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신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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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百濟新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의 사서들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서기》가 인용을 함으로써 존재가 확인된 사서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록도 나오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백제 및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오기 때문에 비록 일본의 입장에서 걸러졌다곤 하지만 백제인이 직접 쓴 굉장히 귀중한 사료이다. 다른 백제 기록물과 다른 차이점은 인용된 기록들이 모두 개로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다른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백제가 한 일을 마치 자신들이 한 것처럼 각색해서 기록해 놓았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혹은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망명을 간 백제인들이 당시 가지고 있던 백제의 역사 기록을 당시 일본 황실에게 잘보이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개찬해서 내놓았다는 추측이 있다. 백제신찬을 제출한 아스카베노 미야츠코(飛鳥戶造)등의 가계는 부여곤지의 후손이라고 한다.
2. 일본서기의 인용문[편집]
일본서기에 인용된 횟수는 총 3차례로 유랴쿠 덴노, 부레츠 덴노의 기록에서 일부가 전해진다.
2.1. 웅략기[편집]
2년 가을 7월에 백제 지진원(池津媛)이 천황이 장차 행차하려는 데도 석천순(石川楯;이시카하노타테)[옛 책[舊本]에서는 석하고합수(石河股合首;이시카하노코무라노오비토)의 조상인 순(楯)이라고 하였다.]과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大伴室屋大連;오호토모노무로야노오호무라지)에게 명하여 내목부(來目部;쿠메베)로 하여금 남녀의 팔다리를 벌려 나무에 매달고 임시로 만든 단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도록 하였다【백제신찬(百濟新撰)에서는 “기사년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례노궤(阿禮奴跪;아레나코)를 보내 여자를 찾도록 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적계녀랑(適稽女郞)을 단장하여 천황에게 바쳤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웅략기 2년. 백제의 지전원(池津媛)이 밀통하여 죽임
가을 7월에 군군이 왕경에 들어왔다. 이윽고 다섯 아들을 두었다【백제신찬(百濟新撰)에 “신축년에 개로왕(蓋鹵王)이 아우 곤지군(昆支君)을 대왜(大倭)로 보내어 천황[天王]을 모시게 하였다. 형왕(兄王)[1] 의 우호를 닦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웅략기 5년. 군군(軍君:곤지)이 왕경에 들어옴
2.2. 무열기[편집]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國人)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嶋王;시마키시)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武寧王)이라고 한다【백제신찬(百濟新撰)에서 말하길,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그리하여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이후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斯麻王)이라 한다. 그는 곤지왕(琨支王)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筑紫嶋)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돌려보냈고 왕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가카라)의 바다에는 주도(主嶋;니리무세마)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그래서 백제인은 주도(主嶋)라 이름 붙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嶋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異母兄)이라 함은 분명하지 않다.】.
《일본서기》 무열 4년 백제에서 말다왕이 국인들에 의해 제거되고 무령왕이 즉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