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데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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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제156대 교황이자 로마 주교.
본명은 안셀모 다 바지오 (Anselmo da Baggio)이며, 현재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다. 1055년 경에 신학 교육을 받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서품 2년만인 1057년에 루카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소바나의 일데브란도[1] 의 보좌를 받으며 성직매매를 억제하고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셀모는 1061년 선종한 니콜라오 2세 교황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선출된 당시의 차기 교황 선거는 처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재가를 받지 않은 최초의 선거이며, 이것은 전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이룬 업적 중 하나다. 그럼에도 신성 로마 제국은 예전처럼 교황 후보를 지명해 영향력을 끼치려 했고, 제국에 의해 교황 후보로 지명된 파르마의 주교 카달루스는 대립교황으로 선출되어 호노리오 2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로마로 가 알렉산데르 2세를 위협했다. 그러나 결국 호노리오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버림받으면서 1064년의 만토바 교회 회의에서 대립 교황으로 선언, 단죄되었고 알렉산데르 2세는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는다. 1066년에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던 당시 기욤 2세 (윌리엄 1세)의 사절에게 왕위 인정 편지와 베드로의 깃발 등을 보내주어 그의 즉위를 인정했다.
잉글랜드 왕국의 앵글로색슨 왕가 말기에 중요한 네 교구가 불법적으로 설정되었고, 성직자들의 생활이 문란하며 지적 수준이 낮아 기욤에게 사절을 보내어 왕위에 올라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성직매매를 통해 차지한 스키건드 대주교를 파직시켰고, 개혁가이며 베크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고 캉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파비아의 랑프랑을 새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알렉산데르 2세는 라틴 교회의 경우 사순 시기 동안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여기에 더해 이후 전통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 동안에도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1073년 알렉산데르 2세가 선종하자 뒤를 이어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일데브란도가 그레고리오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선출되었다. 알렉산데르 2세의 재위 당시, 일데브란도를 주축으로 세력이 형성되면서 현대에까지 내려오는 일명 추기경단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데르 2세는 로마에서 선종하여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하는데, 무덤의 근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1. 개요[편집]
가톨릭의 제156대 교황이자 로마 주교.
2. 생애[편집]
본명은 안셀모 다 바지오 (Anselmo da Baggio)이며, 현재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다. 1055년 경에 신학 교육을 받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서품 2년만인 1057년에 루카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소바나의 일데브란도[1] 의 보좌를 받으며 성직매매를 억제하고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셀모는 1061년 선종한 니콜라오 2세 교황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선출된 당시의 차기 교황 선거는 처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재가를 받지 않은 최초의 선거이며, 이것은 전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이룬 업적 중 하나다. 그럼에도 신성 로마 제국은 예전처럼 교황 후보를 지명해 영향력을 끼치려 했고, 제국에 의해 교황 후보로 지명된 파르마의 주교 카달루스는 대립교황으로 선출되어 호노리오 2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로마로 가 알렉산데르 2세를 위협했다. 그러나 결국 호노리오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버림받으면서 1064년의 만토바 교회 회의에서 대립 교황으로 선언, 단죄되었고 알렉산데르 2세는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는다. 1066년에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던 당시 기욤 2세 (윌리엄 1세)의 사절에게 왕위 인정 편지와 베드로의 깃발 등을 보내주어 그의 즉위를 인정했다.
잉글랜드 왕국의 앵글로색슨 왕가 말기에 중요한 네 교구가 불법적으로 설정되었고, 성직자들의 생활이 문란하며 지적 수준이 낮아 기욤에게 사절을 보내어 왕위에 올라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성직매매를 통해 차지한 스키건드 대주교를 파직시켰고, 개혁가이며 베크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고 캉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파비아의 랑프랑을 새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알렉산데르 2세는 라틴 교회의 경우 사순 시기 동안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여기에 더해 이후 전통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 동안에도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1073년 알렉산데르 2세가 선종하자 뒤를 이어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일데브란도가 그레고리오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선출되었다. 알렉산데르 2세의 재위 당시, 일데브란도를 주축으로 세력이 형성되면서 현대에까지 내려오는 일명 추기경단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데르 2세는 로마에서 선종하여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하는데, 무덤의 근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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