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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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스의 메디나
مدينة تونس القديمة
1979년

카르타고 고고 유적
موقع قرطاج الأثري
1979년

엘 젬의 원형 경기장
مدرّج الجم الروماني
1985년

케르쿠안의 카르타고
옛 시가지와 네크로폴리스
مدينة كركوان البونيقية ومقبرتها
1988년

수스의 메디나
مدينة سوسة
1988년

카이로우안
القيروان
1997년

두가
(투가)

دقّّة
2023년

제르바
: 도서지역 정착 양식에 대한 증언
جزيرة جربة: شهادة على نمط إعمار في مجال ترابي جزيري
자연유산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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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우안 (튀니지)



파일:카이로완 튀니지.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카이로우안 고대도시
Kairouan
국가·위치튀니지 카이로완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88년
등재기준(i)[1], (ii)[2], (iii)[3], (v)[4], (vi)[5]

아랍어 القيروان[6]
영어 Kairouan / Cairoan

1. 카이로우안 시
1.1. 역사
1.1.1. 이프리키야 총독부
1.1.2. 피흐르 왕조
1.1.3. 이바디 이맘국 & 무할라브 家
1.1.4.1. 상업적 번영
1.1.5. 파티마 왕조의 홀대 : 10세기
1.1.6. 지리 왕조의 수도 : 11세기
1.1.6.1. 1057년 : 제국의 역습
1.1.7. 하프스 왕조 : 13~15세기
1.1.8. 근대 : 오스만 & 프랑스
1.2. 기타
2. 카이로우안 주


1. 카이로우안 시[편집]


파일:Kairouan.jpg

파일:아글라브 튀니지 1.jpg

튀니지 동부에 위치한 중세 도시.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원정대가 670년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프리키야[7]를 정복하고 세운 군단 기지에서 비롯되었다. 지명은 페르시아어로 군사 기지를 뜻하는 카라반에서 유래되었다. 베르베르어로는 티키르완으로 불린다.

9세기에 아글라브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아나, 이후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 치하에서 이프리키야의 중심지가 알 마흐디야로 이전되며 홀대받던 카이로완은 파티마 조의 속국이던 지리 왕조의 수도가 되며 재차 번영하였다. 하지만 지리 왕조가 수니파로 개종하며 독립을 선언하자 파티마 조는 힐랄, 술라임 부족을 보내어 키이로완을 파괴하였다. 도시는 다시 그 영광을 되찾지 못하였다. 카이로완의 현재 인구는 19만명으로 추산되며, 튀니지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크바의 대모스크(카이로우안 대모스크)가 성지이자 관광지로 유명하며,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대모스크는 마그레브에 지어진 첫 마스지드로서, 이슬람의 여러 성지들 중에서도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음가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 무슬림들에게는 카이로완을 7번 순례하면 핫지 (메카 순례)와 같다는 믿음이 있을 정도이다. 사원의 자이투나 대학은 지금도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 버금가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

1.1. 역사[편집]



1.1.1. 이프리키야 총독부[편집]


파일:Kairouan (1).jpg

670년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우크바 빈 나피가 마그레브의 전진 기지로써 야생의 숲 한가운데에 있던 옛 동로마 성채에 건설했다. 다만 이후로도 쿠사일라 등 현지 베르베르 부족들의 저항이 이어져 685년 우크바는 비스크라 부근에서 전사했고, 702년에애 카히나 여왕의 죽음으로 카이로우안이 이프리키야의 치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1.1.1. 베르베르 대항거[편집]


반세기 가까운 안정기 후, 741년 말의 베르베르 대항거 시기 카이로완은 반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며 혼란을 겪는다. 바그도우라 전투에서 카이로완 총독 쿨숨 빈 이야드 알 카이시를 전사시키는 등 시리아 군대를 격파한 베르베르 반군은 이프리키야를 휨쓸었다. 쿨숨의 조카이자 후계자 발즈 이븐 비슈르 알 쿠샤이리는 잔여 병력과 안달루스에 있었지만 바다를 건너 도전하지 못했고, 이에 칼리파 히샴은 한달리 빈 사프완을 새 총독 겸 마그렙 & 안달루스 등 제국 서부의 부왕으로 봉하여 병력을 끌어모아 어떠한 수단이든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과 함께 파견했다.

742년 초, 한달라는 이집트를 하프사 이븐 알 왈리드 알 하드라미에 맡기고는 바르카 및 트리폴리 등에서 병력을 증원했다. 그동안 이프리키야의 카디 (법관) 압둘라흐만 이븐 우크바 알 가파리가 카이로완의 수비대를 이끌며 튀니지 남부에 기반한 수프리 카와리지 지도자 아카샤 이븐 아이유브 알 페자리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해 4월, 다른 베르베르 군벌 압둘와히드 이븐 야지드 알 하와리와 연합한 아카샤의 2차 공격이 임박한 카이라완에 당도한 한달라는 두 군대가 부근에서 합류하기 위해 접근하던 무렵 기병대를 보내어 서쪽에서 오던 압둘와히드를 타격해 지연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군대로 남쪽에서 오던 아카샤와 엘카른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쉴 틈도 없이 한달라는 이제 과장 섞어 30만이라 하는 유례 없는 수준의 베르베르 대군을 이끌고 온 압둘와히드를 대적하기 위해 카이라완 주민 전부를 무장시켜 군세를 부풀린 후 재차 출정했다. 742년 5월, 중세 이프리키야 역사상 최대의 군사 충돌인 카이라완 외곽의 엘아스님 전투에서 한달라는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압둘와히드는 일대일 전투 중 전사했고, 12 ~ 18만에 달하는 베르베르인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이프리키야 총독을 지내던 한달라는 745년, 우크바의 증손인 압둘 라흐만에게 축출되었다. 후자는 3차 피트나로 우마이야 조가 혼란에 빠지니 아미르를 칭하며 피흐리 왕조를 세웠다.

1.1.2. 피흐르 왕조[편집]


압둘라흐만이 추진한 우마이야 조로부터의 자립 및 중앙집권화[8] 시도는 베르베르 뿐만 아니라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카이라완에 도읍한 압둘라흐만은 전투 끝에 튀니스에서 봉기한 아르와 이븐 앗 주바이르 앗 사데피, 타비나스의 이븐 아타프 알 아즈디, 베자의 베르베르 군벌 사비트 앗 산하지 등을 모두 격파했다. 또한 압둘라흐만은 745년 이래호 내분을 겪던 안달루스[9]에 파병해 질서를 회복했고, 중재를 통해 그의 아들 유수프가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서부 마그레브는 여전히 독자적인 베르베르 부족들의 수중에 있었고, 동족들이 거둔 성과에 고무된 이프키리야의 베르베르 인들은 그들 역시 독립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중 제르바 섬과 오에아의 베르베르 인들은 이바디 카와리지 이맘 하리스의 지도 하에 봉기하여 압둘라흐만의 동생 일야스를 격파하고 가베스 ~ 트리폴리 ~ 시르테 해안을 장악하였다.

이에 752년, 압둘라흐만은 토벌군을 보내 그들을 남쪽의 나푸사 산지로 몰아냈다. 같은해 그는 시칠리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방어가 삼엄한 것을 보고 약탈전으로 국한시켰다. 한편, 궁지에 몰린 마르완 2세로부터 이프리키야 지배권을 인정받은 압둘라흐만은 신생 압바스 왕조에 자신의 지위 인정을 요구했으나 복속을 요구받자 반기를 들었다.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앗 사파흐 언급을 중단하고, 그가 보낸 예복을 공개적으로 불사른 그는 (히샴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등) 피난해 온 우마이야 왕족들을 수용하여 카이라완의 카디 등 고위직에 임명했다. 압둘라흐만의 동생 일야스는 우마이야 공주와 결혼해 인척을 맺었다. 다만 점차 우마이야 왕족들이 반대파와 결탁해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위협할까 염려된 압둘라흐만은 서서히 적대감을 표출했다.

그러자 압둘라흐만 1세 등은 나푸사 산지로 피신했고, 755년 안달루스에 당도한 후 이듬해 유수프 알 피흐리를 폐하며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한편 755년, 압둘라흐만은 우마이야 가문원 카디가 주모자로 지목된 역모 사건을 계기로 우마이야 가문 및 그 세력을 대거 처형했다. 다만 인척을 맺은 제수는 벌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남편 일야스에게 복수를 계기로 찬탈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동의한 일야스는 관저에서 자녀들과 놀아주던 형의 등에 칼을 꽂아 죽였고, 통수 그대로 집권했다. 일야스는 정통성 보완을 위해 압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에 복속을 표했다. 다만 튀니스에서 일야스의 동생 아므란과 압둘라흐만의 아들 하빕이 봉기했다. 대치 끝에 일야스가 트리폴리, 압둘 라흐만의 아들 합빕이 가프사, 일야스의 동생 아므란이 튀니스를 나눠갖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야스가 협정을 어기고 영토를 독점하려 하자[10] 하빕이 재차 봉기, 일대일 대결에서 일야스를 죽였다. 하빕은 숙부의 수급과 함께 카이라완에 개선, 집권하였다. (755년 12월)

그러나 일야스의 동생 압둘와레스 등 그 잔당이 남쪽의 수프리 카와리즈파를 믿는 와르파주마 베르베르인들에게 망명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한달라에게 패한 후 약 10여년간 산지에 웅거했던 와르파주마 부족장 아심 이븐 자밀 알 와르파주미는 압둘와레스의 설득에 출정했고, 알 만수르에 복속을 표했다. 이에 하빕은 카디 아부 쿠라입에게 카이라완을 맡기고 출정했으나 대패하여 가베스로 피신했다. 그후 하빕은 아부 쿠라입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파견된 원군은 반군과 마주하고는 그들이 압바스 조에 복속했음을 밝히자 오히려 귀순해버렸다. 757년 초엽, 아심은 압바스 조의 검은 깃발을 앞세워 카이라완에 무혈 입성했다. 이에 하빕은 아우레스 산지에서 군대를 모아 카이라완으로 진격했으나, 그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757년 6월) 자신들 외에 전부 죽어 마땅한 불신자로 여기던 수프리 카와리지 교리에 따라 아심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1.1.3. 이바디 이맘국 & 무할라브 家[편집]


752년 나푸사 산지로 피신했던 이바디 카와리지 세력은 757년, 이맘 아불 카탑의 지휘 하에 피흐르 조의 혼란을 틈타 오에아를 점령하였다. (이바디 이맘국) 수프리 세력의 학살 소식에 경악한 아불 카탑은 758년, 와르파주마 군대를 몰아내고 카이라완을 차지하며 이프리키야의 주요부를 장악했다. 이에 칼리파 알 만수르는 개국공신인 무함마드 이븐 알 아샤트 알 쿠자이를 이집트 및 이프리키야 총독에 봉하여 토벌을 맡겼다. 그는 2차례 원정군을 보냈으나 모두 이바디 측에 격퇴되자 761년, 직접 출정하여 미스라타 부근에서 벌어진 타와르가 전투에서 아불 카탑을 전사시켰다. 카이라완을 지키던 아불 카탑의 페르시아계 부관 압둘라흐만 빈 루스탐은 서쪽의 타헤르트로 도망쳐 후일 루스탐 왕조를 세운다.

이맘국의 멸망 후에도 무함마드 알 쿠자이 이후 765-68년간 총독이 5번이나 바뀔 정도로 이프리키야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특히 765년에 부임한 후라사니 아랍인 압바스 개국공신 알 아글라브 이븐 살림 앗 타미미는 이듬해 알 하산 이븐 하르브 알 킨디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러던 768년, 총독으로 부임한 우마르 이븐 하프스 알 무할라비가 서쪽 투브나의 방어를 강화하는 틈에 베르베르 인들이 봉기하였다. 이에 카이라완 성주 하빕 알 무할라비가 반격에 나섰으나 전사했다. 그후 이바디 이맘 아부 하팀 야쿱의 지휘 하에 베르베르 반군은 트리폴리 부근에 집결하였다. 현지 태수의 요청에 따라 우마르는 원군을 보내었지만 격파되어 가베스로 후퇴했다. 이후 수프리파의 아부 쿠라 알 이프라니, 이바디파의 압둘라흐만 빈 루스탐, 아부 하팀, 아심 앗 시드라티 등이 이끄는 카와리지 연합군이 투브나를 포위했다.

우마르는 아부 쿠라를 매수, 압둘라흐만을 격파했고 이에 아부 하팀은 투브나 대신 카이라완 공격에 나섰다. 투브나를 계속 요새화하던 우마르는 8개월간 포위된 카이라완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일부 병력을 남긴 채로 구원에 나섰다. 진격하던 우마르는 베르베르 군의 반격에 튀니스로 철수하기도 했으나, 결국 보급품과 함께 카이라완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부 하팀이 봉쇄를 강화하며 도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주민들은 가축을 잡아먹으며 버텼다. 이에 우마르는 성을 나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패하고 전사하였다. (771년) 이후 잔존 수비대는 아부 하팀과 협상하여 투브나로 철수했고, 이바디 베르베르 군이 카이라완을 함락했다. 다만 트리폴리는 함락되지 않았고, 8년간의 이집트 총독을 지낸 후 신규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부임한 야지드 이븐 하팀 알 무할라비는 그곳을 거점으로 출정해 772년 초엽 아부 하팀 야쿱을 전사시키고 몇달 간의 잔당 소탕 끝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는 이프리키야의 마지막 이바디 이맘국이었다.

야지드는 773년 카와리지, 781년 자브의 와르파주마 부족 등의 난을 진압하며 질서를 회복했다. 이어진 평화 속에서 그는 파괴된 카이라완 대사원을 복원했고, 16년간 재임하다 787년 사망하여 성문 근처에 묻혔다. 사후 아들 다우드가 계승했으나 통치력 결여로 지방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에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야지드의 동생 라우흐 빈 하팀을 총독으로 봉했다.[11] 다만 라우흐 역시 평판이 나빴고, 이를 우편국장이 보도하자 칼리파는 평판이 좋은 나스르 빈 하빕을 비밀리에 총독으로 지명했다. (791년) 마침 그해 초, 라우흐가 죽자 아들 카비사흐가 계승했으나 우편국장이 칼리파의 칙서를 보이자 나스르가 집권하였다. 다만 라우흐의 다른 아들 알 파들이 바그다드로 가서 칼리파를 설득하는데 성공, 793년에 총독으로 봉해졌다. 나스르는 즉시 해임되었고, 알 파들의 당도 전까지 알 무할라브 빈 야지드가 임시 총독으로 재임했다. 하지만 알 파들은 나스르 선호를 보인 준드 (현지 주둔군)를 박대하여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특히 튀니스에서는 준드가 태수이자 알 파들의 조카 알 무기라 빈 비슈르와 적대, 새 태수의 임명을 청했으나 알 파들은 거부했다. 이에 튀니스의 준드가 압둘라 이븐 알 자루드 하에 봉기하여 알 무기라를 축출했다. 그후 압둘라는 알 파들에게 반역의 뜻은 없고, 단지 적합한 이를 새로 임명해주기를 바란다는 서신을 보냈다. 따라서 알 파들은 사촌 압둘라 빈 야지드 빈 하팀을 튀니스 태수로 봉해 파견했으나, 압둘라가 협상차 보낸 수하들이 명령을 어기고 그를 공격해 죽여버리는 사태가 터졌다. 이에 더이상 타협이 불가능하다 여긴 압둘라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프리키야 각 도시들의 준드게 알 파들의 박대를 일깨우며 동참을 청했다. 이에 여럿이 호응하자 알 파들은 토벌에 나섰으나 패하여 카이라완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곧 압둘라가 도시를 포위했고, 주민들이 협상 끝에 성문을 열었다. (794년 10월) 이후 알 파들 및 그의 일행은 약속대로 가베스로 향했으나, 압둘라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알 파들을 처형하고 나스르 등 무할라브 가문 전원을 이프리키야에서 축출했다.

1.1.4. 아글라브 왕조의 수도[편집]


파일:튀니지 아글라브.jpg
아글라브 시기에 건설된 저수조

준드 반란 후 795년, 압바스 조정은 발흐 출신의 하르마타 빈 아얀을 총독으로 파견했다. 상황이 좀 안정된 797년에는 하룬 알 라시드의 의붓 형제인 후라사니 아랍인 무함마드 이븐 무카틸 알 악키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해 말엽, 카이라완에 당도한 무함마드는 빠르게 준드와 대립 관계가 되었다. 결국 마클리드 이븐 무라흐 알 아즈디의 반란이 터졌고, 무함마드는 군대를 보내 그를 죽이며 난을 진압했다. 그러나 799년 10월, 탐맘 이븐 타밈 앗 타미미가 재차 준드와 함께 튀니스에서 봉기하여 호응을 얻었다. 반군이 카이라완으로 남하하자 무함마드는 출정했으나 패하여 도시로 퇴각했다. 카이라완을 무혈 점령한 탐맘은 무함마드에게 이프리키야 퇴거를 대가로 안전을 보장했고, 후자는 수용하여 트리폴리로 향했다. 다만 트리폴리에 있는 동안 전 총독의 아들이자 795년부터 자브 태수를 맡고 있는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가 탐맘에게서 카이라완을 수복, 서신으로 이를 알렸다. 따라서 799년 말엽, 무함마드는 총독으로 복귀했다.

튀니스로 철수했던 탐맘은 재차 카이라완을 공격했으나 이브라힘에게 격퇴되었고, 결국 복속하였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실정이 계속되자 이브라힘은 칼리파에게 이를 고발하며 4만 디나르 금화의 연공을 대가로 총독위를 요구, 수용되었다. 이로써 800년 7월, 이브라힘이 이프리키야 총독에 오르며 1세기 넘게 이어진 아글라브 조가 시작된다. 이브라힘은 802년 함디스 이븐 압둘라흐만 알 킨디, 809년 임란 빈 무칼라드 등 준드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준드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자 이브라힘은 흑인 노예 부대를 창설했다.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브라힘은 카이라완의 성벽을 허물었고, 도시의 4km 남쪽에 새 궁정도시인 알 압바시야를 세워 거주하였다. 신 수도에는 벽돌 모스크, 루사파 궁전, 목욕탕, 시장, 여관 등이 있었고 거대한 저수조는 카이라완에도 물을 공급했다. 궁전 근처에는 군대 열병식이 열리는 큰 광장이 있었고, 여러 성문들에는 해방 노예로 구성된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그외에 시내에는 금화 및 은화 주조소, 궁정 예복 및 깃발 제조 공방 등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무터질라파에 속하던 이브라힘은 카이라완의 말리크파 울라마를 견제, 무타질리 이맘인 아부 무흐리즈를 카이라완 카디로 임명했다. (806년) 이프리키야에 안정을 회복한 이브라힘은 812년 7월에 사망했고, 아들 압둘라가 계승했다.





1.1.4.1. 상업적 번영[편집]




1.1.5. 파티마 왕조의 홀대 : 10세기[편집]




1.1.6. 지리 왕조의 수도 : 11세기[편집]



1.1.6.1. 1057년 : 제국의 역습[편집]


도시의 대대적인 파괴. 지리 왕조도 마흐디야로 천도


1.1.7. 하프스 왕조 : 13~15세기[편집]


1270년, 카이로완이 이슬람의 성지임을 부각시키며 유대인 추방


1.1.8. 근대 : 오스만 & 프랑스[편집]




1.2. 기타[편집]


파일:카이라완 튀니지 9.jpg
구도심 서부에는 대사원을 축소, 모방한 형태인 자이투나 모스크가 있다

튀니지의 역사를 도시로 표현해 보자면 카르타고 - 카이로완 - 마흐디야 - 튀니스의 순서이다.


2. 카이로우안 주[편집]


카이로우안 주 (튀니지)


위 도시를 포함하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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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세기에 재건한 대모스크는 이슬람의 주요 기념물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건축학적 걸작이다. 작은 변화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기도하는 장소는 세로 135m, 가로 80m의 사변형 형태라는 기본 배치를 유지하고 있다. 대모스크의 남쪽 끝에는 다주식(多柱式) 기도실이 있는데 포르티코(portico)가 있는 대리석으로 된 ‘숲’을 이룬 원주들이 17개의 네이브(nave)를 떠받들고 있고, 이보다 더 작은 북쪽 끝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정사각형 형태의 3층짜리 미너렛이 가로막고 있다.[2] 대모스크는 특히 그 독특한 장식 모티프 때문에 여러 마그레브 모스크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게다가 삼문 모스크(866)는 건물 정면에 조각을 새긴 이슬람 모스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수많은 고고학 유적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모스크, 삼문 모스크, 아글라브 분지를 보면 카이로우안이 이프리키야 헤지라의 초기문명을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성벽과 성문들(바브 에트 토우네스, 바브 엘 코우카, 바브 에흐 초우하다)로 보호된 카이로우안의 메디나에는 구불구불 얽힌 도로와 안뜰이 있는 집들이 보존되어 있다. 메디나의 스카이라인은 미너렛과 모스크와 자위야의 둥근 지붕이 두드러진다. 외부 벽에는 몇 개 안 되는 작은 창문이나 아치형 출입구가 있지만, 벽 안쪽에는 중정을 두고 있어 넓고 개방적이다. 사회 경제적 변화의 영향에 취약해진 이 전통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소중한 유산이다.[5] 카이로우안은 성도이자 이슬람의 정신적 수도 중 하나이다. 무함마드가 죽은 지 겨우 38년 후에 건축되었으며 마그레브에 세워진 최초의 예배 장소인 대모스크 옆에는 시디 사하브 자위야가 있다. 이곳에는 마호메트의 동료 중 한 명인 아부 자마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과거 카이로우안의 일곱 군데 순례지가 모든 이슬람교도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메카의 순례지 한 군데를 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6] 발음: al-Qayrawan (표준 아랍어) / Qeirwān (튀니지 아랍어)[7] 로마 시대 카르타고 속주. 알제리 동부 ~ 튀니지 ~ 리비아 서부 (트리폴타니아)까지를 이른다.[8] 일리아스를 트리폴리타니아 총독으로 봉하는 등의 조치[9] 한달라의 축출과 함께 그의 부관 아불 카타르 이븐 디라르 알 칼비 역시 폐위된 후 시리아 / 안달루스 아랍 군대끼리 충돌했다[10] 이때 아므란은 튀니스에 동행했다가 변심한 일야스에 의해 안달라스로 추방되었고, 하빕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었으나 배가 떠나기 직전 부친의 당파가 구출하여 라리부스 전투에 나서게 된 것. 일야스는 일대일 대결을 꺼렸으나 휘하 군대의 종용으로 나서게 되었다[11] 이후 다우드를 달래기 위해 1년 가량 이집트 총독에 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