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조원정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曺元正
(? ~ 1187년)
고려 중기의 무신. 옥공인 아버지와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천민의 신분이었음에도 무신정변이라는 난세의 시류에 잘 편승한 덕분에 무관직을 거쳐 정3품의 공부상서, 추밀원부사에까지 올라 당대의 집권자 이의민과 더불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족을 모르고 권세를 탐하다 기어이 난을 일으켰고 결국 반역죄로 목숨을 잃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조원정은 아버지가 옥공이었고 어머니는 관기였으며 모계는 할머니 대부터 관기였던 뼈 속까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본관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인데 이런 출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의종 대에는 7품의 무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소상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비슷하게 천한 출신이었던 이의민이 수박 실력이 뛰어나 정7품 별장의 직위를 받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미뤄보건대 조원정 역시 의종의 눈에 띄어 특별 승진을 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이후 조원정은 무신정변이 발발했을 때 이의민, 최세보 등과 더불어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하며 이의방을 도왔고 공로를 인정받아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6품 낭장을 거쳐 장군직에 올랐다. 조원정은 무신정권기 동안 줄을 잘 탄 덕분인지 이의방 집권기, 정중부 집권기를 거치는 동안 큰 굴곡없이 무관직을 수행했고 의종을 시해했다는 딱지가 붙어 경대승을 피해 도망쳐야 했던 이의민과는 달리 경대승 집권기에도 승승장구하며 정3품 공부상서를 거쳐 추밀원부사라는 고위직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원정의 성품은 관직에 어울리지 않게 탐학하고 포악했다고 전해지는데 관의 공공 재산인 마초를 달라는 요구를 거부한 장작감의 주부[1] 를 무고하여 귀양보내고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는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 극에 달해 말과 옷을 빼앗는 것은 물론 머리카락이 긴 사람을 보면 그 머리카락을 잘라 체로 삼아 가져갔을 정도로 엄청난 탐욕을 부렸다. 탐욕스러운 성미를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이의민 집권기인 1187년에 중서문하성의 공해전 조세를 횡령하려고 시도하기에 이른다. 이에 황실의 신임을 받는 문극겸, 두경승은 물론 한 때 한솥밥을 먹었던 최세보, 그 외에도 문장필, 이지명 등이 힘을 모아 조원정을 탄핵하였다. 이 일로 조원정은 추밀원부사에서 해임된 뒤 공부상서 직책에서도 치사(致仕)[2] 하는 형태로 해임되는 등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장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조원정은 문극겸 등을 살해하기 위해 석린, 석충, 주적 등과 모의한 뒤 가신과 아들들을 시켜 70여 명의 적당패를 모아 왕궁을 습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어전까지 침입해 왕에게 "우리는 두경승이 보내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고 왕궁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추밀사 양익경, 내시원 낭중 이규와 이찬 등 여러 사람을 죽이며 패악질을 부렸으나 좌승선 권절평[3] 이 군사들을 모아 북문으로 들어오자 이들 무리가 겁을 먹고 서문으로 도망쳐 흩어짐으로서 허무하게 진압되고 만다. 결국 무리에 속해있던 한 승려가 병에 걸린 거지 행세를 하며 도망치다가 중랑장 고안우[4] 에게 걸려 체포되었고 국문을 받던 과정에서 자신에게 지시를 내렸던 이들을 모두 누설하면서 조원정의 죄 역시 온 천하에 드러났다. 조원정, 석린 등 10여 명의 주모자들은 저자에 매달려 조리돌림을 당한 뒤 처형되었으며 그 무리 30여 명도 모두 주살되었다. 이후 조원정의 가산을 몰수했는데 얼마나 그 탐욕이 심했던지 재산이 170여 호(戶)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3. 평가[편집]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관 권경중이 평하기를 "무릇 성인이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기미에 대해서는 미세할 적에 삼가 방지책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금 조원정과 석린은 일개 군졸에서 출세하였으니 미천한 사람들 중에도 더 미천한 자였다. 명종(明宗)이 특별히 발탁하여 병권을 맡기고는 일을 벌이기 전에 능히 제어하지 못하자 마침내 창과 칼을 휘둘러 궁금(宮禁)에서 피를 밟게까지 하였으니 어찌 몹시 위태롭지 않았으랴."라 하였다. 애초부터 반란을 일으킬 만한 싹수가 노란 인물이었다는 것. 당대의 관점이 아닌 현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일자무식에 탐욕으로만 가득 찬 양아치들이 중앙 권력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시기였던 무신정권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출신 성분이 비슷했고 탐욕을 부렸음에도 면직에 이르지는 않았던 최세보,[5] 이광정 등의 예를 살펴보면 조원정은 무신들 중에서도 심할 정도로 막나가는 인물이었고 결국 같은 무신이었던 두경승, 최세보, 문장필 등이 보다 못해 문신 출신인 문극겸, 이지명과 힘을 합쳐 탄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권력 투쟁에서 허무하게 밀려났으나 고령의 나이에도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 성질 머리 때문인지 정신 못 차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반란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 해 같은 무신 출신인 권절평, 고안우 등에 의해 허무하게 진압되면서 그의 이름 석 자는 그대로 《고려사》<반역 열전>[6] 에 기록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5. 둘러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3:29:32에 나무위키 조원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하급 관리[2] 나이가 많아 관직을 그만두는 것.[3] 상장군과 서북면 병마사를 역임했던 유력한 무관 출신으로 후일 최충헌 형제가 집권한 직후 숙청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4] 후일 상장군까지 오르지만 최충헌 집권기에 명종이 폐위됨과 동시에 두경승 등과 더불어 삭탈관직 및 유배를 당하면서 숙청당했다.[5] 무신정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게 아니고 정변 직후 복직되어 무관직을 수행한 덕분인지 <반역 열전>이 아닌 <제신 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아들인 최비가 궁녀와 사통하는 대형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오래 지나지 않아 가문이 멸족당했다.[6] 이광정 역시 반역 열전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신정변에 참가한 이력 정도만 인정받은 것인지 <정중부 열전>의 부록으로 실렸다. 반면 조원정은 엄연히 또 다른 모반의 주모자였기에 단독 열전이 작성되었다.