큰 업적이 있다.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크림시절 사이키델릭 록과 애시드 록을 블루스 록 장르와 융합해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원형을 제시한 기타리스트이며, 에릭 클랩튼이 없었다면 메탈 기타 주법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5] 메탈 뿐만 아니라 블루스, 소프트 록, 하드 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어쿠스틱 및 일렉트릭 기타 연주법의 교본으로도 불린다. 한국에서는 "Layla"와 "Tears in Heaven", "Wonderful Tonight", "Change the World" 등의 곡들이 유명하며,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음악가 중 한명이다.
단순히 기타 연주법이나 장르 개척 등 음악적으로만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매우 성공해, 솔로와 크림 시절 판 음반 판매고까지 합치면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6] 이는 폴 매카트니[7] , 밥 딜런, 사이먼 앤 가펑클 등 어지간한 록 아티스트들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싱글 정규 앨범만 21장을 냈고 판매고도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는[8] 록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한 명이다.
크림부터 플라스틱 오노 밴드까지 수많은 밴드를 거쳐갔음에도 솔로 시절의 활동으로 더 유명한 음악가이다. 보통 폴 매카트니, 프레디 머큐리, 로버트 플랜트 등 록 음악의 아이콘들은 각각 비틀즈, 퀸, 레드 제플린 등 유명 밴드의 프론트맨으로 활동하면서 유명해진 경우지만, 에릭 클랩튼은 밴드가 아닌 솔로만으로도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등 레전드급 밴드와 상업적이든 음악적이든 간에 거의 자웅을 겨룬다는 점[9] 에서 에릭 클랩튼이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파급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기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고, 동종 업계에서도 클랩튼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가 개최하는 Crossroads Guitar Festival에 나오는 게스트의 면면에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으며, 'Bluesbrakers'란 곡은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존경하는 에릭 클랩튼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다.
음악적인 업적 이외에 사생활 및 인생사는 막장스러움과 비극이 가득하다. 비틀즈의 멤버이자 본인의 절친 조지 해리슨과 함께 패티 보이드를 두고 벌인 세기의 불륜은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들 중 하나이며, 1991년 어린 아들이 초고층 아파트에서 추락해 사망한 일, 약물과 알코올 중독, 극우적 발언 등, 위대한 음악가인 동시에 여러 논란을 이끌었던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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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적 스타일과 평가[편집]
에릭 클랩튼의 작품은 단지 흥미만으로 접근 할 수 없다.
에릭 클랩튼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준 유일한 기타리스트이다.
40년 넘게 블루스 음악을 하는 것은 현세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예요. 태어나서 처음 들은 음악이 블루스였고 방황하던 사춘기에도 의지할 것은 블루스뿐이었죠. 내 언어와도 같은 이 음악의 순수함을 믿어 왔고 언제까지나 그럴 것입니다.
에릭 클랩튼은 로버트 존슨, 머디 워터스, 프레디 킹, 비비 킹, 앨버트 킹, 버디 가이, 휴버트 섬린의 블루스 음악에 영향을 받았는데,[11] 60년대 이후로 대중음악이 사이키델릭 록 시대를 지나며 급변하는 대중음악계에서 침체기에 있던 블루스 장르를 성공적으로 살려냈으며, 현재까지도 비단 기타 연주 기술 뿐만 아니라 녹음 기술, 기타 사운드 등 대중음악의 발전에 매우 크게 공헌한 인물으로 평가받는다. 피터 그린, 로리 갤러거 등과 더불어 블루스 록이라는 장르로는 최고봉이라 평가받아도 무방한 인물. 비틀즈의 멤버인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이[12] 그의 영향력을 받아 1968년경 이후 블루스 음악을 취급했으며[13] 비슷한 블루스의 전설 다이어 스트레이츠,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기타리스트로서는 클린 톤에 강세를 둔다.[14]
그의 연주는 기본적으로 블루스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거기에 사이키델릭과 하드 록, 레게, 컨트리, 나중에는 재즈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렇게 현대 팝, 락의 조류를 따라가면서도 언제든지 클랩튼 본인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던 로버트 존슨의 델타 블루스로 돌아가 블루스의 기본을 다진 복고적인 사운드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가 얘기하길 "블루스는 락이 벽에 부딪혔을 때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 영감을 얻어 돌아오는 군 본진과 같다."라고 했다. 'Wonderful Tonight' 등에서 보여주는 클린하면서도 따뜻한 클랩튼 특유의 기타 톤(우먼톤, 하프톤)에 매료되어 카피하려고 하는 초보 기타리스트들이 많지만, 결국 파 보면 톤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기본기가 신급으로 탄탄한 것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좌절하게 만드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블루스 연주자 대부분이 그렇듯 클랩튼 연주의 핵심은 펜타토닉 스케일이다. 펜타토닉 스케일이란 건 블루스의 기본이자 끝이기도 하다. 기타 이펙터의 최첨단 장비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끈적거리면서 정확한 울림의 소리는 그의 정확한 양손 타이밍과 오른손 피킹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풍부한 비브라토를 넣어도 충분하게 지속되는 써스테인(sustain)은 철저하게 그의 손 밸런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미세한 피킹 각도와 터치에 의해서 소리의 뤼앙스가 울려 퍼진다. 그는 어느 음 하나라도 대충 치는 게 없다. 정확하고 모든 음 하나하나에 의미가 들어있다.
한국에서는 제프 벡, 지미 페이지와 함께 소위 록 3대 기타리스트라는 타이틀로도 불린다. 참고로 이 3대 기타리스트라는 건 1970년대에 어느 일본 음악기자가 그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주장한 3대 기타리스트라는 표현이 한국에 들어와서 마치 확고한 정설인 것처럼 정착된 건데, 오직 한국에서만 유행해온 표현일 뿐이고 한국 이외의 나라들에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다.[15]
음악계 종사자들이 최고의 명예 중 하나로 꼽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유일한 3중 헌액자이기도 한데, 솔로 아티스트 자격, 야드버즈의 멤버 자격, 크림의 멤버 자격으로 헌액되었으며 그래미 어워드 18회 수상의 빛나는 전설 중의 전설이다. 또한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와의 친분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조지 해리슨과는 엄청난 절친이었으며 조지와 패티 보이드를 놓고 벌인 사랑 경쟁은 유명하다.[16]
상술했듯이 블루스 록의 개척자로 70년대 헤비 메탈과 하드 록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레드 제플린은 에릭 클랩튼의 영향을 받은 밴드이며,[17] 그는 하드 록이나 메탈 음악을 자주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개척한 장르였던 블루스 록은 후일 많은 메탈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레드 제플린뿐만 아니라 딥 퍼플, 에어로스미스, 건즈 앤 로지스, 주다스 프리스트, 밴 헤일런 등 수많은 전설의 헤비 메탈 밴드가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법, 작곡 스타일을 계승하였다. 메탈뿐만이 아니라 여러 음악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했다. 그 중에서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기타리스트 마크 노플러는 그의 유산을 가장 직접적으로 계승한 기타리스트로 꼽힌다.[18] 클랩튼에게 영향을 받은 기타리스트들은 동시대의 데이비드 길모어, 브라이언 메이를 비롯해 빌리 스콰이어, 에디 밴 헤일런, 리치 샘보라, 게리 무어, 알렉스 라이프슨, 에릭 존슨, 조 보나마사, 거스리 고반, 에드 시런까지 그의 영향력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리드 기타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리듬 기타 능력도 상당하다. 해당 영상은 Layla의 라이브 영상인데 에릭 클랩튼이 리듬 기타를 맡았다. 코카인(Cocaine)이나 레이 다운 샐리(Lay down Sally) 같은 곡에서의 리듬을 끌고 가는 능력 또한 그의 그루브 감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19]
5.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록 음악의 전설로 평가받는 에릭 클랩튼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클랩튼의 개인사는 온갖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클랩튼 본인도 심각한 논란들을 여럿 일으켰다. 존 레논, 루 리드, 로저 워터스 등과 함께 최고의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록 음악가로 자주 언급된다. 심지어 이러한 뻘짓으로 인해 2023년 롤링 스톤이 개정한 최고의 기타리스트 순위에선 30위권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순위가 하락했으며[20] , 원래는 지미 페이지, 브라이언 메이와 함께 음악가들 중에서는 기사 작위까지 노려볼 만 했으나 이 또한 요원해졌다.[21]
5.1. 패티 보이드와의 관계[편집]
말이 세기의 사랑이지, 실질적으로는 세기의 불륜과도 다름 없는 행보였다. 물론 패티 보이드가 조지 해리슨에 대한 애정을 점차 잃고 있었고 보이드가 먼저 클랩튼에게 다가가긴 했더라도, 보이드를 끌어당기기 위해 Layla라는 노래를 만들고 불륜을 저질러 절친의 아내를 뺏었다는 점은 동서양 불문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이 과정에서 보이드는 진짜로 불륜을 저지를 마음은 없었지만 클랩튼이 너무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놀랐고, 조지 해리슨이 클랩튼과의 관계를 알면서도 신경쓰지 않고 역으로 더 대놓고 불륜을 저질러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클랩튼에게 간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 역시 조지 해리슨이 보이드에게 한 것과 거의 동일한 행동을 반복했고, 술을 진탕 퍼먹고 들어와서 불륜이나 저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그루피 문제도 심각하여, 보이드와 결혼하고 나서도 그루피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잤고, 애인들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믹 재거에게 애인을 NTR당하기도 했다(…). 또 해리슨의 몇배에 달하는 마약을 피우고 걸핏하면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던것도 보이드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결국 보이드는 1989년 에릭 클랩튼과 이혼하였고 정신병원까지 가야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더군다나 에릭 클랩튼은 보이드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그냥 조지 해리슨의 커리어가 탐났기에 보란 듯이 아내를 뺏어서 결혼을 한 것이었다며 양심 없었던 행동을 후일 고백했다. 다행히 클랩튼은 나이가 들면서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보이드에게 좀 더 잘해줘야 했다면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5.2. 마약과 알코올 중독 이력[편집]
에릭 클랩튼의 마약 중독은 마리화나와 LSD에 쩔어있던 영국 록씬에서도 꼽힐 정도로 심각했다. 동시대의 모든 음악가들 중 키스 리처즈, 지미 페이지, 루 리드와 함께 마약 중독으로 제일 악명이 높았다. 1960년대~1970년대에는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시드 바렛 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마약에 중독되었었고[22] 이들을 제대로 단속한다면 영국 음악계는 그날로 190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23] 경찰도 웬만하면 눈감아주는 수준이었지만, 에릭 클랩튼은 마약 중독의 전설(...)인 키스 리처즈도 저리가라할 정도로 마약을 너무 많이 해서 경찰에 잡힐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약을 흡입하고 있던 도중 경찰이 들이닥쳐 황급히 도망쳤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패티 보이드 역시 조지 해리슨의 약물 중독에 실망해 에릭 클랩튼과 결혼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해리슨에 비해 클랩튼은 비교도 안 될 수준(...)[24] 으로 마약에 찌들어있어 이혼의 한 사유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Cocaine"이라고 마약을 주제로 한 곡도 녹음했다.[25] 설상가상으로 커트 코베인, 시드 비셔스, 짐 모리슨 등 여러 음악가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유명한 헤로인까지 손을 댔는데[26] , 스스로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기적일 지경이라고 한다(...).
알코올 중독 이력 역시 마약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흑역사로 남아있다. 술을 먹고 공항에서 진상짓을 부리다가 투옥된 일화도 있다. 1980년대에는 음악 작곡에 대한 부담감으로 너무 많은 술을 마셔서 스스로 알코올 중독 센터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1991년 어린 아들이 초고층 아파트에서 추락해 사망한 사건 이후에야 고쳐질 수 있었다.[27] 이후 자신의 명의로 "크로스로즈 센터(Crossroads Centre)"라는 이름의 재활기관을 협력설립하기도 했다.
5.3. 인종차별 및 극우적 정치 성향[편집]
오늘 밤에 모이신 청중 중에 외국인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손을 들어 주세요... 그래서 어디 계십니까? 어디 계시든 간에, 그냥 여기서 떠나 주시죠. 콘서트장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떠나 주시죠...[28] 저는 당신들이 여기 있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이 방 안이든 우리의 나라에든. 들어 보세요! 우리들은 그들을 모두 돌려 보내야 합니다. 영국이 흑인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외국인을 쫓아냅시다. 아랍인들을 쫓아냅시다. 깜둥이들을 쫓아냅시다. 영국을 계속 하얗게... 검은 유색인종과 깜둥이들과 아랍인과 망할** 자메이카인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는 영국입니다, 여기는 백인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까만 중동 놈들과 검둥이들이 여기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영국은 백인을 위한 나라입니다. 나 참... 여기는 대영제국입니다, 백인의 나라인데, 도대체 우리에게 망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검둥이들을 쫓아내자! 영국을 계속 하얗게!
Do we have any foreigners in the audience tonight? If so, please put up your hands … So where are you? Well wherever you all are, I think you should all just leave. Not just leave the hall, leave our country … I don’t want you here, in the room or in my country. Listen to me, man! I think we should send them all back. Stop Britain from becoming a black colony. Get the foreigners out. Get the wogs[29]
out. Get the coons[30] out. Keep Britain white … The black wogs and coons and Arabs and f*cking Jamaicans don’t belong here, we don’t want them here. This is England, this is a white country, we don’t want any black wogs and coons living here. We need to make clear to them they are not welcome. England is for white people, man … This is Great Britain, a white country, what is happening to us, for f*ck’s sake? … Throw the wogs out! Keep Britain white!
White Riot: 인종차별을 받아들인 음악 운동가들(BBC)
어떻게 Rock Against Racism 운동은 파시즘과 싸웠나?(가디언)
영국의 대중음악가들은 대부분이 노동계급 혹은 지식인 계급 출신이기에 노동당을 지지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32] 에릭 클랩튼은 영국 대중음악계에서는 이례적으로 보수 우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33] 어릴 때에는 성공회의 독실한 신도였고, 현재에도 노동당의 사냥 반대 정책을 맹비난하고, 사냥할 권리를 주장하는 등 보수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클랩튼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보수 우파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와 정치극단주의 때문이다. 믹 재거[34] 나 로저 달트리[35] , 필 콜린스[36] , 이안 커티스[37] 과거의 브라이언 메이[38] 처럼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는 락스타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클랩튼이 유독 정치 성향 문제로 말썽을 많이 일으키는 이유는, 본인의 극단주의적 사상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발언들을 자주 하였기 때문이다.[39]
1976년 인종 분리를 주장한 극우 정치인 이넉 파월(Enoch Powell)을 지지 선언하고 콘서트장, 기자 회견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수차례 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그가 종종 콘서트장에서 쓴 "영국을 계속 하얗게!"는 70년대 당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정당 영국 국민전선[40] 의 슬로건이었다. 동시기에 파시즘에 경도되어 각종 문제 발언을 하던 데이비드 보위와[41] 함께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이 시작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에릭 클랩튼의 과거 인종차별적인 언행도 최근에 들어서 더더욱 비판받는 중이다. 클랩튼은 "내 주변에 흑인 친구도 많고 흑인 여자와 사귄 적도 있다"라며 인종차별주의자임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는 영미권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변명 레퍼토리라 긁어 부스럼만 만들었다. 물론 클랩튼은 흑인이자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지미 헨드릭스와 절친 사이였기 때문에 진심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42]
이후 2018년에 자신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넉 파월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것에는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즉 사람에 따라서는 불리한 상황에 따라 인종 차별에 대해서 사과만 했지 본심은 변하지 않았다고도 보일 여지가 있는 것. 다만 파월 건은 무대에서 횡설수설하다 실수로 한마디 거든 것이라고 자서전에서 주장하기는 했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중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를 지원했다. #
5.4. 코로나19 관련 음모론 및 백신 회의론 주장[편집]
에릭 클랩튼의 Covid 백신 음모론은 슬픈 마지막 공연의 표식이다(NBC)
"코로나 봉쇄는 노예제"…백신저항 선봉에 선 에릭 클랩턴(연합뉴스)
2020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 가운데에서 밴 모리슨과 함께 봉쇄 반대 운동에 참가하고, 자가격리에 반대하는 내용의 곡을 발표하였다. 기사 번역
2021년 5월 17일에는 코로나19 백신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클랩튼은 밴 모리슨과의 합작 앨범 발표 2달 이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2번 맞았는데, 첫 번째로 백신을 맞았을 때와 두 번째로 맞았을 때 모두 팔다리가 마비되어 기타를 칠 수 없었다면서 백신은 "재앙적"이라고, 백신이 안전하다는 것은 프로파간다나 다름 없다고 주장하였다.[43]
2021년 중순 이후로도 "This Has Gotta Stop" 등의 자가격리 반대, 안티백신 메시지를 담은 곡을 발표하며 꾸준히 봉쇄와 백신 반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1년 10월에는 백신 반대를 외치는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와 사진을 찍었다. #
영미권 내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인만큼 거의 백신반대론의 상징격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앤서니 파우치보다 에릭 클랩튼이 더 설득력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행보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동료들하고 연락도 잘 안 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대부분의 뮤지션 동료들이 코로나 19의 확산 예방을 위해 락다운이나 백신 접종을 권고하는 행보를 보인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클랩튼과 거리를 두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5.5. 과속운전 논란[편집]
닉 메이슨과 더불어 영국 음악계에서는 알아주는 유명한 차덕이지만 속도광 면모가 있는지, 무려 3번이나 과속으로 운전면허증을 정지당한 바 있다. 1988년 크리켓 경기를 보러 가다가 제한 속도인 150km를 훌쩍 넘긴 속도로 페라리를 몰아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6주간 면허를 정지당했다. 2000년 서리주에 위치한 집 근처에서 과속을 하다가 또 6개월간 정지를 당했고, 2004년에는 옆나라 프랑스에서 과속 운전을 하다가 운전면허를 정지당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도 포르쉐를 몰고 과속운전을 해 벌금을 물었다. 이외에도 젊은 시절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낸 적도 있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 사용 장비[편집]
7. 개별 문서가 있는 곡들[편집]
분류:에릭 클랩튼 노래 참조.
8. 디스코그래피[편집]
에릭 클랩튼/음반 목록 참조.
- Eric Clapton (1970)
- 461 Ocean Boulevard (1974)
- There's One in Every Crowd (1975)
- No Reason to Cry (1976)
- Slowhand (1977)
- Backless (1978)
- Another Ticket (1981)
- Money and Cigarettes (1983)
- Behind the Sun (1985)
- August (1986)
- Journeyman (1989)
- From the Cradle (1994)
- Pilgrim (1998)
- Reptile (2001)
- Me and Mr. Johnson (2004)
- Sessions for Robert J (2004)
- Back Home (2005)
- Clapton (2010)
- Old Sock (2013)
- I Still Do (2016)
- Happy Xmas (2018)
9. 음원차트 차트인 목록[편집]
9.1.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편집]
9.1.1. 1위[편집]
- "I Shot the Sheriff" (1974, 1위)
9.1.2. 2위[편집]
- "Tears in Heaven" (1992, 2위)
9.1.3. 3위 - 10위[편집]
- "For Your Love" / "Got to Hurry" (1965, 6위, 야드버즈)
- "Sunshine of Your Love" / "SWLABR" (US: Gold) (1968, 5위, 크림)
- "White Room" / "Those Were the Days" (1968, 6위, 크림)
- "Layla" / "I am Yours" (1970, 10위, 데릭 앤 더 도미노스)
- "Lay Down Sally" (1977, 3위)
- "Promises" (1978,9위)
- "I Can't Stand It" (1981,10위)
- "Layla (Acoustic)" (1992, 12위)
- "Change the World" (1996, 5위)
9.1.4. 11위 - 40위[편집]
- "Crossroads" (live) / "Passing the Time" (1968, 28위, 크림)
- "Cold Turkey" / "Don't Worry Kyoko" (1968, 30위, 플라스틱 오노 밴드)
- "After Midnight" (1970, 18위)
- "Willie and the Hand Jive"(1974, 26위)
- "Hello Old Friend" (1976, 24위)
- "Wonderful Tonight" (1977, 16위)
- "Cocaine" (1979, 30위)
- "I've Got a Rock 'n' Roll Heart" (1983, 24위)
- "Forever Man"(1985, 26위)
- "My Father's Eyes" (1998, 16위)
9.2. 영국 UK 싱글 차트[편집]
9.2.1. 1위[편집]
- "Love Can Build a Bridge" (1위, 1995)
9.2.2. 2위[편집]
9.2.3. 3위 - 10위[편집]
- "For Your Love" (3위, 야드버즈)
- "Layla" / "Bell Bottom Blues" (1970, 7위, 데릭 앤 더 도미노스)
- "I Shot the Sheriff" (1974, 9위)
- "Tears in Heaven" (5위, 1992)
9.2.4. 11위 - 40위[편집]
- "Wrapping Paper" / "Cat's Squirrel" (1966, 34위, 크림)
- "I Feel Free" / "N.S.U." (1966, 11위, 크림)
- "Strange Brew" / "Tales of Brave Ulysses" (1967, 17위, 크림)
- "Sunshine of Your Love" / "SWLABR" (US: Gold) (1968, 25위, 크림)
- "Anyone for Tennis (The Savage Seven theme)" / "Pressed Rat and Warthog" (1968, 40위, 크림)
- "White Room" / "Those Were the Days" (1968, 28위, 크림)
- "Badge" / "What a Bringdown" (1969, 18위, 크림)
- "Cold Turkey" / "Don't Worry Kyoko" (1969, 14위, 플라스틱 오노 밴드)
- "Comin' Home" / "Groupie (Superstar)" (1969, 19위, 댈라니 앤 보니)
- "Swing Low, Sweet Chariot" (19위, 1975)
- "Knockin' on Heaven's Door" (38위, 1975)
- "Lay Down Sally" (39위, 1977)
- "Promises" (37위, 1978)
- "Behind the Mask" (15위, 1987)
- "Bad Love" (25위, 1990)
- "Wonderful Tonight (Live)" (30위, 1991)
- "Runaway Train" (31위, 1992)
- "It's Probably Me" (32위, 1992)
- "Change the World" (18위, 1996)
- "Circus (Album version)" (39위, 1998)
- "My Father's Eyes" (33위, 1998)
- "Forever Man (How Many Times?)" (26위, 2000)
10. 여담[편집]
- 대중음악계에서 미남으로 유명하다.[45] 지금도 미노년이다. 헤로인과 코카인, 마리화나, LSD 등 각종 마약을 엄청나게 해댔는데도 주름살이 별로 생기지 않았고 곱게 늙었다.[46] 그런데 안경을 쓰고, 동글동글한 얼굴 모양과 턱 수염 때문에 서양 록덕후들 사이에서는 "유일하게 수학 선생님을 닮은 록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상단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1970년대 초반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그때는 엄청난 꽃미남으로 사생팬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부터 얼굴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났다. 젊은 초기의 얼굴과 중노년기의 얼굴이 거의 딴판이다. 눈이 많이 처지고 전체적으로 얼굴의 분위기가 어둡고 그늘져졌다. 한국 팬들에겐 대부분 안경쓴 중년의 얼굴이 익숙할 것이다.
- 기타를 연습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블루스 연주를 정말 잘하고 싶다는 사람은 꼭 클랩튼의 연주 릭과 프레이즈를 카피해보자. 그의 연주는 기타의 기본기 및 블루스 스케일 운용과 마이너 믹솔리디안을 익히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Nothing But The Blues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에릭 클랩튼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오는 공연실황을 카피하면 큰 도움이 된다.
- 기타의 신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 잘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상당한 보컬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그 유명한 MTV Unplugged에서 심금을 울리는 그의 보컬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47]
- 1960년대 후반에는 단것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여 초콜릿을 마약 먹듯 먹었다고 한다. 평생의 친구 조지 해리슨의 증언에 의하면 초콜릿 상자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한 통을 다 비웠다고. 그래서 해리슨이 단것을 좋아하는 클랩튼에게 "그렇게 초콜릿 많이 먹으면 이 썩는다?" 라고 놀리듯이 작곡한 곡이 The Beatles 앨범에 수록된 Savoy Truffle이다.[48]
- 재산이 약 5000억 원 이상으로 영국 출신 뮤지션으로는 최상위급이며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나 로버트 플랜트, 퀸의 브라이언 메이 등등의 2배가 넘는다. 여담으로 1위는 폴 매카트니.
- 1995년에 음악적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고, 2004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녀 앤 공주의 추천으로 신년 Honours List에 올라 3등급(CBE)으로 승급되었다. 나이차이가 꽤 나는 현재의 아내 멜리아 매케너리(Melia McEnery)[49] 와 딸 세 명을 두고 있다. 현재 기사 작위 수여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논란들을 보면 넘어야할 산이 꽤나 많을 듯하다. 다만 사생활이 에릭 클랩튼급으로 막장이라고 여겨지는 믹 재거가 일찍이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을 보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연주에 주로 사용하는 기타는 일렉트릭 기타계의 명기로 불리는 Fender Stratocaster. 데뷔초기에 이런저런 기타를 쓰다가(Gibson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Les Paul (BEANO)를 사용한 기타톤은 에릭 클랩튼이 신이라 불리는 계기가 되었고 크림시절까지 그의 메인기타는 언제나 깁슨이었다.) 1969년부터 스트렛을 자신의 메인으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유명세 때문에 1988년도부턴 시그니처 모델[50] 이 나오고 있는데, 그가 직접 개조를 한 오리지널 스트렛인 일명 블랙키(BLACKIE)를 기반으로 생산되고 있는 모델이다. 한국에도 정식수입 및 판매되고 있는데 가격은 약 2~300만원 대[51] . 2006년엔 에릭 클랩튼이 블랙키에 남긴 흔적을 100% 재현한[52] 리이슈 한정판 275대를 판매하기도 했다.[53]
- 탑기어 시즌19 4회의 기아 씨드 2세대 모델 리뷰편에서 제레미 클락슨이 기타 좀 치는 동네 형님으로 소개하면서 짧게 등장하였다. 카오디오에 일렉기타를 연결하여 짧게 2곡(Layla와 Sunshine of your love의 메인 리프)을 연주하며 성능 테스트를 해주었다.
- 티포시로도 알려져 있는데, 개인차고에 각종 페라리 차량을 수십 대 보유 중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1976년에 첫선을 보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512BB 모델을 가장 좋아하여 3대나 보유 중이라고 하는데, 페라리 측에서 클랩튼의 특별주문에 따라 페라리 458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한 원-오프(One-off) 모델인 Ferrari SP12 EC를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인 디자인을 올드카인 512BB에 맞추었으며 본래 클랩튼은 12기통 엔진을 원했으나 458의 V8엔진을 그대로 탑재했다.
- 그가 소유한 은색 페라리 250 GT 베를리네타 루소는 핫휠에서 1:18 모형으로도 발매했었다.
- 2014년 7월 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에 나왔다.
- 축구의 민족인 영국인답게 역시 축구를 좋아한다.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골수팬으로 잘 알려져 있다.
- 461 Ocean Boulevard를 발매했을 시점, 친구이자 동료 뮤지션인 비 지스가 침체기에 빠져있을 때 조언을 주었고 그리하여 그들의 명반 Main Course가 탄생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비 지스는 70년대 후반 전 세계를 휩쓸며 정상에 올라섰다.
- 또한 나중인 1988년에 비 지스와 함께 번버리스(The Bunburys)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여 88 서울 올림픽 주제가 앨범에 노래도 수록했다.
- 에릭 클랩튼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 상술했듯 조지 해리슨과는 생전 엄청난 절친이었고 비틀즈 최고의 명곡이라고 불리는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Savoy Truffle이란 곡 역시 조지가 초콜릿을 너무 좋아했던 에릭에게 "그렇게 단것 많이 먹으면 이 썩는다?"라며 놀리듯이 작곡한 곡이다. 1970년대 패티 보이드를 두고 벌인 사랑 경쟁 때문에 약간 사이가 어색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가 죽을 때까지 에릭과 조지는 끈끈한 우정을 보여줬다.[54] 조지의 사후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등이 연 "Concert for George"에서도 기타를 치며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외에 비틀즈와는 꾸준히 연을 맺어왔다. 그 존 레논이 생전에 가장 좋아한 기타리스트도 에릭 클랩튼이었다고 한다.
- 비틀즈 뿐만 아니라 여러 밴드들과 연을 맺어왔는데 대표적으로 레드 제플린과 접점이 많다. 그가 몸담았던 야드버즈가 몇 번 간판을 바꾸다가 레드 제플린으로 다시 탄생한 것도 있었고, 지미 페이지 등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이 클랩튼의 블루스 록 스타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그 외에도 여러 음악가들과는 두루 친한 편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생전이었을 때는 지미와 가장 친한 친구였고, 지금도 롤링 스톤스, 스팅, 제프 벡, 피트 타운젠드, 폴 매카트니, 로저 워터스 등 여러 음악가들과 친하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마크 노플러, 존 메이어, 조 보나마사, 데릭 트럭스 등의 후배들과도 자주 공연을 한다. 특히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와는 절친 사이라서 여러 번 협업을 하기도 했고,[55] Wish You Were Here의 어쿠스틱 기타를 쳐준 적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인 2020년 진저 베이커 사망 추모 공연 당시 로저 워터스가 Sunshine of Your Love의 베이스 기타를 쳐준 걸 보면 정말 친한 사이인 것 같다. 아이러니한 건 클랩튼은 극우 성향에 가까운데, 정작 로저 워터스와 타운젠드, 매카트니 등은 모두 진보 성향으로 정치 성향이 상극이라는 것(...).[56] 이런 점을 보면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또한 서로의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잘 지내는 친구사이는 많다.
- 김정철이 에릭 클랩튼의 광팬이라 평소 모습을 노출하지 않음에도 이 작자 콘서트에서 찍힌 사진이 수두룩하다. 거의 매 콘서트마다 찾아다닌다는 듯.
엘리자베스 2세 : 이 사람은 누구인가?
브라이언 메이 : 에릭 클랩튼. 기타리스트요. 주빌리 행사에서 기타 쳤던 사람이잖습니까.
엘리자베스 2세 : 그렇군. 옆에 서있는 자네도 기타리스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