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티나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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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시스티나 성당Virtual Tour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경당으로, 15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 평소에는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곳으로 자주 사용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부를 구성하는 사면의 벽과 천장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필생의 역작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도 이곳을 장식하고 있다. 본디 미켈란젤로의 라이벌인 라파엘로의 태피스트리 10개도 양측 벽의 가장 아래를 장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나 보존 문제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나온다.[5] 관람객들이 벽면과 천장의 성화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통에 덜 주목받긴 하지만, 코즈마테스크 양식으로 장식된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도 아름답다. 1984년 바티칸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콘클라베가 거행되는 동안에는 추기경단과 소수의 전례 담당자들을 제외한 인원 일체의 출입이 불허되어 있으며, 특히 여성은 입장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6] 하지만 '여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수녀 파스칼리나 레네르트는 이런 전례를 깨고 역사상 최초로 콘클라베 동안 시스티나 경당에 출입한 여성이 되었다.
2. 역사[편집]
지금의 시스티나 경당 자리에는 14세기 중반부터 마조레 경당(Cappella Maggiore)이 있어 교황청의 각종 미사와 의전이 행해졌지만 1세기가량 지나자 건물이 노후화되었고, 이에 따라 교황 식스토 4세는 마조레 경당을 헐고 새 경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피렌체 출신의 바치오 폰델리가 설계하고 조반니노 데 돌치의 감독으로 진행된 공사는, 1473년에 시작되어 1483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축성되었다. 신축된 경당은 건축을 의뢰한 교황 식스토 4세의 교황명에 따라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으로 명명되었다.
시스티나 경당의 외부는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창문도 적으며, 경당에서 바깥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출입구 없이 교황 궁전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용이해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경당의 평면은 길이 40.23m, 너비 13.41m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에 언급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의 치수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바티칸이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바닥의 중앙부를 가르는 대리석 칸막이를 통해 경당을 두 구획으로 나누어 각각 교황 일행과 일반 신자를 위한 자리로 삼았는데, 이것 또한 솔로몬의 성전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황 일행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사용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칸막이를 옮기는 바람에 지금은 한쪽에 치우친 상태다. 경당의 높이는 20.7m이고, 내부의 천장은 아치형이며, 그 밑에 있는 남쪽과 북쪽 벽면에는 각각 6개의 창문이, 동쪽과 서쪽 벽면에는 각각 2개의 창문이 있다. 이 중 서쪽 벽면의 창문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폐쇄했다.
1564년 최후의 심판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인해 나체와 성기를 가리는 옷이 덧그려졌다. 이 작업을 맡았던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는 일 브라게토네(Il Braghettone), 즉 ‘기저귀 화가’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어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1549년 화가 마르첼로 베누스티가 덧칠 이전의 모습을 그린 최후의 심판 모사품이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현전하는 시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이 얼마나 수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마르첼로 베누스티가 그린 최후의 심판 모사품
3. 관람[편집]
바티칸 미술관을 방문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나, 항상 그렇듯이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사진을 찍으면 안 되며 말조차도 해선 안 된다.[7] 들어가면 "silence (please)"라는 말만 울려퍼진다. 제발, 제발 좀 찍지 말자. 걸리면 개인관람 시 최소 사진 삭제, 최대 즉시 쫓겨난다. 단체관람 시 업체가 3달간 출입금지당해서 같이 보는 그룹 전체에게 피해가 간다. 보는 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나 목이 아프니 적당히 목 생각하며 관람하도록 하자.
사진 촬영이 처음 금지된 것은 1982년으로, 그림 및 성당의 보수 비용 900억원을 일본의 NHK가 부담하면서 그 대가로 시스티나 성당 촬영권을 독점하게 되었었으나,[8] 이 독점권은 1987년 복원 완료 3년 뒤인 1990년 부로 만료되었다.#[9][10][11] 그러나 NHK의 촬영 독점권이 만료되었음에도 시스티나 경당 측에서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촬영 금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12]
4. 내부의 프레스코화[편집]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1480년, 당시 피렌체와 교황청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해소하고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자신이 후원하던 화가를 보내어 제작하게 한 것이다. 성당의 벽면은 라파엘로의 스승이었던 페루지노, 미켈란젤로를 잠시 가르쳤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산드로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등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당대 유수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경당의 내부 벽면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공통된 부분을 부각시켜 남쪽과 북쪽 벽에 각각 6개씩, 동쪽과 서쪽 벽에 각각 1개씩 도합 14개의 성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합일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느님이 부여한 권리가 모세 → 예수 → 베드로 → 교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4장면의 성화들 가운데서 제대가 있는 서쪽 벽에 그려졌던 '강에서 발견된 모세'와 '그리스도의 탄생'은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지워져 현재는 12장면만 현존한다. 피렌체의 화가들은 성화의 통일성을 위하여 가급적 개성을 자제하고 안정감을 추구하는 구도와 화풍을 추구했다.
4.1. 남쪽 벽[편집]
4.2. 북쪽 벽[편집]
4.3. 동쪽 벽[편집]
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편집]
시스티나 경당을 보지 않고서, 한 인간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직관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Without having seen the Sistine Chapel one can form no appreciable idea of what one man is capable of achieving.)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남긴 말, 1787년
5.1. 천장화[편집]
1483년에 축성식을 가진 시스티나 경당은 21년 후인 1504년, 건물의 배수 구조에 문제가 생겨 파란 바탕에 금빛 별을 그렸던 천장[13] 에 금이 갔다. 보수 작업 도중 천장화가 손상되자, 교황 율리오 2세는 별이 그려진 기존의 천장화를 지우고 새로운 천장화를 그리기로 결정하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책임을 맡겼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다른 사람도 아닌 율리오 2세의 의뢰로 교황 본인이 안장될 영묘를 만드는 조각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어서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고사했지만[14] , 교황이 강하게 압박하자 하는 수 없이 영묘 작업을 중단하고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 계약서에 1508년 5월 10일 서명했다.[15]
원래는 12사도를 그리라는 것이 율리오 2세의 주문이었지만, 그런 구성으로는 천장화를 짜임새있게 그릴 수 없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창세기, 예수의 조상, 예언자와 시빌라, 이뉴디와 메달리온 등을 포괄한 장대한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해 교황의 승인을 받아낸다. 1508년 12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경당 벽면에 비계를 고정시키고 작업에 착수했다. 고향 피렌체에서 불러들인 조수들과 함께 작업을 했지만, 대부분의 주요 그림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혼자서 그렸는데,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초반에는 프레스코화가 변색되는 일이 벌어져 당황한 나머지 작업을 중단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천장화 작업을 그만두고 영묘 조각에 복귀하려 했지만, 율리오 2세가 보낸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사태를 분석한 결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그림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벽면에 바른 석회의 수분이 너무 많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갈로가 수분을 조절하면서 변색 문제는 해결됐지만, 다소 아깝긴 했으나 원래 처음부터 하기 싫었던 작업이고 이 사태를 핑계로 천장화 작업을 때려치우려 했던 미켈란젤로 입장에서는 상갈로가 야속하기도 했을 것이다.(...)
천장화는 상술한 것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초반에는 작업이 느리게 진행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업 속도에 탄력이 붙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는 '빛과 어둠의 분리' 같은 하나의 장면을 밑그림 스케치 없이 하루 만에 완성하기에 이른다.[16] 1511년 8월 15일에는 아직 미완성이었던 천장화가 부분적으로 공개되었으며[17] , 마침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4년 만인 1512년 10월 31일, 율리오 2세의 축하 미사를 거쳐 같은 해 11월 1일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5.1.1. 예수의 조상[편집]
5.1.2. 성경의 내용[편집]
5.1.3. 예언자와 무녀[편집]
5.1.4. 펜던티브[편집]
5.2. 최후의 심판(서쪽 벽)[편집]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 바오로 3세, 최후의 심판을 처음 보았을 때 무릎을 꿇고 감탄하며 남긴 말
6. 복원[편집]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과 벽면에 프레스코화를 그린 이래, 보존을 위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17세기 초와 18세기 초, 그리고 20세기 초에 그림을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행해졌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된 것은 1984년 11월 7일이었다. 10년 넘는 작업 끝에 복원이 완료된 천장화는 1994년 4월 8일에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성화는 1994년부터 복원에 착수해 1999년 12월 11일에 공개되었다. 전례 때 켠 촛불의 그을음과 먼지가 500년 동안 덮이면서 어둡게 변했던 프레스코화는, 최신 과학 기술을 동원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당대의 광채를 되찾았다. 이에 대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사용한 풍부한 색채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옹호론과 더불어, 그을음과 먼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림이 가지고 있던 어두운 깊이감이 사라졌다는 비판론이 제기되어 팽팽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복원하면서 500년 묵은 세월의 때를 벗겨내기 전과 후를 비교하기 쉽도록, 프레스코화의 일부를 그대로 두었다. 요나가 그려진 위의 복원 이후 사진을 보면, 오른쪽의 기둥 장식 부분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주변보다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때를 벗겨내지 않은 부분 중 하나다. 복원이 끝난 후에는 빛에 약한 프레스코화를 보호하기 위해 사진 촬영을 엄금하고 있다.
7. 기타[편집]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에지오 아디토레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전투를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쌔신 크리드 2에서 최종보스와 싸우는 곳으로 유명하다. 다만 시대적 배경이 1500년이라,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아직 그려지지 않은 상태로 나온다. [19]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1부터 문명 5까지 개근했다. 아직 위인 시스템이 없고 대신 불가사의에 위인의 이름이 나와 위인의 업적을 표현했던 문명 1과 문명 2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경당(Michelangelo's Chapel)" 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며, 문명 3부터 시스티나로 나온다.
- 문명 1: 성당(불행한 주민 넷을 만족한 상태로 만듦)의 효과를 50% 증가시킨다. 공산주의를 연구하면 퇴보되어 효과가 사라지기는 하지만, 효과를 볼 수 있는 기간이 꽤 길기 때문에 한동안 행복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 문명 2: 완공 즉시 모든 도시에 성당을 건설한다. 성당은 불행한 주민 넷을 만족한 상태로 만들지만 건설 비용이 비싼데다 유지비도 많이 잡아먹는데, 이걸 모든 도시에 즉시 준다는 점은 무척 강력하다는 평을 받는다. 다만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하면 주민 넷이 아니라 셋이 만족하게 되어 효과가 줄어든다는 점에 유의.
- 문명 3: 짭짤한 양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성당의 효과(도시의 불행한 주민 셋을 만족시킴)를 두 배로 증가시킨다. 성당의 건설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쉽사리 짓기는 어렵지만, 일단 시스티나를 짓고 성당을 세우면 행복도 관리는 신경을 꺼도 되는 수준.
- 문명 4: 위대한 예술가 점수와 짭짤한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모든 전문가와 국교로 지정한 종교의 건물이 문화를 매 턴 추가로 생성하게 한다. 문화 승리를 노리고 있다면 유용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강력한 불가사의가 많다.
- 문명 5: 모든 도시의 문화 생성을 증가시키며, 걸작 예술품 슬롯 둘을 제공한다. 문화 승리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다른 문명이 지었을 경우 골치가 아파지기에 반드시 건설하거나 이른 시기에 빼앗아야 한다.
- 문명 6: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제작할 수 있는 걸작 가운데 시스티나 천장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등장한 영화 <고통과 환희>(1965년)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그리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 2012에서는 추기경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던 중 아담의 창조가 갈라지며 천장이 무너져 추기경단을 덮친다.
이 성당의 주제대는 트리엔트 미사처럼 신자들과 사제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ad orientem) 집전하게 되어 있다.[20] 사제와 신자가 제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는 방식(versus populum)이 일반적인 현대에 들어서는 이동식 제대를 미사때마다 따로 설치해서 그 위에서 미사를 드리곤 했으나, 옛 전통의 보존을 중시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기존의 주제대 위에서 미사를 거행해왔으며 이 관행은 현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유지해오고 있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유리벽 안에 들어있는 상태로 바티칸 피나코테카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밑그림은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서 소장한다.[6] 이는 가톨릭에서 여성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녀는 그냥 수도자일 뿐, 성직자로 분류되지 않으며, 성직자가 아니다.[7] 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면 워낙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생각보다 웅성거린다. 그럴 때마다 방송으로 Silence를 외치지만 그때 잠시 조용해졌다가 얼마 지나면 또 웅성대기 시작한다... 세계 어딜 가든 선생님 말 안 듣는 건 똑같다[8] NHK 측은 독점권을 전문 사진가만을 대상으로 행사했으나, 일반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촬영하는 이들 탓에 전면 금지가 되었었다.[9] 당시 뉴욕타임즈 기사. 로그인 필요[10] 최후의 심판 또한 NHK에서 복원 비용을 댔기 때문에 94년에 복원이 마무리된 후 97년까지 촬영 독점권이 있었다.[11] 이를 두고 지금의 촬영금지가 아직도 독점권이 유지되기 때문이라고 헛소문을 퍼트리는 경우가 있다. #[12]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싶겠지만, 실내이고 천장이기 때문에 상당히 어둡다. 때문에 플래시를 자동으로 두면 터질 가능성이 크고, 일부러 터트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에 아예 금지하고 있는 것.[13] 피렌체의 화가 피에르 마테오 다멜리아가 그렸으며 바탕을 청금석으로 하고 별을 금으로 그려서 돈지랄의 정점을 보였다.[14] 더욱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피에타>, <다비드> 등을 통해 당대에 이미 조각가로서 명성이 자자했지만,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은 없는 상태였다.[15] 이때 그는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고 서명했다.[16] 당시 프레스코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던 화가들도 같은 면적을 프레스코화로 완성시키기 위해 며칠은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업 속도는 매우 빠른 편에 속했다.[17] 천장화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 공개하지 않으려던 것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입장이었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한 율리오 2세가 성화를 부린 결과였다.[18] 원래 성 블라시오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나체에 기댄 자세가 음란하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지적을 받아,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사람들에게 '기저귀'를 입힐 때 성 블라시오의 얼굴을 위쪽으로 향하도록 바꿔놨다.[19] 지하에 먼저 온 자들이 만들어놓은 시설이 따로 존재한다.[20] 당연한 사실이지만 시스티나 경당이 건설된 르네상스 시대는 이러한 전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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