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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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다.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3]
2. 생애[편집]
1444년 세종의 손녀이자 임영대군의 딸인 중모현주와 결혼하였고 이후 세조 때부터 1456년 음서 천거와 과거 장원 급제 등으로 문과에 진출했다. 예문관제학, 이조참판, 병조참판, 공조참판, 지돈녕부사, 동지돈녕부사 겸 동궁빈전 세자빈객, 공조판서 겸 동궁빈전 세자빈객, 병조판서, 특진관, 좌참찬,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사소대장,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된 후 영의정에 이르렀다.
2.1. 세조 ~ 예종 시절[편집]
1453년 진사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고작 18세였다. 용모가 아름다워 임영대군의 사위로 발탁되었다.
1454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돈녕부승(敦寧府丞), 정랑 등을 거쳐 1466년(세조 12) 1월 당상관에 승진하면서 병조참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3월 알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병조참판에 승진, 그 해에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3등으로 급제하고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1468년 남이 사건 처리에 참여한 공적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2.2. 성종 시절[편집]
1471년 성종을 임금으로 세우는 데 참여한 공적으로 좌리공신이 되었다.
1478년부터 세자 연산군을 2년 반 동안 과외시켰는데, 세자가 눈에 띄게 성장하자 그 후부터 성종이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 후 고위직인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다.
1484년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대, 1486년 병조판서 겸 특진관(兵曹判書兼特進官)이 되었다.
1487년 성종은 "병조 판서 신승선의 딸로 세자빈을 삼도록 하라."라는 명을 내린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嬪)으로 뽑히자 그를 계기로 좌참찬, 1488년 한성부판윤, 1489년 예조판서, 1491년 사소대장(四所大將)을 겸대,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492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우의정이 되었다.
2.3. 연산군 시절[편집]
1495년∼1499년에 걸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성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상술했듯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어른이었다. 소혜왕후는 이 점을 감안해 신승선을 좌의정으로 승격시켰다가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사위의 난폭함으로 인해 신승선은 병을 핑계 삼아 여러 번 휴가를 냈다.
그의 호가 사지당(仕止當)인 이유도 '나 벼슬 안 할래'라는 자신의 의견을 담은 것이다. 신승선은 결국 사직한 뒤인 1502년 별세하였고[4] , 갑자사화가 일어나며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3. 사후[편집]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 연산군은 중전 신씨가 거애(장례에서 곡을 하는 것)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고기 반찬을 먹도록 하였다. 이것만 보면 연산군이 쓸데없는 패악질을 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신씨는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였다. 즉 신씨가 자칫 건강을 해치고 유산까지 할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 막은 것에 가깝다. 이 당시 신하들도 "비록 친아버지의 장례이지만 임산부이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한편 신씨가 임신한 아기는 이후 유산된 것으로 추정한다.
4. 여담[편집]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왕자인 임영대군의 사위로 발탁된 결정적인 이유도 잘생겨서 였다고 한다. 현재 그의 영정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외모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당시 기준에 미남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5. 가족 관계[편집]
아내는 임영대군의 딸이었으며, 슬하에 신수근, 신수겸, 신수영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전부 중종반정 때 임사홍과 함께 미리 제거당해 대가 끊겼다. 또한 연산군의 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는 그의 딸이며,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도 그의 손녀로 장남 신수근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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